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 ›"괜찮아요?" 정우진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서인은 아무 말 없이 자리에 앉았다.
방금 전까지 날카롭게 치솟았던 목소리는 어느새 사라지고, 다시 그 차분한 낯빛으로 돌아온 그녀의 얼굴을 보며, 정우진은 이 짧은 시간 안에 벌어진 감정의 낙차가 여전히 낯설고 어색하게 느껴졌다.
식탁 위에 놓인 두 사람의 저녁은 이미 반쯤 식어 있었고, 서인은 그런 것쯤은 상관없다는 듯 젓가락을 다시 집어 들고는 밥알을 뒤적였다.
"응, 괜찮아." 서인이 짧게 대답하며 다시 젓가락을 집어 들었다.
"...누구랑 통화하신 거예요?" 정우진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일 관련이야." 서인이 짧게 대답을 끝내며 대화를 차단했다.
정우진은 더 묻지 않았다.
분명 무언가를 감추고 있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지만, 지금 이 상황에서 캐묻는 것이 오히려 관계를 더 어색하게 만들 것 같아서였다.
젓가락이 그릇에 부딪히는 소리만이 좁은 원룸 안을 채우는 동안, 정우진은 몇 번이고 곁눈질로 서인의 표정을 살폈지만, 그녀의 얼굴은 이미 방금 전의 흔들림을 완벽하게 지운 뒤였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태연하게 밥을 씹어 삼키는 모습이, 정우진의 눈에는 오히려 더 부자연스럽게 보였다.
밤이 깊어지고, 두 사람은 각자의 잠자리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좁은 원룸에는 침대 하나뿐이었고, 그 사실을 뒤늦게 깨달은 정우진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제가 바닥에서 잘게요." 정우진이 서둘러 이불을 꺼내며 말했다.
"아니야, 내가 바닥에서 잘게." 서인이 오히려 그 이불을 빼앗듯 가져갔다.
"그건 안 되죠, 손님인데..."
"내가 여기 부탁해서 들어온 거잖아." 서인이 단호하게 잘랐다. "불편한 건 내가 감수해야지."
"그래도 여긴 제 방이고, 언니는..." 정우진이 말을 흐리다가, 순간 자신이 무심코 뱉은 호칭에 스스로 놀라 입을 다물었다.
서인은 그 말을 못 들은 척했는지, 아니면 정말 못 들었는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이불을 바닥에 넓게 펼치고 있었다.
결국 두 사람은 잠시 실랑이를 벌인 끝에, 정우진이 침대에서, 서인이 바닥에 깐 이불에서 자기로 합의를 봤다.
불을 끄고 각자 자리에 누운 뒤, 어둠 속에서 정우진은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았다.
좁은 방 안에 낯선 사람의 숨소리가 함께 존재한다는 사실이, 지금까지 혼자만의 공간이었던 이곳을 완전히 다른 곳으로 바꿔놓은 것 같았고, 그 변화가 낯설면서도 이상하게 마음 한구석을 간지럽혔다.
천장을 향해 눈을 뜬 채로, 정우진은 창문 틈으로 새어 드는 가로등 불빛이 벽지 위에 그려내는 옅은 무늬를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바닥에서 들려오는 서인의 숨소리는 규칙적이었지만, 그 규칙 사이에 아주 미세하게 끼어드는 뒤척임이, 그녀 역시 쉽게 잠들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짐작하게 했다.
"우진아." 어둠 속에서 서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 정우진이 몸을 살짝 뒤척이며 대답했다.
"미안해." 서인이 조용히 말했다. "갑자기 이렇게 들이닥쳐서."
정우진은 잠시 대답을 고르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아직도 이해가 잘 안 가지만, 뭔가 이유가 있으신 거겠죠."
"응." 서인이 짧게 대답했다. "이유는 있어. 근데 아직은 말 못 해."
"언젠가는 말씀해주실 거예요?"
"한 달 안에는." 서인의 목소리가 살짝 흔들렸다. "약속해. 어제 말한 건 우선 한 달 동안 부부처럼 지내자는 구두 합의였고, 내일 등록금 지원을 포함한 세부 조건을 계약서로 정리하자."
정우진은 그 대답에 더 묻지 않기로 했다.
어둠 속에서 두 사람 사이에는 잠시 침묵이 내려앉았고, 그 침묵이 무겁기보다는 오히려 어딘가 안온한 느낌을 준다는 사실이 정우진에게는 조금 이상하게 느껴졌다. 낯선 사람과 나란히 어둠을 나눈다는 것이 이렇게 편안할 수 있다는 걸, 지금까지 살아오며 한 번도 겪어본 적이 없었으니까.
서인의 숨소리가 점점 잦아드는 걸 들으며, 정우진은 오늘 하루 벌어진 모든 일들이 여전히 비현실적으로 느껴졌지만, 동시에 헤드셋 너머에서는 늘 딱딱하고 이모티콘 하나 쓰지 않던 서인이, 사적인 문자에서만 장난스럽게 '남편'이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이라는 사실이 여전히 낯설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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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아침 일곱 시.
정우진은 알람 소리에 눈을 떴다가, 눈앞에 낯선 풍경이 펼쳐져 있는 걸 보고 잠시 얼떨떨해졌다.
좁은 부엌에서 서인이 앞치마도 없이 프라이팬을 흔들고 있었는데, 계란이 반쯤 타버린 상태로 뒤집히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부스스한 머리로 침대에서 몸을 일으킨 정우진은, 어젯밤까지만 해도 완벽하게 정돈되어 있던 서인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그 뒷모습을 바라보며 눈을 몇 번이나 깜빡였다. 헐렁한 티셔츠에 목이 늘어난 것을 아무렇지 않게 걸치고, 맨발로 차가운 바닥을 딛고 선 채 프라이팬과 씨름하는 그 모습이, 어제 낮에 마주쳤던 서늘한 얼굴의 그녀와는 도무지 같은 사람이라고 믿기 어려웠다.
"...뭐 하세요?" 정우진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계란볶음밥." 서인이 자신 있게 대답했지만, 프라이팬 안의 상태는 그 이름과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밥알은 절반쯤 타버렸고, 계란은 곳곳이 새까맣게 눌어 있었으며, 그 처참한 결과물을 보며 정우진은 순간 웃음이 터질 뻔했다.
프라이팬 가장자리로 흘러넘친 기름이 인덕션 위에서 지글거리며 탄내를 풍기고 있었고, 서인은 그 냄새를 인지하지 못한 채 계속해서 뒤집개를 휘두르고 있었다. 그 진지한 표정과 처참한 결과물 사이의 간극이 너무 커서, 정우진은 하마터면 소리 내어 웃을 뻔했다.
"요리, 잘 안 하시는구나..." 정우진이 조심스럽게 중얼거렸다.
"평소엔 시켜 먹어서." 서인이 조금 뾰로통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그 표정이 이상하게도 지금까지 봐온 우아한 서인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훨씬 아이 같은 얼굴이어서, 정우진은 자신도 모르게 헛웃음을 흘렸다.
"제가 해볼게요." 정우진이 프라이팬을 넘겨받으며 말했다.
서인은 순순히 자리를 비켜주었고, 정우진이 새로 계란을 풀고 밥을 볶는 동안, 그녀는 식탁에 턱을 괴고 앉아 그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았다.
정우진의 손끝이 익숙하게 팬을 흔들 때마다 고소한 냄새가 좁은 부엌을 채웠고, 서인은 그 냄새를 맡으며 자신도 모르게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누군가가 자신을 위해 아침을 차려주는 이 풍경이 얼마나 오래전에 사라졌던 것인지, 그녀는 문득 헤아려보다가 그만두었다.
"의외로 잘하네." 서인이 감탄한 듯 말했다.
"혼자 산 지 오래돼서요." 정우진이 대답했다.
완성된 계란볶음밥을 두 개의 그릇에 나눠 담아 식탁에 올려놓으며, 정우진은 아까 서인이 만들었던 것과 자신이 만든 것을 나란히 비교해보다가 다시 한 번 웃음을 참았다. 서인은 그 시선을 눈치챘는지 괜히 눈을 흘기며 숟가락을 들었다.
식탁에 마주 앉아 아침을 먹는 동안, 두 사람 사이에는 어제보다 조금 더 편안한 공기가 흐르기 시작했고, 정우진은 이 낯선 동거 생활이 생각보다 견딜 만할지도 모른다는 옅은 기대를 품었다.
창문으로 들어오는 아침 햇살이 식탁 위에 옅게 내려앉았고, 서인은 그 빛을 받으며 밥을 먹는 정우진의 옆얼굴을 잠시 바라보았다. 어제 오후, 처음 이 집에 발을 들였을 때만 해도 이런 순간이 오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었는데, 지금 이렇게 마주 앉아 있는 것이 이상하게도 어색하지 않다는 사실이 그녀에게는 오히려 낯설게 느껴졌다.
하지만 그 평온은 오래가지 않았다.
서인의 휴대폰이 다시 울린 건, 식사가 거의 끝나갈 무렵이었다.
액정 위에 뜬 발신자 표시를 확인하기도 전에, 서인의 어깨가 미세하게 굳는 것을 정우진은 놓치지 않았다. 방금까지 젓가락을 쥐고 있던 손이 잠시 허공에서 멈췄다가, 이내 휴대폰 쪽으로 천천히 움직였다.
화면을 확인한 서인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을, 정우진은 놓치지 않았다.
"...받아야 할 것 같아." 서인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낮게 중얼거렸다.
방금까지 밝았던 그녀의 얼굴에서, 어제 밤에 보았던 그 서늘한 표정이 다시 스치고 지나갔다.
베란다 쪽으로 몸을 돌리며 전화를 받는 서인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정우진은, 유리창에 옅게 비친 그녀의 표정이 순식간에 완전히 다른 사람의 것으로 바뀌는 것을 보았다. 낮게 깔리는 목소리로 몇 마디를 주고받는가 싶더니, 서인의 등이 눈에 띄게 경직되었고, 통화가 끝나기도 전에 정우진은 이미 알 수 있었다. 어제와 같은, 어쩌면 그보다 더 무거운 무언가가 다시 그녀를 찾아왔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