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정우진의 원룸은 강원도 산골짜기 소도시의 변두리에 있었다.
창밖으로는 늦가을의 마른 산등성이가 펼쳐져 있었고, 버스가 하루에 여섯 번밖에 오지 않는 정류장이 오백 미터 밖에서 홀로 서 있었으며, 그 흔한 편의점조차 걸어서 십오 분은 나가야 했는데, 그런 고립된 위치가 오히려 정우진에게는 편안하게 느껴졌다.
대학교 3학년, 전공 수업과 조별 과제 사이에서 그는 늘 조용한 쪽을 택했다.
동기들과 밥을 먹을 때도 대화의 흐름을 놓치지 않으려 신경을 곤두세우다가 결국 먼저 자리를 뜨는 쪽은 언제나 그였고, 그렇게 방으로 돌아오면 그를 기다리는 건 낡은 헤드셋과 노트북 화면에 뜨는 익숙한 아이콘 하나뿐이었다.
음성채팅 커뮤니티 '늦은 오후'.
대학 입학 직후, 우연히 흘러들어간 그 채널에서 정우진은 처음으로 숨을 편하게 쉴 수 있었다.
얼굴도, 나이도, 사는 곳도 모른 채 목소리만으로 오가는 대화 속에서 그는 굳이 자신을 설명할 필요가 없었고, 상대가 자신을 어떻게 평가할지 미리 계산할 필요도 없었으며, 그저 헤드셋 너머로 흘러나오는 낮고 부드러운 음성 하나에 집중하면 그것으로 충분했다.
그 목소리의 주인이 한서인이었다.
정확한 나이도, 얼굴도 모르지만 정우진보다 몇 살은 위라는 것과, 재택으로 일을 한다는 것과, 언제 접속해도 그녀가 그 시간에 그 자리에 있다는 사실만은 분명했다.
서인의 목소리는 늘 여유로웠다.
급한 일에도 서두르는 법이 없었고, 감정이 격해질 만한 상황에서도 한 톤 낮춘 웃음으로 상황을 정리했으며, 그런 태도가 정우진에게는 어른스러움의 표본처럼 느껴졌다.
1년이 넘는 시간 동안, 정우진은 그녀에게 자신의 하루를 늘어놓았고, 시험을 망친 날에도, 조별 과제에서 배제당한 날에도, 헤드셋 너머의 그녀는 언제나 같은 자리에서 그의 말을 들어주었다.
'실제로 만나면 어떨까.'
가끔 그런 생각이 스쳤지만, 정우진은 그 생각을 곧 접었다.
온라인에서만 존재하는 관계라는 걸 알고 있었고, 그 경계를 넘는 순간 지금 가진 것마저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늘 앞섰기 때문이었다.
***
12월 초, 목요일 오후 여섯 시.
정우진은 전공 서적을 펼쳐놓은 채 라면 물을 올리고 있었다.
창밖은 이미 어두웠고, 히터 돌아가는 소리와 물이 끓어오르는 소리가 좁은 원룸을 채우고 있었는데, 그 익숙한 정적을 깨는 초인종 소리가 울린 건 그야말로 예고 없는 일이었다.
딩동.
정우진은 순간 몸이 굳었다.
택배는 이미 낮에 받았고, 이 시간에 찾아올 사람은 이 동네에 아무도 없었으므로, 그는 인터폰 화면을 확인하러 가는 걸음마저 조심스러워졌다.
화면 속에는 처음 보는 여자가 서 있었다.
짙은 코트를 걸치고, 어깨까지 내려오는 머리를 정갈하게 넘긴 여자였는데, 화면 너머로도 느껴지는 단정한 분위기와 낯익은 듯 낯선 얼굴선이 정우진의 기억 어딘가를 건드렸지만, 도무지 누구인지 짚어낼 수 없었다.
"저기요." 여자가 인터폰 카메라를 향해 살짝 몸을 기울이며 입을 열었다. "정우진 씨, 맞으시죠."
정우진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자신의 이름을 아는 낯선 여자가 이 외딴 원룸 앞에 서 있다는 사실 자체가 비현실적이었고, 그는 문을 열지 말지를 두고 잠깐 갈등했지만, 여자의 목소리가 이어지는 순간 그 갈등은 다른 종류의 충격으로 바뀌었다.
"나야, 서인이."
순간 정우진은 숨을 멈췄다.
헤드셋 너머로만 들어온 그 목소리와, 지금 인터폰 스피커를 타고 흘러나오는 목소리가 겹치는 데 걸린 시간은 짧았지만, 그 짧은 시간 동안 정우진의 머릿속에서는 지난 1년의 대화들이 한꺼번에 재생되었다.
손끝이 떨렸다.
문을 열어야 하는지, 아니면 이대로 못 들은 척 침묵해야 하는지, 판단이 서지 않는 채로 그는 결국 현관으로 걸어갔고, 잠금장치를 돌리는 손끝에 이미 식은땀이 배어 있었다.
문이 열리자, 코트 자락을 정리하며 서 있던 여자가 그를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서인이었다.
실제로 마주한 그녀는 온라인에서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또렷한 존재감을 지니고 있었는데, 서른 초중반쯤으로 보이는 나이에 걸맞은 차분한 인상과, 값이 나가 보이는 코트, 그리고 무엇보다 흔들림 없는 눈빛이 정우진을 압도했다.
"저... 어떻게..." 정우진이 말을 끝맺지 못한 채 더듬거리자, 서인은 옅게 웃으며 그의 말을 가로챘다.
"주소는 예전에 택배 보내면서 알아뒀어." 그녀가 담담하게 대답했다. "놀랐지, 미안해. 근데 이건 직접 말해야 할 것 같아서."
정우진이 뭐라 대답할 틈도 없이, 서인이 코트 안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려는 듯 손을 움직였다.
"우진아." 그녀가 그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는 지금까지 헤드셋 너머로 들었던 어떤 톤과도 다른 무게가 실려 있었다. "우리, 결혼하자."
정우진은 순간 자신이 무슨 말을 들었는지 이해하지 못한 채 그 자리에 굳어버렸다.
***
"네?" 정우진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지금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고, 방금 들은 말이 농담인지 진심인지조차 구분되지 않은 채, 그는 그저 눈앞의 여자를 멍하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장난 아니야." 서인이 정색한 얼굴로 못을 박듯 말했다. "진심이야, 나."
"그, 그게... 저희 만난 적도 없잖아요." 정우진이 겨우 정신을 붙잡고 반박했다. "1년 넘게 얘기는 했지만, 이렇게 갑자기..."
"만난 적 없다는 것도 이제 아니잖아." 서인이 현관 안쪽을 슬쩍 들여다보며 말을 이었다. "지금 만났으니까."
그 말에 정우진은 말문이 막혔다.
논리적으로 반박할 여지가 있는 것 같으면서도, 서인의 태도에는 어떤 균열도 허용하지 않겠다는 단호함이 있었고, 정우진은 이 상황에서 벗어날 방법을 찾으려 애써 머리를 굴렸지만, 마음만 급해질 뿐 아무런 말도 떠오르지 않았다.
"일단, 저는... 죄송한데, 이건 좀 곤란한 것 같아요." 정우진이 최대한 예의를 갖춰 거절의 뜻을 내비쳤다. "저희, 결혼이라는 건 서로 오래 알고, 신뢰가 쌓이고..."
"신뢰는 이미 쌓였잖아." 서인이 그의 말을 자르며 되받았다. "1년 넘게 매일같이 대화했는데, 그거보다 확실한 신뢰가 어디 있어."
정우진은 순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뭔가 근본적으로 어긋나 있다는 느낌이 등줄기를 서늘하게 훑고 지나갔고, 그는 다시 한번 문을 닫고 이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은 충동을 느꼈지만, 이미 서인의 발끝이 현관 문턱 안쪽으로 슬쩍 들어와 있다는 걸 눈치채고는 그 충동마저 접어야 했다.
"저... 일단 오늘은 이만 돌아가시고, 나중에 다시..." 정우진이 문을 조금씩 밀며 상황을 정리하려 했지만, 그 순간 서인의 손이 문틀을 붙잡았다.
"우진아." 그녀의 목소리가 한층 낮아졌다. "나 오늘 안 가."
정우진의 심장이 다시 한번 덜컥 내려앉았다.
지금까지 헤드셋 너머로 알아온 그 우아하고 여유로운 서인과, 지금 눈앞에서 물러설 기색 없이 문틀을 붙잡고 있는 이 여자 사이의 간극이 너무 커서, 그는 이 사람을 정말로 자신이 알던 그 서인이라고 확신할 수 있는지조차 헷갈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순간, 서인이 코트 주머니에서 짤랑거리는 소리를 내며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정우진의 시선이 그녀의 손끝으로 향했다.
열쇠였다.
낡지 않은, 방금 복사한 듯 반질거리는 열쇠 하나가 서인의 손가락 사이에서 흔들리고 있었는데, 그 모양이 어딘가 익숙하다는 걸 깨닫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자신의 원룸 현관 열쇠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