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 ›쿵.
등이 바닥에 부딪혔다. 나는 몸을 웅크린 채 눈을 떴다. 하늘은 붉었다. 노을이 아니라, 원래 붉은색이었다. 나무들은 검은 줄기에 흰 잎을 달고 있었다. 익숙한 풀냄새는 없었다. 다만 짐승 특유의 비린내가 코를 찔렀다.
"여긴 어디야." 나는 몸을 일으키며 물었다. 손바닥에 흙 대신 붉은 모래가 묻어났다. 만져보니 촉감도 이상했다. 미세하게 진동하는 느낌이었다.
"첫 번째 위면." 나침반은 어느새 내 허리춤에 매달려 있었다. "규칙 알려줄게. 잘 들어."
"규칙?"
"여기서 신통력은 반만 쓸 수 있어. 위면 자체가 힘을 빨아먹거든." 나침반의 바늘이 천천히 돌았다. "그리고 시간제한이 있어. 여기서 한나절이 지나면, 문이 닫혀. 그 전에 이수 한 마리의 혈맥을 얻어야 다음 위면으로 넘어갈 수 있어."
"안 얻으면?"
"영원히 갇혀." 나침반이 뻔뻔하게 덧붙였다. "쉽지?"
쉽다는 말이 그렇게 짜증나게 들린 적은 오랜만이었다. 회사에서 "이 서류만 채우면 끝이에요" 하던 팀장 목소리랑 똑같은 어조였다. 그리고 그 말은 항상 거짓말이었다.
나는 주위를 둘러보며 손목을 확인했다. 시계는 없었다. 애초에 시계를 챙길 정신도 없이 끌려온 참이었다. 한나절이라는 게 도대체 몇 시간인지, 이 붉은 하늘에서는 해가 어떻게 움직이는지도 알 수 없었다. 답답했지만 물어봐야 나침반이 순순히 알려줄 것 같지도 않았다.
낮게 그르렁거리는 소리가 다시 들렸다. 나는 소리가 난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검은 줄기 나무들 사이에서 뭔가가 움직이고 있었다. 크기는 대략 송아지만 했고, 몸통은 뱀처럼 길었으며, 다리는 여섯 개였다. 눈은 세 개였는데, 세 개 다 나를 향해 고정돼 있었다.
"저게 이수야?" 나는 뒷걸음질치며 물었다.
"어. 약한 편이야." 나침반이 답했다.
"저게 약한 거면 강한 건 뭔데."
"몰라도 돼. 지금은."
몰라도 된다는 말이 가장 무서운 대답이라는 걸, 이 나침반이랑 지내면서 배웠다. 몰라도 된다는 건 대체로 알면 도망치고 싶어질 거라는 뜻이었다.
짐승이 움직였다. 여섯 개의 다리가 동시에 땅을 박찼다. 순식간에 거리가 좁혀졌다.
나는 몸을 옆으로 던졌다. 아슬아슬하게 이빨을 피했다. 이빨 사이로 침이 튀는 게 보였다. 끈적하고 검은 액체였다. 옷깃에 한 방울 튀었는데, 닿은 자리가 순간 뜨거워졌다. 부식성이 있는 침이라니, 이건 파충류 도감에도 안 나오는 스펙이었다.
어깨를 굴리며 일어서는 동시에 손을 뻗었다. 바람을 끌어당겼다. 손끝에서 회오리가 형성되었다. 절반의 힘이라 그런지, 예전보다 확실히 위력이 약했다. 평소라면 나무 한 그루쯤은 뿌리째 뽑았을 텐데, 지금은 겨우 나뭇잎 몇 장 떨어뜨리는 수준이었다.
회오리가 짐승의 다리를 감쌌다. 짐승이 균형을 잃고 옆으로 쓰러졌다.
"지금이야, 목이야." 나침반이 소리쳤다.
나는 생각할 겨를도 없이 달려들었다. 근처에 떨어진 나뭇가지를 주워 끝을 짐승의 목에 박아 넣었다. 나뭇가지는 생각보다 단단했다. 부러지지 않은 게 다행이었다. 짐승이 발버둥을 쳤다. 몸통 전체가 뒤틀리며 나를 튕겨냈다. 나는 나무 줄기에 등을 부딪히며 나동그라졌다.
숨이 턱까지 차올랐다. 옆구리가 뻐근했다. 갈비뼈가 부러지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스쳤지만, 지금 그걸 확인할 여유는 없었다. 짐승은 아직 죽지 않았다. 목에서 검은 피가 흘렀지만, 다시 몸을 일으켜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세 개의 눈이 각각 다른 속도로 깜빡였다. 그 비대칭적인 움직임이 어딘가 소름 끼쳤다.
"한 번 더." 나침반의 목소리는 무덤덤했다. "이번엔 놓치면 진짜 끝이야."
"그런 말 지금 안 해줘도 돼." 나는 이를 악물며 몸을 일으켰다. 다리가 후들거렸다. 그래도 일어섰다. 일어서지 않으면 여기서 이수 밥이 되는 거고, 그러면 사무실 임대료도 못 내고 죽는 거였다. 이런 순간에도 임대료 생각이 나는 내가 참 한심했다.
짐승이 다시 달려들었다. 나는 이번엔 피하지 않았다. 두 손을 앞으로 뻗고 바람을 있는 대로 끌어모았다. 절반의 힘, 그것도 최대치까지. 손끝이 저릿저릿했다. 관자놀이에서 땀이 흘러 눈으로 들어갔다. 시야가 흐려졌지만 손을 거두지 않았다.
회오리가 짐승의 몸통 전체를 휘감았다. 짐승이 허공으로 튕겨 올랐다. 그대로 나무에 부딪혀 떨어졌다. 나무 줄기가 반쯤 부러지며 기울었다. 짐승은 이번엔 움직이지 않았다.
나는 숨을 몰아쉬며 다가갔다. 다리가 여전히 후들거렸다. 짐승의 목에서 흐르는 검은 피가 웅덩이를 이루고 있었다. 냄새는 가까이 갈수록 지독해졌다. 상한 생고기와 화약을 섞은 냄새랑 비슷했다.
"이제 어떻게 해." 나는 물었다.
"손을 대. 피에." 나침반이 말했다.
"직접? 장갑도 없이?"
"장갑 있었으면 진작 줬지." 나침반이 태연하게 답했다.
말이야 옳은 말이었다. 나는 잠시 망설였다. 짐승의 피는 걸쭉하고 검었으며, 표면에 기포가 천천히 올라왔다 터졌다.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여기 계속 있을 수도 없었다. 시간제한이라는 말이 머릿속에서 계속 맴돌았다. 나는 손을 뻗어 피 웅덩이에 손끝을 담갔다.
순간, 팔 전체를 타고 뭔가가 흘러들었다. 뜨겁고, 낯설고, 이질적인 감각이었다. 몸 안에서 무언가가 요동쳤다. 마치 오랫동안 잠들어 있던 것이 깨어나는 느낌이었다. 심장이 두 번 크게 뛰었다가 이상한 박자로 어긋났다. 그 순간만큼은 숨을 쉬는 법을 잊어버린 것 같았다.
"어……" 나는 말을 잇지 못했다. 손끝이 떨렸다.
"됐어." 나침반의 바늘이 처음으로 빠르게 돌았다. "성공이야."
나는 손을 들어 눈앞에 가져왔다. 손톱 끝이 아까보다 조금 더 짙은 색을 띠고 있었다. 미묘한 변화였지만, 분명한 변화였다. 손끝을 굽혔다 펴봤다. 감각이 조금 더 예민해진 것 같기도 했다. 확신할 수는 없었다.
"이게 혈맥 흡수야?" 나는 물었다.
"일부. 완전한 방법은 다음에 알려줄게." 나침반이 말했다.
"왜 지금 안 알려줘."
"지금 알려주면 네가 무리할 것 같아서." 나침반의 대답이 의외로 냉정했다. "몸에 무리 가면 안 돼. 아직은."
"아직은, 이라는 말이 자꾸 걸리는데."
"걸리라고 한 말이야." 나침반이 짧게 답했다.
나는 그 말에 뭔가 걸리는 게 있었지만, 당장 캐물을 여유는 없었다. 몸이 무겁고, 정신이 어질했다. 짐승과의 싸움에서 얻은 상처들이 이제야 아파오기 시작했다. 옆구리는 욱신거렸고, 어깨는 뻐근했다. 손바닥에는 나뭇가지를 쥐면서 생긴 물집이 잡혀 있었다. 이런 몸으로 다음 위면까지 버틸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나는 주저앉듯 자리에 앉아 잠시 숨을 골랐다. 붉은 하늘 아래, 죽은 짐승의 몸통이 서서히 검은 재처럼 부스러지고 있었다. 신기했다. 손을 대서 만져보고 싶었지만 참았다. 한 번 데었으면 됐다.
"저거, 원래 저렇게 사라지는 거야?" 나는 물었다.
"응. 혈맥을 흡수당한 이수는 다시 위면으로 돌아가." 나침반이 답했다. "죽는 게 아니야. 그냥, 잠깐 여기서 밀려나는 거지."
"그럼 나중에 또 만날 수도 있어?"
"운이 나쁘면."
운이 나쁘면, 이라는 대답이 이렇게 무섭게 들릴 수 있다는 걸 오늘 처음 알았다.
하지만 안심할 틈도 없었다. 저 멀리, 검은 나무들 사이에서 또 다른 그르렁거림이 들렸다. 이번엔 조금 전보다 훨씬 낮고, 훨씬 무거운 소리였다. 땅이 미세하게 울렸다. 발밑의 붉은 모래가 진동에 맞춰 잘게 튀어 올랐다.
"저건 뭐야." 나는 몸을 굳히며 물었다.
나침반은 잠시 대답이 없었다. 침묵이 길어질수록 불안이 커졌다. 나는 나침반을 흔들어 보고 싶은 충동을 겨우 참았다.
"저건." 마침내 나침반이 입을 열었다. "약한 편이 아니야."
나는 자리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다리는 여전히 후들거렸고, 옆구리는 여전히 욱신거렸다. 하지만 일어서야 했다. 그르렁거림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고, 나무들 사이로 언뜻 보이는 그림자는 방금 상대했던 짐승보다 두 배는 더 커 보였다.
"방금 그거 약한 편이라고 했잖아." 나는 나침반을 향해 낮게 말했다. "그럼 이번 건 대체 얼마나 큰 건데."
나침반은 대답하지 않았다. 바늘만 불안하게 흔들렸다. 그 침묵이 무엇보다 정확한 대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