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혼혈 황자, 이계를 사냥하다

5화

바늘이 회전하는 동안, 내 손끝에서 뭔가가 터져 나왔다. 절반의 힘이 아니었다. 온전한 힘, 그 이상이었다. 몸속 깊은 곳에서 뭔가가 뜯겨 나가는 느낌이 들었고, 그 자리를 다른 것이 채웠다. 바람이 아니라 폭풍이었다. 콰아아앙. 짐승의 몸이 통째로 밀려났다. 검은 비늘이 갈라지며 피가 튀었다. 튄 피가 허공에서 검은 안개처럼 흩어지는 게 보였다. 나는 새끼 이수를 품에 안은 채 바람의 흐름을 타고 뒤로 물러났다. 발이 땅에서 떨어졌다가 다시 붙는 감각이 이상했다. 뭔가를 타고 미끄러지는 것 같기도 하고, 그냥 밀려나는 것 같기도 했다. 짐승은 균형을 잃고 나무들을 부러뜨리며 옆으로 넘어졌다. 우지끈. 쿠웅. 조용해졌다. 나는 숨을 몰아쉬며 그 자리에 섰다. 팔이 부들부들 떨렸다. 손끝부터 시작된 떨림이 팔꿈치를 지나 어깨까지 올라왔다. 방금 그 힘이 어디서 나왔는지 알 수 없었다. 몸은 분명 내 것인데, 그 힘의 출처는 낯설었다. 마치 남의 지갑에서 돈을 꺼내 쓴 기분이었다. 쓰긴 썼는데 누구 돈인지 모르는. "나침반, 지금 이게 뭐야." 나는 물었다. "규칙 위반의 대가. 페널티를 강행해서 임시로 힘을 끌어올린 거야." 나침반의 목소리가 평소보다 낮았다. 어딘가 조심스러웠다. "성공했으니 됐어." "됐다고 넘어갈 문제야?" 나는 되물었다. "넘어가야지. 지금은." 나침반이 말을 흐렸다. 뭔가 숨기는 게 있었다. 그건 확실했다. 평소 같으면 저 자신만만한 목소리로 규칙 어디에 뭐라고 쓰여 있는지 줄줄 읽어줬을 텐데, 지금은 문장 끝을 흐리고 있다. 이상했다. "임시로 끌어올렸다는 힘, 그거 다시 못 써?" "못 써. 페널티는 페널티야. 한 번 쓴 카드는 다시 안 나와." 나침반이 답했다. 이번엔 목소리에 힘이 좀 돌아와 있었다. 카드 얘기가 나오니 갑자기 도박판이 떠올랐다. 나는 지금 목숨을 걸고 카드놀이를 하고 있는 셈이었다. 판돈은 내 몸이고, 딜러는 이 나침반이었다. 새끼 이수가 내 품에서 작게 몸을 뒤척였다. 다친 다리에서 흘러나온 피가 옷을 적셨다. 축축하고 뜨뜬한 감촉이 팔에 그대로 느껴졌다. 나는 그것을 안은 채 근처 나무 그늘로 자리를 옮겼다. 검은 나무의 그늘은 이상하게 서늘했다. 볕이 없어도 서늘한 게 아니라, 뭔가 그늘 자체가 온도를 빨아들이는 느낌이었다. 다리를 살펴봤다. 부러진 게 아니라 삐끄러진 정도였다.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이거 어떻게 해야 해." 나는 물었다. "방치해도 돼. 위면의 존재는 우리랑 상관없어." 나침반이 사무적으로 답했다. 사무적이라는 말이 딱 맞았다. 보험사 상담원이 손해사정 결과를 읊는 투였다. "방치하라며 아까는 왜 규칙 깨고 살렸는데." 나는 나침반을 흘겨봤다. "……그건." 나침반이 말을 멈췄다. 처음으로 대답을 고르는 기색이었다. "몰라. 나도 왜 그랬는지 모르겠어." 의외의 답이었다. 늘 확신에 차 있던 목소리에 처음으로 균열이 생긴 순간이었다. 규칙을 줄줄 읊던 그 입에서 나온 몰라, 라는 두 글자가 이상하게 무겁게 들렸다. 나는 옷자락을 찢어 헝겊을 만들었다. 그리 좋은 옷도 아니었지만, 그래도 아까웠다. 이 옷 한 장이 나한테 얼마나 중요한지 나침반은 알까. 알아도 신경 안 쓸 거고, 몰라도 신경 안 쓸 거였다. 나는 새끼 이수의 다리를 헝겊 조각으로 감쌌다. 손끝이 아직 떨리고 있어서 감는 게 서툴렀다. 두 번 풀렸다가 세 번째에 겨우 제대로 감겼다. 새끼는 낮게 낑낑거리다가 이내 조용해졌다. 다리를 감는 동안 나를 빤히 쳐다봤다. 세 개의 눈이 동시에 나를 향하고 있는 게 여전히 익숙해지지 않았다. "너 놔두고 가면 저 짐승 다시 올 텐데." 나는 새끼를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멀리서 넘어진 짐승이 다시 몸을 일으키는 소리가 들렸다. 쿵, 쿵, 무겁게 땅을 짚는 소리. 아직 멀지만, 그리 멀지도 않았다. 결국 새끼를 안고 이동하기로 했다. 나침반은 특별히 반대하지 않았다. 그게 오히려 이상했다. 원래대로라면 규칙 얘기부터 꺼냈을 텐데, 이번엔 조용했다. "반대 안 해?" 나는 물었다. "반대해도 어차피 안고 갈 거잖아." 나침반이 말했다. 맞는 말이라 반박할 수가 없었다. 우리는 붉은 안개를 벗어나 다시 검은 나무 지대로 들어섰다. 나무들 사이로 스며드는 붉은 빛이 점점 옅어졌다. 대신 검은 그늘이 짙어졌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해도 달도 없는 이곳에서는 시간을 잴 방법이 없었다. 나침반이 알려준 한나절이라는 제한이 머릿속에서 계속 맴돌았다. 몇 시간이 지났는지, 몇 분이 남았는지, 아무것도 확실하지 않았다. "이제 뭘 해야 돼." 나는 물었다. "이 위면은 이걸로 됐어." 나침반이 답했다. "첫 번째 혈맥은 얻었고. 다음 위면으로 넘어가면 돼." "이 새끼는." "두고 가." 나침반이 말했다. 짧고 단호했다. "위면 존재는 위면을 벗어나면 소멸해." 예상했던 답이었지만, 막상 들으니 기분이 좋지 않았다. 알고 있던 사실이라도 직접 들으니 무게가 달랐다. 나는 새끼 이수를 안고 잠시 서 있었다. 팔 안쪽에서 느껴지는 온기가 신경 쓰였다. 이 온기가 사라진다는 걸 알면서도 계속 안고 있는 게 무슨 의미가 있나 싶었다. 새끼가 나를 올려다봤다. 눈이 세 개인데도 그 표정만은 이상하게 사람 같았다. 억울해하는 것도 아니고, 애원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냥 나를 보고 있었다. "미안하다." 나는 나무 밑에 새끼를 조심히 내려놓았다. 근처에 마른 잎을 모아 자리를 만들어줬다. 손으로 잎을 긁어모으는 동안 나침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게 최선이었다. 더 해줄 수 있는 게 없었다. 잎더미가 두툼해질 때까지 계속 모았다. 필요 이상으로 많이 모은 것 같기도 했다. 어차피 사라질 존재한테 잠자리를 만들어주는 게 무슨 의미가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손은 멈추지 않았다. "감정 소비할 시간 없어." 나침반이 재촉했다. "문 열게." "조금만." "조금만이 계속 늘어나잖아." 나침반이 말했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바늘이 다시 빛을 뿜기 시작했다. 검은 구멍이 지면에서 솟아올랐다. 구멍 가장자리가 일렁이며 안쪽으로 빛을 빨아들였다. 나는 마지막으로 새끼를 한 번 돌아봤다. 새끼는 잎더미 위에 몸을 웅크린 채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다친 다리를 몸 안쪽으로 접어 넣고, 남은 두 다리로 잎더미를 파고드는 자세였다. 그리고 그 순간, 나는 뭔가 이상한 걸 느꼈다. 새끼의 눈이 아주 짧게, 사람의 것처럼 깜빡였다. 한 번. 그리고 다시 한 번. "저거 봤어?" 나는 나침반에게 물었다. "뭘." "됐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착각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눈이 세 개인 짐승이 눈을 깜빡이는 게 뭐가 대수인가. 사람처럼 보였다고 사람인 건 아니었다. 구멍으로 뛰어들기 전, 나는 몸을 살펴봤다. 손톱 끝의 검은 색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처음 봤을 때보다 더 진해진 것 같기도 했지만 확신은 없었다. 그리고 아까 그 폭풍 같은 힘을 쓴 이후로, 팔뚝 안쪽에 옅은 비늘 무늬가 새로 생겨 있었다. 손으로 문질러 봤지만 지워지지 않았다. 피부에 그린 게 아니라 피부 자체가 변한 것 같았다. 흑룡족 특징이었다. 좋은 신호일 수도, 나쁜 신호일 수도 있었다. "이거 정상이야?" 나는 팔을 들어 보이며 물었다. "정상 범위 안이야." 나침반이 답했다. 하지만 대답이 조금 빨랐다. 너무 빨랐다. 질문이 끝나기도 전에 답이 나온 느낌이었다. 준비된 대답, 아니면 외운 대답. "거짓말하는 거 아니지." "아니야." 나침반이 딱 잘라 말했다. 이번엔 확신이 있었다. 확신이 있다는 게 오히려 더 의심스러웠다. 사람도 그렇다. 너무 확실하게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은 대체로 뭔가를 감추고 있다. 나는 팔뚝의 비늘 무늬를 다시 한번 내려다봤다. 무늬는 옅었지만 분명 그 자리에 있었다. 내 살갗인데 내 것이 아닌 것처럼 낯설었다. 이게 흑룡족 혈통이 깨어나는 첫 신호라면, 나머지 위면을 거치는 동안 이게 얼마나 더 퍼질지 알 수 없었다. "더 생겨?" 나는 물었다. "몰라." 나침반이 대답했다. 방금 전까지 확신에 차 있던 목소리가 다시 흔들렸다. 몰라, 라는 말을 이 짧은 시간 동안 두 번이나 들었다. 나침반한테서. 이 존재가 확신 없이 말하는 걸 듣는 게 오늘 두 번째였고, 두 번째는 첫 번째보다 더 불안했다. 나는 더 캐묻지 않고 구멍으로 몸을 던졌다. 이 첫 번째 위면은 이렇게 끝났다. 겉으로는 성공이었다. 혈맥도 얻었고, 살아서 나가는 것도 성공했다. 새끼 이수는 두고 왔지만, 그건 애초에 내가 할 수 있는 선택지에 없던 일이었다. 하지만 몸속 어딘가에서, 뭔가 낯선 것이 조용히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다. 팔뚝의 비늘 무늬, 손톱의 검은 색, 그리고 방금 썼던 그 폭풍 같은 힘. 이 세 가지가 서로 연결되어 있는 건지, 아니면 각자 다른 이유로 생긴 건지도 알 수 없었다. 그게 뭔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 다만 확실한 건, 이게 첫 번째일 뿐이라는 것이었다. 남은 위면은 아직도 많았다. 그리고 시간은, 이제 십 일도 채 남지 않았다. 떨어지는 감각 속에서, 나는 나침반의 바늘이 아주 잠깐 멈춰 서는 걸 봤다. 방향을 잃은 것처럼. 아니면 뭔가를 두려워하는 것처럼. 바늘은 곧 다시 돌기 시작했지만, 그 짧은 정지가 계속 머릿속에 남았다. 나침반이 멈추는 걸 본 건 처음이었다. 지금까지는 늘 확신에 차서 방향을 가리키던 물건이었다. 그게 잠깐이라도 멈췄다는 건, 뭔가 예상 밖의 일이 벌어졌다는 뜻이었다. 주변의 어둠이 점점 짙어졌다. 떨어지는 속도가 빨라지는 건지, 아니면 어둠이 나를 감싸는 건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몸이 가벼워지는 느낌과 동시에 뭔가 무거운 것이 가슴 한가운데 얹히는 기분이 들었다. "다음 위면은 어떤 곳이야." 나는 어둠 속에서 물었다. 대답이 없었다. "나침반." "……준비해." 한참 뒤에야 나침반이 답했다. 목소리가 아까보다 더 낮게 깔려 있었다. "이번엔 좀 다를 거야." 좀 다를 거라는 말이 이상하게 불길했다. 첫 번째 위면에서 이미 죽을 뻔했는데, 다르다는 게 더 쉬워진다는 뜻은 절대 아닐 것 같았다. 나는 팔뚝의 비늘 무늬를 한 번 더 내려다봤다. 어둠 속에서도 그 무늬만은 옅게 빛나는 것처럼 보였다. 착각인지 아닌지 확인할 시간도 없이, 떨어지는 속도가 갑자기 빨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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