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 ›봉투 안에는 이번엔 사진도 동영상도 아니었다. 손글씨로 적힌 편지 한 장이었다.
〈어제 저녁 7시쯤, 3반 앞 복도에서 목격한 사람이 있어. 걱정 마, 그 사람한텐 아무 말 안 했어.〉
나는 그 문장을 읽고서야 어제 저녁 무슨 일이 있었는지 떠올렸다. 학원 가기 전, 잠깐 교실에 다시 들러 프린트물을 챙겼던 일이었다. 그때 복도에 누군가 있었던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신경 쓰지 않고 지나쳤다. 사람이 지나가는 복도에서 사람을 마주치는 게 뭐 그리 특별한 일인가 싶었다.
그런데 하은은 그 짧은 순간까지 알고 있었다.
시간까지 정확히. 장소까지 정확히. 심지어 그 순간을 본 목격자의 존재까지 파악하고 있었다. 다시 말해, 하은은 CCTV 사각지대를 알고, 시간을 정확히 기록하고, 목격자의 동선까지 계산하고 있었다는 뜻이었다. 치밀함이라는 단어가 이렇게 무섭게 느껴진 적은 없었다. 마치 내 하루 전체가 누군가의 손바닥 위에 올라가 있는 느낌이었다.
나는 편지를 손에 쥔 채 잠깐 서 있었다. 복도 창문으로 들어오는 아침 햇살이 종이 위에 얇게 걸쳐졌다. 그러다 문득 궁금해졌다. 목격자가 누구였을까. 남자였을까, 여자였을까. 같은 반이었을까, 다른 반이었을까. 머릿속에서 몇몇 얼굴이 스쳐 지나갔지만 어느 것도 확신이 서지 않았다.
그 답은 예상보다 빨리 나타났다.
"도현아, 어제 학교에 다시 왔었어?"
점심시간, 소희가 급식판을 들고 다가와 물었다. 나는 순간 멈칫했다. 젓가락을 쥔 손이 살짝 굳었다.
"어, 프린트물 가지러."
"그때 어떤 여자애랑 얘기하는 거 본 것 같은데. 보건위원 조끼 입은 애 아니었어?"
내 심장이 살짝 내려앉았다. 목격자는 다른 사람도 아니고 소희였다. 하필이면, 이라는 말이 머릿속에서 저절로 떠올랐다.
"그냥… 채뇨 관련해서 물어볼 거 있다고 해서."
나는 최대한 자연스럽게 대답했다. 완전한 거짓말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진실도 아니었다. 이런 애매한 대답이 제일 무섭다는 걸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소희는 잠깐 나를 빤히 쳐다봤다. 그 시선에 이상하게 날이 서 있었다. 평소의 장난스러운 눈빛이 아니었다.
"채뇨 얘기 하는데 왜 그렇게 표정이 안 좋았는데?"
"안 좋았어?"
"엄청. 뭔가 심각한 얘기 하는 것처럼 보였어."
나는 순간 뭐라고 대답할지 고민했다. 진실을 말할 수도 없고, 완전히 감출 수도 없었다. 이 딜레마는 벌써 며칠째 반복되고 있었다.
"채뇨가 없어졌다고 그래서, 그거 얘기했어."
"뭐? 없어졌다고?"
소희의 눈이 커졌다. 나는 아차 싶었다. 이 부분까지는 말할 생각이 없었는데, 얼떨결에 나온 말이었다. 입이 뇌보다 먼저 움직이는 순간이 있다더니, 이게 그거였다.
"어. 그냥 학교 실수로 그런 것 같아. 별일 아니야."
"별일 아닌 게 아닌 것 같은데. 그 여자애가 왜 너한테 그걸 직접 얘기해? 원래 그런 건 선생님이 하지 않아?"
소희의 질문은 정확했다. 정확했기 때문에 더 곤란했다. 소희는 원래 이런 쪽으로 감이 좋은 애였다. 학기 초 반장 선거 때도 누가 몰래 표를 조작했는지 반나절 만에 알아낸 전적이 있었다.
"보건위원이니까 담당인가봐."
나는 그렇게 대충 얼버무렸다. 소희는 뭔가 더 캐물으려는 듯 입을 열었다가, 결국 다물었다. 대신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 급식판 위의 국물이 살짝 흔들렸다.
"그 여자애… 이름이 뭐야?"
"정하은."
"5반이지?"
"어떻게 알아?"
"내가 그 반에 아는 애가 있어서."
소희는 그렇게 말하며 젓가락으로 반찬을 뒤적였다. 콩나물 몇 개를 집었다가 다시 내려놓았다. 딱히 먹을 생각은 없어 보였다. 표정에서 뭔가 계산하는 기색이 스쳤다. 나는 그 표정을 눈치챘지만, 굳이 캐묻지 않았다. 이해하지 않는 것이 원칙이었으니까. 이해하려고 들면 나까지 그 계산 속으로 끌려 들어갈 것 같았다.
"그냥 조심해."
소희가 마지막으로 그렇게 덧붙였다. 무엇을 조심하라는 건지, 소희 자신도 정확히 정리하지 못한 말투였다.
그날 오후, 나는 다시 하은을 마주쳤다. 이번엔 하은이 먼저 찾아온 게 아니라, 우연히 복도에서 스쳤다. 5교시가 끝나고 이동수업을 가는 길이었다.
"도현 학생."
하은이 낮게 불렀다. 나는 멈춰 서지 않고 걸으려 했지만, 하은이 옆으로 따라붙었다. 걸음 속도까지 나와 정확히 맞춘 것 같았다.
"어제 그 편지 봤어?"
"봤어."
"목격자한테는 얘기 안 했다니까 걱정 안 해도 돼."
"목격자가 얘기했어. 나한테 직접."
하은의 걸음이 살짝 흔들렸다. 처음으로 예상 밖의 정보를 받은 반응이었다. 그 짧은 순간의 흔들림이, 나에겐 오히려 반가웠다. 완벽하지 않다는 증거였으니까.
"뭐라고 얘기했는데?"
"채뇨 관련해서 얘기했다고, 대충 넘겼어."
"그럼 괜찮은 거네."
하은은 다시 안심한 얼굴로 돌아왔다. 그 표정 변화가 내 눈에는 이상할 정도로 빠르게 느껴졌다. 마치 스위치를 켜고 끄는 것 같았다. 불안에서 안심으로, 다시 원래의 무표정으로.
"근데 그 목격자, 여자애지?"
하은이 갑자기 물었다. 나는 잠깐 대답을 망설였다.
"응."
"이름이 뭔데?"
"왜 궁금해?"
"그냥. 알아두면 좋을 것 같아서."
나는 그 질문에서 처음으로 다른 종류의 불안을 느꼈다. 이건 단순한 궁금증이 아니었다. 뭔가를 확인하고, 분류하고, 앞으로 어떻게 다룰지 정하려는 의도가 담긴 질문이었다. 마치 하은의 머릿속에 어떤 명단이 있고, 그 명단에 이름 하나를 추가하려는 것 같았다.
"말 안 해도 돼."
나는 그렇게 대화를 끝내려 했다. 하은은 그 대답에도 크게 실망하지 않았다. 오히려 입꼬리가 살짝 올라간 것 같기도 했다.
"괜찮아. 나 나중에 알아낼 수 있어."
그 말이 유난히 내 귓가에 오래 남았다. 나중에 알아낼 수 있다는 그 자신감이, 어떤 확신에서 나오는 것인지 나는 알고 싶지 않았다. 알아버리면 되돌릴 수 없을 것 같았다.
하은은 그 말을 남기고 먼저 걸음을 옮겼다. 뒷모습이 평소와 다름없이 단정했다. 조끼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걷는 그 모습이, 오늘따라 유독 낯설게 보였다.
그날 저녁, 나는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소희와 다시 마주쳤다. 아파트 단지 입구, 늘 마주치는 그 자리였다. 가로등 불빛 아래 소희가 편의점 봉투를 들고 서 있었다.
"오늘 무슨 일 있었어? 표정이 계속 안 좋아."
"그냥 좀 복잡한 일이 있어서."
"그 보건위원 애 때문에?"
소희의 질문에 나는 순간 대답을 하지 못했다. 소희는 그 침묵을 답으로 받아들인 듯, 살짝 웃으며 말을 이었다.
"됐어, 말 안 해도 돼. 근데 하나만 말해줄게."
"뭔데."
"나 서른 살까지 도현이 혼자면, 내가 데려갈 거야."
갑작스러운 말이었다. 나는 그 말의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채 소희를 바라보았다. 소희는 그 표정을 보고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장난이야, 장난! 왜 그렇게 심각한 표정을 해."
소희는 그렇게 말하고는 손을 흔들며 자기 집 쪽으로 뛰어갔다. 편의점 봉투가 흔들릴 때마다 봉투 안의 캔이 서로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나는 그 뒷모습을 잠깐 바라보다가, 자기 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걸으면서 생각했다. 소희의 그 말은 정말 장난이었을까. 아니면 장난처럼 던져놓고 진심을 슬쩍 숨긴 말이었을까. 판단이 서지 않았다. 요즘 내 주변에는 판단이 서지 않는 말들이 너무 많았다.
그날 밤, 나는 다시 휴대폰을 확인했다. 하은에게서는 아무 메시지도 오지 않았다. 그 침묵이 오히려 더 불안하게 느껴졌다. 평소라면 하루에 한 번쯤은 무언가를 보내던 애였다. 편지든, 사진이든, 짧은 문장 하나든.
침묵도 하은의 방식 중 하나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말이 없을 때가 더 무섭다는 걸, 나는 이제야 조금씩 배우고 있었다.
다음 날 아침, 나는 사물함에서 또 다른 것을 발견했다. 이번엔 편지도, 사진도 아니었다.
작은 유리병이었다. 손가락 두 개 정도 크기의, 병원에서 흔히 쓰는 종류의 병이었다. 그 안에는 투명한 액체가 조금 담겨 있었고, 라벨에는 낯익은 필체로 짧은 글이 적혀 있었다.
〈걱정 마, 검사는 이미 끝냈어. 결과도 좋았어.〉
나는 그 병을 손에 든 채 한참을 서 있었다. 검사라니. 무슨 검사를 말하는 건지, 언제 끝났다는 건지, 결과가 좋았다는 게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 건지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알 수 있는 건 단 하나였다.
하은은 이미 다음 단계로 넘어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