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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정우진은 밥그릇을 든 채, 창가 쪽으로 걸어가 통화를 받는 서인의 뒷모습을 조심스럽게 살폈다. 아침 볕이 창틀을 타고 들어와 서인의 어깨선을 비스듬히 가르고 있었는데, 그 각도 때문인지 그녀의 등이 유난히 곧고 긴장되어 보였다. "...아니, 그건 지금 얘기할 문제가 아니야." 서인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내가 정리한다고 몇 번을 말해." 전화기를 쥔 서인의 손가락 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고, 정우진은 그 떨림을 눈치채지 못한 척, 밥그릇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짧은 정적이 흐른 뒤, 서인이 전화를 끊었다. 돌아서는 그녀의 얼굴에는 다시 표면적인 미소가 걸려 있었지만, 정우진은 그 미소 아래 감춰진 긴장감을 놓치지 않았다. "별일 아니야." 서인이 먼저 선수를 쳤다. "일 때문에." "...일이 좀 복잡한가 봐요." 정우진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냥, 늘 있는 일이야." 서인이 대수롭지 않게 넘기며 자리에 다시 앉았다. 정우진은 그 말을 믿을 수 없었지만, 더 캐묻지 않았다. 대신 그는 밥그릇을 정리하며, 어제부터 지금까지 마주한 서인의 여러 얼굴들을 하나씩 떠올려보았다. 헤드셋 너머로 알아온 여유롭고 우아한 서인, 열쇠를 몰래 복사하고 녹음기를 들이대는 집요한 서인, 통화 한 번에 낯빛이 바뀌는 불안한 서인, 그리고 계란을 태우고 뾰로통해하던 순박한 서인까지. 그 얼굴들은 하나같이 서인이라는 사람의 조각들이었지만, 그 조각들이 서로 맞물리지 않고 어긋난 퍼즐처럼 흩어져 있어서, 정우진은 그 어긋난 틈새마다 뭔가 숨겨진 것이 있으리라는 예감을 지울 수 없었다. '대체 어떤 게 진짜야.' 정우진은 그 질문에 아직 답을 찾을 수 없었다. 설거지를 하는 동안에도 그는 서인의 뒤통수를 몇 번이나 훔쳐보았는데, 서인은 식탁에 앉아 휴대폰 화면을 들여다보다가 이내 꺼버리고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창밖으로 시선을 돌리고 있었다. *** 오후 두 시, 원룸 근처 골목. 서인이 갑자기 외출을 제안한 건, 오전의 통화 이후 어색하게 흐르던 침묵을 깨기 위해서였는지도 몰랐다. "동네 좀 둘러보자." 서인이 코트를 걸치며 말했다. "여기 살면서 자주 가는 곳 정도는 알아둬야지." 정우진은 얼떨결에 따라나섰고, 두 사람은 좁은 골목을 나란히 걸었다. 마을은 작았고, 상가는 몇 개뿐이었으며, 그마저도 오래된 간판을 달고 있어 서인이 보기에는 낯설고 소박한 풍경이었지만, 그녀는 그 모든 것을 흥미롭게 눈에 담았다. 낡은 철물점 앞을 지날 때 서인은 걸음을 멈추고 진열창 안의 녹슨 도구들을 한참 들여다보았고, 세탁소 앞에서는 걸려 있는 옷들의 색이 바랜 것을 보며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었는데, 정우진은 그 표정 하나하나가 어떤 감정에서 비롯된 것인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여기, 분식집 하나 있네." 서인이 낡은 간판을 가리키며 걸음을 멈췄다. "들어가볼까?" 분식집 안은 좁았고, 나이 든 주인 할머니가 손을 흔들며 두 사람을 맞았다. "새 얼굴이네, 새 얼굴." 할머니가 서인을 보며 반갑게 웃었다. "우진이 친구여?" "...비슷해요." 정우진이 어색하게 대답했다. "이쁘게 잘 생겼네, 이쁘게." 할머니가 서인의 얼굴을 살피며 연이어 감탄했다. "우진이가 이런 이쁜 친구도 있었나." "할머니, 그런 말씀 마세요." 정우진이 손을 내저으며 얼굴을 붉혔다. 할머니는 그 말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부지런히 손을 움직여 접시를 날랐다. 서인이 그 말에 소리 없이 웃었다. 떡볶이 한 그릇을 나눠 먹으며, 서인은 평소와 달리 조금 더 편안한 표정을 지었는데, 정우진은 그 표정을 보며 낯선 안도감을 느꼈다. 떡볶이 국물이 입가에 살짝 묻은 것도 모른 채 서인이 젓가락을 놀리는 모습이, 정우진의 눈에는 이상하게도 낮의 냉정한 서인보다 훨씬 진짜에 가까워 보였다. "이런 데, 좋다." 서인이 젓가락으로 떡볶이를 집으며 중얼거렸다. "조용하고, 사람들도 순박하고." "서인 씨는 원래 이런 곳이랑은 좀 안 맞을 것 같은데." 정우진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왜 그렇게 생각해?" 서인이 되물었다. "그냥... 짐 챙겨온 것들 보니까, 다 좋은 브랜드였고, 말투도 세련되고..." 서인의 표정이 잠깐 흔들렸다. 떡볶이를 집던 젓가락이 접시 위에서 멈춘 채로, 서인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런 건... 크게 중요한 게 아니야." 서인이 시선을 잠깐 떨어뜨리며 말했다. 정우진은 그 짧은 순간의 표정 변화에서 무언가 감춰진 사정이 있음을 다시 한번 느꼈지만, 이번에도 그는 더 파고들지 않았다. 할머니가 서비스로 순대 한 접시를 더 내주며 두 사람의 대화를 끊었고, 그 덕분에 어색해질 뻔한 공기는 겨우 다시 풀렸다. "많이 먹어, 둘이 이쁘게." 할머니가 웃으며 말했다. *** 분식집을 나와 원룸으로 돌아가는 길, 어스름이 내리기 시작한 골목에서 서인이 갑자기 걸음을 멈췄다. 가로등이 아직 켜지지 않은 시간이라 골목은 푸르스름한 빛과 그림자가 뒤섞여 있었고, 그 사이로 서인의 옆얼굴이 유독 선명하게 도드라졌다. "우진아." 서인이 그를 불렀다. "네?" 정우진이 돌아보았다. 서인의 얼굴에는 낮의 편안함과는 다른, 조금 더 진지한 기색이 서려 있었다. "오늘, 좋았어." 서인이 말했다. "이렇게 그냥 같이 걷고, 먹고, 그런 거." 정우진은 그 말에 순간 뭐라 대답해야 할지 몰라 머뭇거렸다. 바람이 골목을 타고 지나가며 서인의 코트 자락을 살짝 흔들었고, 그 짧은 흔들림 속에서 정우진은 이상하게도 서인이 평소보다 작아 보인다고 생각했다. "...저도요." 그가 짧게 대답했다. 서인이 갑자기 손을 뻗어 정우진의 손을 잡았다. 차가운 골목 공기 속에서, 그녀의 손끝은 예상보다 따뜻했고, 그 온기가 손바닥을 타고 전해지는 순간 정우진의 심장이 이유 없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손가락 사이사이로 스며드는 온기가 낯설면서도 익숙한 듯한 기묘한 감각이었고, 정우진은 자신의 손이 땀으로 젖어가는 것을 느끼면서도 손을 빼낼 생각을 하지 못했다. "이거, 연습이야." 서인이 담담하게 말했다. "밖에서 부부처럼 보이려면, 이런 것도 익숙해져야 하니까." 정우진은 그 말이 순전히 계약을 위한 것인지, 아니면 다른 의미가 섞여 있는 것인지 구분할 수 없었지만, 손을 빼내지도 못한 채 그저 어색하게 걸음을 옮겼다. 두 사람의 발소리가 좁은 골목에 나란히 울렸고, 그 소리마저도 정우진에게는 어떤 신호처럼 들렸다. 원룸에 거의 도착할 무렵, 서인의 휴대폰이 다시 진동했다. 이번에는 문자메시지였다. 진동이 코트 주머니 속에서 울리는 순간, 서인의 걸음이 아주 짧게 삐걱였고, 정우진은 그 미세한 어긋남을 손끝을 통해 그대로 느낄 수 있었다. [모레 오후 3시. 그쪽에서 최종 확인 원함. 준비된 거 맞지?] 화면을 확인한 서인의 발걸음이 순간 멈췄다.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뿌리 깊은 긴장이 그녀의 얼굴에 스치고 지나갔다. 가로등 하나가 그제야 깜박이며 켜졌고, 그 불빛 아래서 서인의 낯빛은 유난히 창백해 보였다. "...무슨 일이에요?" 정우진이 그 표정을 보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서인은 대답 없이 휴대폰을 코트 주머니에 밀어 넣었다. 주머니 속으로 사라지는 휴대폰을 바라보며 정우진은, 그 짧은 문장 하나가 자신이 알지 못하는 어떤 거대한 그림의 일부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뚜렷하게 했다. "아무것도 아니야." 그녀가 애써 웃으며 말했지만, 그 미소는 눈까지 닿지 않았고, 잡은 손에 힘이 살짝 더 들어가는 것을, 정우진은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원룸 현관 앞에 다다를 때까지 서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정우진 역시 더는 묻지 못한 채, 그저 자신의 손을 붙든 그녀의 손끝이 조금씩 식어가는 것을 느끼며 걸음을 옮길 뿐이었다. 모레, 오후 세 시. 그 짧은 문장이 무엇을 뜻하는지 정우진은 알 수 없었지만, 서인의 얼굴에 스친 그 뿌리 깊은 불안만은 분명히 보았고, 그것이 결코 가벼운 일이 아니라는 것만은 확신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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