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 ›"한 달, 딱 12월 말까지." 서인이 손가락으로 벽에 걸린 달력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 이후엔 서로 다시 원래대로 돌아가는 거야. 결혼도 없고, 억지로 뭘 요구하는 것도 없고."
정우진은 벽시계 아래 걸린 달력을 흘겨보았다.
12월 첫째 주였고, 저 날짜까지 계산하면 대략 스물다섯 날 정도가 남은 셈이었는데, 그 숫자를 세어보는 자신의 모습이 이미 이 제안을 받아들이는 쪽으로 기울고 있다는 뜻인 것 같아 정우진은 스스로에게 조금 놀랐다.
'스물다섯 날. 그 정도면 참을 수 있을까.'
머릿속으로 날짜를 셈하는 자신이 어이없어서, 정우진은 애꿏은 손톱을 매만지며 서인의 얼굴을 다시 살폈다. 서인의 표정은 조금의 흔들림도 없이 단정했고, 그 흔들리지 않는 태도가 오히려 정우진의 마음을 더 어지럽게 만들었다.
"진짜, 그냥 동거만 하면 되는 거예요?" 정우진이 재차 확인했다. "다른 조건 같은 건 없고요?"
"몇 가지는 있어." 서인이 손가락을 하나씩 접으며 조건을 나열하기 시작했다. "매일 저녁은 같이 먹고, 주말에는 최소 한 번 외출하고, 그리고 밖에서는 실제 부부처럼 행동하기."
"밖에서요? 어디서요?" 정우진의 목소리에 다시 경계심이 섞였다.
"동네에서." 서인이 짧게 대답했다. "내가 여기서 지내는 동안 필요한 데는 좀 있어."
"필요한 데라는 게, 정확히 어떤...?"
"차차 알게 될 거야." 서인이 말을 자르듯 짧게 끝맺었다. 더 캐물어봤자 소용없다는 걸 그 어조에서 이미 느낄 수 있었다.
정우진은 그 말의 의미를 정확히 이해하지 못했지만, 지금 상황에서 세세한 부분까지 파고들 여력이 없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기에, 결국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정우진이 낮게 대답했다. "한 달만이에요. 그 이후에는 완전히 정리하는 거고요."
"약속." 서인이 손을 내밀며 짧게 말했다.
정우진은 그 손을 한동안 바라보다가, 결국 마주 잡았다.
손끝이 맞닿는 순간, 예상보다 따뜻한 온기가 손바닥을 타고 전해져와, 정우진은 순간 당황했는데, 그 온기가 지금까지 이 여자에게 느낀 위압감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감각이라는 사실이 그를 더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차가운 사람일 줄 알았는데.'
손을 놓은 뒤에도 그 온기의 잔상이 손바닥에 남아 있어서, 정우진은 저도 모르게 손을 슬쩍 움켜쥐었다가 다시 폈다.
***
다음 날 오후 세 시.
서인은 정말로 이삿짐을 들고 나타났다.
캐리어 두 개와 커다란 박스 하나를 끌고 원룸 앞에 선 그녀의 모습에, 정우진은 이 모든 게 정말로 현실이 되었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절감할 수밖에 없었다.
좁은 복도에 캐리어를 세워두고 문 앞에 선 서인의 모습은 이 낡은 원룸 건물과는 어울리지 않게 지나치게 정갈했는데, 그 이질감이 정우진의 눈에 자꾸 밟혔다.
"이 방, 좀 좁긴 하다." 서인이 캐리어를 세우며 방을 훑어보았다. "그래도 뭐, 한 달만 지내는 거니까."
"저기, 짐이... 좀 많은 것 같은데요." 정우진이 캐리어 두 개와 박스를 번갈아 보며 물었다.
"필요한 것들만 챙겨온 거야." 서인이 대수롭지 않게 대답하며 캐리어 지퍼를 열었다.
안에는 옷가지뿐만 아니라, 작은 전기포트와 원두커피 봉지, 그리고 정체를 알 수 없는 화장품들이 가득 들어차 있었는데, 그 물건들의 브랜드 하나하나가 정우진이 평소 마주하기 힘든 가격대라는 사실을 그는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박스 안에서는 얇은 담요와 향초, 그리고 손바닥만 한 액자까지 나왔는데, 그 액자 속에 누구의 사진이 들어 있는지는 서인이 빠르게 상자 안쪽으로 밀어 넣어버려서 확인할 수 없었다.
'재택근무라고만 들었는데.'
정우진은 서인의 짐을 보며 문득 그녀의 실체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1년 넘게 대화를 나눴지만, 정확히 무슨 일을 하는지, 어디에 사는지, 가족은 어떤지, 그런 구체적인 것들은 한 번도 물어본 적이 없었고, 서인 역시 스스로 말한 적이 없었다.
돌이켜보면 이상한 일이었다. 매일 밤 두 시간 가까이 통화를 하면서도 정작 서로의 일상에 대해서는 거의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는 게, 지금 이 순간에야 뒤늦게 이상하게 느껴졌다.
"저... 원래 무슨 일 하세요?" 정우진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컨설팅." 서인이 짧게 대답하고는 곧바로 캐리어에서 옷을 꺼내 옷장에 걸기 시작했다.
"어떤 컨설팅이요?"
"이것저것." 서인이 대답을 피하듯 말을 흐렸다.
"그럼... 회사는 어디...?"
"우진 씨." 서인이 옷을 걸던 손을 멈추고 정우진을 돌아보았다. 눈매가 살짝 가라앉아 있었다. "지금은 그냥, 궁금한 걸 다 묻지 않는 게 서로한테 편할 것 같은데."
그 말이 부드럽게 들렸지만 실은 명백한 선이었다는 걸, 정우진은 뒤늦게 알아차렸다.
정우진은 더 묻고 싶었지만, 지금 이 상황에서 캐물어봤자 순순히 대답이 나올 것 같지 않다는 걸 직감하고 입을 다물었다.
좁은 원룸에 짐을 정리하는 서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정우진은 이 낯선 동거 생활이 앞으로 어떻게 흘러갈지 짐작조차 되지 않아 마음이 무거워졌다.
옷장 절반을 서인의 옷가지가 차지하는 걸 보면서도, 정우진은 그게 이상하게 낯설지 않다는 사실이 더 낯설게 느껴졌다.
***
같은 날 밤 아홉 시.
짐 정리가 끝나고, 두 사람은 좁은 상 위에 배달 음식을 펼쳐놓고 마주 앉았다.
서인이 짐 속에서 꺼낸 와인 잔 두 개에 콜라를 따르는 모습이 우습기도 했지만, 정우진은 그 낯선 광경을 애써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려 노력했다.
"이런 걸 왜 챙겨오신 거예요?" 정우진이 유리잔을 들어 올리며 물었다.
"습관이야." 서인이 짧게 답했다. "아무리 밖에서 먹어도 잔은 제대로 된 걸로 마셔야 해서."
그 말투에서 지금까지 살아온 방식이 어렴풋이 비쳐 보여서, 정우진은 순간 두 사람 사이에 놓인 간극이 다시금 선명해지는 걸 느꼈다.
"오늘 하루, 실감 나지?" 서인이 잔을 살짝 들어 보이며 물었다.
"...솔직히 아직도 믿기지가 않아요." 정우진이 젓가락을 만지며 대답했다. "어제까지만 해도 목소리로만 알던 사람인데, 지금 제 방에 앉아서 밥을 먹고 있으니까요."
"나도 그래." 서인이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 웃음이 헤드셋 너머로 익숙하게 들었던 그 웃음과 닮아 있어서, 정우진은 잠시 마음이 놓였다.
'목소리는 진짜였구나.'
적어도 그 웃음소리만큼은 통화 속의 서인과 눈앞의 서인이 같은 사람이라는 확신을 주었고, 정우진은 그 사실 하나에 의지해 이 낯선 저녁을 견뎌내고 있었다.
하지만 그 안도감은 오래가지 못했다.
식사가 끝나갈 무렵, 서인의 휴대폰이 울렸고, 화면을 확인한 그녀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액정 위에 뜬 이름은 정우진이 볼 수 없는 각도로 재빠르게 돌려졌지만, 서인의 손끝이 순간적으로 하얗게 힘이 들어가는 걸 그는 놓치지 않았다.
"...잠깐만." 서인이 자리에서 일어나 방 한쪽 구석으로 걸어갔다.
낮게 통화를 이어가는 그녀의 목소리가 점점 날카로워지는 것을, 정우진은 못 들은 척하려 애썼지만 좁은 원룸에서 그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니까 내가 알아서 한다고 몇 번을 말해." 서인의 목소리가 갑자기 크게 튀어 올랐다.
정우진이 놀라 젓가락을 떨어뜨렸다.
헤드셋 너머로는 단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격한 어조였고, 그 낙차가 너무 커서 정우진은 자신이 알던 서인이 정말로 이 사람인지 다시 한번 의심스러워졌다.
등을 돌린 채 통화하는 서인의 어깨선이 팽팽하게 굳어 있었고, 손에 쥔 휴대폰을 부서질 듯 움켜쥔 손끝의 힘줄이 방 안 불빛 아래 도드라져 보였다.
"...알았다고. 알았으니까 끊어." 서인이 마지막으로 짓눌린 목소리로 내뱉고는 전화를 끊었다.
통화를 끝낸 서인이 돌아섰을 때, 그녀의 얼굴에는 아까와는 전혀 다른 표정이 남아 있었다.
정우진은 그 표정을 뭐라고 정의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분노도, 슬픔도 아닌, 그 사이 어딘가에 걸려 있는 얼굴이었고, 그 얼굴을 마주한 순간 정우진은 이 동거가 자신이 짐작했던 것보다 훨씬 복잡한 사정 위에 세워진 것임을 어렴풋이 직감했다.
"...괜찮으세요?" 정우진이 조심스럽게 물었지만, 서인은 대답 없이 다시 상 앞에 앉아 젓가락을 집어 들었다.
그 침묵이 어떤 말보다도 무겁게 방 안에 내려앉아서, 정우진은 그날 밤 더 이상 아무것도 묻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