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 ›그날 이후로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다혜에게 뭘 봤는지 묻지 않았다. 물어보면 뭔가가 깨질 것 같았다. 지금까지 쌓아온 2년이, 한 번의 질문으로 와르르 무너질 것 같았다.
대신 나는 관찰하기 시작했다.
관찰이라는 말은 우습다. 사실은 감시였다. 다혜의 표정 하나, 손짓 하나를 놓치지 않으려고 눈에 힘을 줬다. 그러면서도 눈치채이지 않으려고 애썼다. 이중으로 피곤한 일이었다.
다혜는 예전처럼 웃었다. 예전처럼 내 팔에 매달렸다. 그런데 미묘하게 달랐다. 눈이 마주치는 순간이 짧아졌다. 예전엔 서로 눈을 맞추면 몇 초쯤 그대로 머물렀는데, 이제는 마주치자마자 시선이 옆으로 미끄러졌다. 문자 답장이 느려졌다. 30분이면 오던 답장이 두 시간, 세 시간씩 걸렸다. 주말 약속이 자주 취소됐다.
"이번 주말엔 좀 바빠서."
다혜가 그렇게 말할 때마다 나는 알겠다고 했다. 화내지 않았다. 화를 낼 근거가 없었다. 내가 본 건 그저 뒷모습뿐이었으니까. 골목 끝으로 사라지던, 나비 머리핀이 흔들리던 그 뒷모습.
하지만 마음은 계속 갈라졌다. 밤에 누워 있으면 천장이 이상하게 낮아 보였다. 숨을 크게 들이쉬어야 겨우 잠이 왔다.
학교에서도 이상한 시선을 느꼈다. 복도를 지나가면 여자애들이 수군거렸다. 처음엔 내 외모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워낙 어릴 때부터 그런 시선에는 익숙했다. 175센티미터에 얼굴이 예쁘다는 소리를 듣고, 머리를 길게 기르고 다니면 늘 그런 시선이 따라붙었다. 초등학교 때부터 그랬다. 중학교 때는 아예 익숙해져서 신경도 안 썼다.
그런데 이번엔 좀 달랐다. 눈이 나를 스치고 지나가는 게 아니라, 나에게 머물렀다가 뭔가를 확인하듯 다시 한 번 훑고 지나갔다. 시선 끝에 다혜의 이름이 걸려 있는 것 같았다.
1학년 B반, 윤미주라는 여자애가 어느 날 내게 먼저 말을 걸었다.
급식실 앞이었다. 줄을 서 있는데 누가 옆으로 슬쩍 붙었다.
"이서윤 맞지? 이름이 여자 이름 같아서 신기했어."
웃으며 다가온 그 애는 눈이 동그랬다. 나쁜 의도는 없어 보였다. 그냥 순수한 호기심 같았다.
"어. 맞아."
"근데 있잖아, 요즘 소문이—"
말을 이어가려던 참에, 지나가던 다혜와 눈이 마주쳤다. 순간이었다. 그런데도 윤미주의 표정이 확 굳었다. 마치 뭔가 하지 말아야 할 말을 하려다 들킨 사람처럼.
"아니다. 별거 아니야."
윤미주는 그렇게 말하고 슬쩍 시선을 피하고는 자리로 돌아갔다. 나는 그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봤다. 별거 아니라니. 그 말이 오히려 더 마음에 걸렸다. 별거 아닌 일이었으면 애초에 말을 걸지도 않았을 텐데.
다혜의 존재감은 여전했다. 그 유명세 앞에서는 누구도 함부로 다가오지 못했다. 학교에서 다혜를 모르는 애는 없었다. 예쁘고, 성적도 좋고, 누구에게나 상냥했다. 그런 다혜가 내 여자친구라는 사실이 한때는 자랑스러웠는데, 요즘은 그 유명세가 오히려 벽처럼 느껴졌다.
집에 가는 길, 언니 서영이 먼저 말을 걸었다.
서영은 은강고 3학년이었다. 명문 사립에 다니는, 키 170센티미터의 언니는 늘 나보다 어른스러운 눈으로 나를 봤다. 대문 앞 골목에서 우연히 마주쳤는데, 서영이 걸음을 멈추고 나를 빤히 쳐다봤다.
"너 요즘 얼굴이 왜 그래."
"뭐가."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 가방끈을 고쳐 잡았다.
"표정이 죽었어. 다혜랑 무슨 일 있어?"
심장이 한 번 덜컹했다. 얼굴에 티가 났나. 나는 최대한 무표정하게 대답했다.
"아무 일 없어."
서영은 더 캐묻지 않았다. 대신 잠깐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짧게 숨을 내쉬었다. 뭔가 다 알고 있다는 얼굴이었다. 다만 헤어지기 전에 이렇게 말했다.
"뭔가 이상하면, 확인해. 참는 게 답은 아니야."
"왜 그런 말을 해?"
"그냥. 언니 눈엔 다 보여서."
그 말이 며칠 동안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확인해, 참는 게 답이 아니야. 맞는 말이라는 걸 알면서도 확인이라는 단어 앞에서 자꾸 멈췄다.
확인해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나는 계속 미뤘다. 오늘은 아니야, 오늘은 다혜가 좀 힘들어 보였으니까. 내일은 아니야, 내일은 시험이 있으니까. 그렇게 하루하루 미루는 사이에 마음속에서는 이상한 것들이 자라났다.
태권도 도장에서 관장님인 할아버지 앞에서 품새를 하다가도 정신이 딴 데 가 있었다. 발차기 각도가 흐트러졌다. 다리를 뻗는 순간 무릎이 아래로 처졌다.
"정신 어디 갔어."
할아버지가 낮게 혼을 냈다. 목소리는 크지 않았지만 도장 전체를 울릴 만큼 무게가 있었다. 나는 죄송하다고 했다. 다시 자세를 잡고 발차기를 했다. 하지만 정신은 여전히 그 골목의 나비 머리핀 위에 있었다. 흔들리던 그 작은 핀이, 이상하게 눈앞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한 번 더."
할아버지의 말에 나는 다시 다리를 들었다. 이번엔 각도가 맞았다. 그런데도 마음은 조금도 편해지지 않았다.
그렇게 며칠이 흘렀다.
날이 갈수록 다혜와 나 사이의 거리는 조금씩 벌어졌다. 통화를 하다가도 다혜가 먼저 끊는 일이 늘었다. 예전에는 서로 끊기 아쉬워서 몇 번씩 다시 걸었는데, 이제는 다혜 쪽에서 "졸려서 먼저 잘게" 하고 짧게 끝냈다.
어느 날 아침, 등굣길에 다혜가 갑자기 손을 놓았다. 별거 아닌 척, 신발끈을 고쳐 맨다는 이유였다. 나는 앞서 몇 걸음 가다가 뒤돌아서 기다렸다. 다혜가 쭈그려 앉아 끈을 묶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봤다. 손끝이 조금 떨리는 것 같았다. 착각인가 싶었다.
다혜가 일어섰다. 나는 자연스럽게 다시 손을 뻗었다. 늘 그랬던 것처럼.
하지만 그 손을 다시 잡으려는 순간, 다혜는 살짝 몸을 비틀어 피했다. 마치 실수인 것처럼, 가방을 다시 고쳐 메느라 그런 것처럼. 그런데 그 동작이 너무 자연스러워서 오히려 더 부자연스러웠다.
그 순간, 뭔가 명확해졌다.
확실히, 뭔가가 변했다.
손 하나 잡는 일이 이렇게 어색해질 수 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2년 동안 매일같이 잡던 손이었다. 손바닥의 온도, 손가락 사이의 틈, 그런 것들을 다 외우고 있었는데.
나는 그날 처음으로 다혜에게 묻고 싶다는 생각을 진지하게 했다. 그 골목에서 봤던 뒷모습, 나비 머리핀, 그리고 지금 이 손. 다 연결되어 있는 것 같았다. 입 안에서 말이 맴돌았다. 너 요즘 왜 이래, 나 뭐 잘못했어, 그날 그 골목에서 누구 만난 거야. 그 중 어떤 말도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하지만 입을 열기도 전에, 다혜가 먼저 말을 돌렸다.
"오빠, 나 먼저 갈게. 담임이 일찍 오라고 해서."
목소리가 평소보다 조금 빨랐다. 눈은 나를 보지 않고 이미 앞을 향해 있었다.
그렇게 다혜는 앞서 뛰어갔다. 교복 치마가 바람에 살짝 날렸다. 나는 손을 든 채로, 잡지 못한 그 손을 어색하게 내리며 그 뒷모습을 오래 바라봤다.
멀어지는 다혜의 뒷모습이, 그날 골목에서 봤던 그 뒷모습과 겹쳐 보였다. 이상하게도 두 장면이 자꾸 하나로 뭉개졌다.
그리고 그날, 교실 뒷문에서 나를 부르는 익숙한 목소리를 들었다.
"서윤아. 잠깐 나와 봐."
박준혁이었다.
평소라면 그냥 장난치자는 소리겠거니 했을 텐데, 오늘은 아니었다. 표정이 심각했다. 웃음기가 하나도 없었다. 나를 부르는 눈빛에 뭔가 무거운 것이 실려 있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리가 이상하게 무거웠다. 왜 이런 예감이 드는 걸까. 좋은 일로 부르는 게 아니라는 걸, 나는 이미 알고 있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