‹ 목록으로 혼혈 황자, 이계를 사냥하다

4화

다행히 그 낮은 그르렁거림은 우리 쪽으로 오지 않았다. 나는 나무 뒤에 몸을 숨긴 채 한참을 숨죽이고 있었다. 소리는 서서히 멀어졌고, 결국 완전히 사라졌다. 다리에 힘이 풀렸다. 나는 그 자리에 그대로 주저앉았다. 숨을 크게 들이켰다. 폐가 아팠다. 방금까지 얼마나 숨을 참고 있었는지 그제야 알았다. 땅바닥에서 올라오는 냄새를 맡았다. 젖은 흙과 썩은 나무 냄새가 섞여 있었다. 어디선가 벌레 우는 소리가 들렸다. 이 위면에도 벌레가 있다는 게 이상하게 웃겼다. 지옥 비슷한 곳에도 매미는 우는구나.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잠시 눈을 감았다. "방심하지 마." 나침반이 말했다. "여긴 아직 첫 번째 위면이야." "방심할 힘도 없어." 나는 숨을 몰아쉬며 대꾸했다. 손을 무릎에 짚고 몸을 일으켰다. 다리가 후들거렸다. 아까 그 짐승을 상대했을 때 쓴 힘이 여전히 몸 안에서 삐걱거리고 있었다. 근육이 아니라 뭔가 다른 통로가 뻐근한 느낌이었다. 설명할 수 없는 감각이었지만, 그게 정상이 아니라는 것만은 분명했다. 손끝을 다시 들여다봤다. 검은 색이 조금씩 옅어지고 있었다. 손톱 밑에서부터 시작해 손가락 마디까지 번져 있던 그 색이, 이제는 손끝에만 겨우 남아 있었다. 아까 그 뜨겁고 낯선 감각도 서서히 잦아들었다. 하지만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었다. 몸 어딘가에 그 흔적이 남아 있는 게 느껴졌다. 심장 근처였다. 아니, 심장이라기보다는 심장 뒤편의 뭔가였다. "완전한 흡수 방법 알려줘." 나는 말했다. "위험해도 알아야겠어." 나침반은 잠시 뜸을 들였다. 바늘이 미세하게 흔들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실제로 소리가 날 리는 없는데도, 나는 그 침묵을 그렇게 느꼈다. "이수를 죽이고 피만 만지는 건 절반이야." 나침반이 말했다. "완전하려면, 심장을 먹어야 해." "뭐?" 나는 얼굴을 찌푸렸다. "진심이야?" "진심." 나침반의 바늘이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흑룡족 혈통은 원래 그렇게 힘을 흡수해. 네 아버지도 그렇게 컸어." 아버지. 흑룡대제. 얼굴 한 번 제대로 본 적 없는 존재였다. 나를 낳게 한 사람이지만, 나에게는 그냥 먼 소문 같은 존재였다. 어릴 때 몇 번 그 이름을 들은 적이 있다. 무섭다는 말과 존경한다는 말이 동시에 붙어 다니는 이름이었다. 지금 와서 그 이름의 무게를 실감하고 있자니, 기분이 이상했다. 나는 그 사람의 방식으로 살아남으려 하고 있었다. "그런 얘기 지금 안 해도 되는데." 나는 한숨을 쉬며 화제를 돌렸다. "어쨌든 심장을 먹으라고?" "먹으면 완전 흡수. 안 먹으면 지금처럼 절반짜리." 나침반이 답했다. "선택은 네가 해." 선택지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심장을 먹는다는 상상만으로도 위가 뒤집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십 일이라는 시간은 자비가 없었다. 절반짜리 힘으로 열흘을 버틸 수 있을지, 나는 자신이 없었다. "다음엔 그렇게 할게." 나는 결국 답했다. 목소리가 조금 무거워졌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속으로는 다른 생각이 들었다. 다음이 언제일지, 그리고 그 다음이라는 순간이 왔을 때 내가 정말 그럴 수 있을지. 지금은 대답을 미루는 것 외엔 다른 방법이 없었다. 우리는 자리를 옮겨 이동했다. 나침반이 방향을 알려줬다. 발밑으로 젖은 낙엽이 밟혔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눅눅한 소리가 났다. 바스락. 바스락. 검은 나무들이 점점 줄어들고, 대신 붉은 안개가 짙어지는 지대로 들어섰다. 시야가 흐려졌다. 처음엔 옅은 붉은 빛이 나뭇가지 사이로 스며드는 정도였는데, 걸음을 옮길수록 안개는 짙어져서 결국 서로의 손을 뻗어도 보이지 않을 정도가 되었다. "이 안개, 뭐야." 나는 팔로 앞을 휘저으며 물었다. "위면의 경계 지대야." 나침반이 답했다. "여기서부턴 규칙이 좀 다르게 적용돼. 조심해." 다르게 적용된다는 말이 정확히 뭘 의미하는지 물어보고 싶었지만, 그 답을 듣기 전에 다른 소리가 먼저 들렸다. 그리고 그 안개 속에서, 작은 울음소리가 들렸다. 짐승이 아니었다. 아기의 울음소리 같은, 하지만 사람의 것도 아닌 소리였다. 높고 가늘게 끊어지는 소리가 안개 사이로 스며 나왔다. 듣는 순간 목덜미가 서늘해졌다. 나는 걸음을 멈췄다. "뭐야, 저거." 나는 나침반에게 물었다. "모르겠어." 나침반의 대답이 처음으로 확신이 없었다. "위면 안에 이런 게 있을 리 없는데." 확신 없는 나침반의 목소리를 듣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게 오히려 더 불안했다. 지금까지 나침반은 늘 뭔가를 알고 있었다. 몰라서 당황하는 나침반이라니, 이 위면이 얼마나 예측 불가능한 곳인지 새삼 실감이 났다. 안개를 헤치고 다가가자, 작은 형체가 보였다. 새끼 이수였다. 몸통은 아까 그 여섯 다리 짐승과 비슷했지만, 크기는 강아지만 했다. 검은 비늘이 아직 여물지 않아서 여기저기 벌어진 틈으로 붉은 살이 비쳤다. 뒷다리 하나가 이상하게 꺾여 있었다. 다친 모양이었다. 가까이 다가가서 보니, 그 눈이 나를 향했다. 여섯 개의 눈 중 두 개만 겨우 뜨여 있었다. 그 두 눈이 나를 보며 다시 한 번 울었다. 그리고 그 뒤에서, 거대한 그림자가 다가오고 있었다. 조금 전 들었던 그 낮은 그르렁거림의 주인이었다. 몸통은 검은 비늘로 덮여 있었고, 크기는 아까 잡았던 짐승의 몇 배는 되어 보였다. 나무 사이로 몸을 움직일 때마다 나뭇가지가 부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눈은 여섯 개, 그중 두 개는 붉게 빛나고 있었다. 나머지 네 개는 어두운 회색으로, 마치 죽은 눈처럼 초점 없이 흐렸다. "저게 어미인가." 나는 몸을 낮추며 중얼거렸다. "아니." 나침반이 짧게 답했다. "저건 새끼를 먹으려는 거야. 같은 종족이야. 위면 안에서 약자는 늘 강자에게 먹혀. 그게 이 세계 규칙이야." 같은 종족이 같은 종족을 먹는다는 말에 헛웃음이 나왔다. 위면 밖의 세상도 그렇게 다르지 않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스쳤지만, 지금 그런 생각을 할 여유는 없었다. 나는 잠시 멈춰 섰다. 새끼 이수가 다시 울었다. 다친 다리로는 도망칠 방법이 없었다. 짧은 앞다리로 바닥을 긁으며 겨우 몸을 뒤로 끌었지만, 그마저도 몇 뼘 나가지 못했다. "구할 방법 있어?" 나는 물었다. 왜 물었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저건 규칙 밖의 일이야. 개입하면 위면이 우리를 적으로 인식할 수도 있어." 나침반이 답했다. 목소리에 처음으로 긴장이 실려 있었다. "그럼 안 구하는 게 맞는 거네." 나는 스스로에게 말하듯 중얼거렸다. 하지만 몸은 이미 움직이고 있었다. 이성과 몸이 따로 움직이는 순간이었다. 머리로는 규칙을 지키는 게 맞다는 걸 알면서도, 발은 이미 안개 속을 향해 뛰고 있었다. 나답지 않은 행동이라고 생각했다. 아니, 어쩌면 이게 나다운 행동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뒤이어 들었다. 나는 안개 속으로 뛰어들었다. 손끝에서 바람을 끌어모았다. 절반의 힘으로도, 지금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야 했다. 손바닥 안에서 바람이 뭉치는 느낌이 났다. 아까보다 확실히 약했다. 절반짜리 힘이라는 말이 그냥 비유가 아니었다는 걸 몸으로 느꼈다. "미친 거야." 나침반이 소리쳤다. "저 크기면 아까 그 짐승 스무 배는 세." "알아." 나는 이를 악물며 바람을 짐승의 눈으로 쏘아 보냈다. 바람이 짐승의 붉은 눈 하나에 정확히 부딪혔다. 짐승이 크게 울부짖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그 울음소리에 땅이 흔들리는 것 같았다. 그 틈에 나는 새끼 이수를 향해 달려갔다. 다친 다리를 조심스레 안아 올렸다. 생각보다 무거웠다. 그리고 뜨거웠다. 새끼는 몸을 떨었지만, 이번엔 울지 않았다. 대신 내 팔에 몸을 웅크리며 얼굴을 파묻었다. 이상한 기분이었다. 죽이러 온 종족의 새끼를 품에 안고 있는 나 자신이 어이없었다. 이러다 정말 망하겠다. 그런 생각이 스쳤지만 이미 늦었다. "이제 도망쳐야 돼." 나침반이 다급하게 말했다. 짐승이 다시 나를 향해 돌아섰다. 눈에서 뿜어지는 붉은 빛이 점점 더 밝아졌다. 도망칠 시간이 부족했다. 뒤를 돌아볼 겨를도 없이 짐승의 몸이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쿵. 쿵. 땅을 밟는 소리가 점점 커졌다. "나침반." 나는 짐승을 노려보며 말했다. "뭐라도 방법 있으면 지금 말해." 나침반은 잠시 침묵했다. 그 짧은 침묵이 유독 길게 느껴졌다. 팔에 안긴 새끼 이수의 심장이 빠르게 뛰는 게 느껴졌다. 내 심장도 그 못지않게 뛰고 있었다. 그리고 낮게, 확신에 찬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위면 규칙을 깨야 해. 대가는 나중에 치르겠지만." "뭔 대가." "몰라. 처음 있는 일이라." 나침반이 짧게 답했다. "할 거야, 말 거야." 물어놓고 답이 없다는 게 어이없었지만, 지금 그걸 따질 시간도 없었다. 짐승이 달려들기 시작했다. 시간이 없었다. 땅이 울렸다. 붉은 안개가 짐승의 움직임에 밀려 소용돌이치듯 흩어졌다. 그 사이로 짐승의 벌어진 입이 보였다. 이빨 사이로 검은 침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해." 나는 짧게 말했다. 더 생각할 시간도, 여유도 없었다. 지금 할 수 있는 건 그 말 한마디뿐이었다. 순간, 나침반의 바늘이 미친 듯이 회전하기 시작했다. 바늘이 도는 소리가 귓속을 파고들었다. 위이잉. 위이잉. 그 소리에 맞춰 손끝의 검은 흔적이 다시 뜨겁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뭔가가 일어나고 있었다. 좋은 일인지 나쁜 일인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이제 되돌릴 수 없다는 것만은 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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