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미소년의 냉혹한 반격

4화

다음 날, 옥상에서 다혜를 기다렸다. 하늘이 흐릿했다. 구름이 낮게 깔려 있었고, 바람은 옷깃 사이로 스며들 만큼 찼다. 나는 난간에 손을 얹고 서 있었다. 손끝이 시렸다. 그런데도 움직이지 않았다. 휴대폰을 몇 번이나 꺼냈다가 다시 넣었다. 화면 속 영상은 이미 백 번은 돌려본 것 같았다. 그런데도 볼 때마다 속이 뒤틀렸다. 계단 쪽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익숙한 리듬이었다. 다혜였다. 평소처럼 밝은 얼굴로, 가벼운 걸음으로 올라왔다. 그 얼굴을 보는 순간 나는 잠깐 흔들렸다. 저 얼굴이 웃을 때, 나는 늘 마음이 놓였었다. "오빠, 왜 여기서 보자고 했어?" 목소리도 여전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아무 일도 없다는 듯한 목소리. 나는 대답 대신 휴대폰을 꺼냈다. 손이 조금 떨렸지만, 다혜가 눈치채지 못하도록 최대한 천천히 화면을 눌렀다. 재생 버튼을 눌렀다. 십오 초. 짧은 시간이었다. 하지만 그 안에 담긴 것은 절대 짧지 않았다. 다혜의 표정이 그대로 굳었다. 핏기가 가시는 게 눈에 보였다.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눈동자가 화면과 내 얼굴 사이를 빠르게 오갔다. "이, 이거 뭐야." 목소리에 이미 균열이 가 있었다. "뭐긴. 너잖아." "오빠, 그, 그게..." 다혜는 말을 잇지 못했다. 눈에 눈물이 차올랐다. 손이 저도 모르게 옷자락을 움켜쥐었다. 손톱이 원단을 파고드는 게 보였다. 예전이었다면 나는 그 눈물에 흔들렸을 것이다. 당장 달려가서 괜찮다고, 무슨 일인지 말해달라고, 손을 잡아줬을 것이다. 그게 나였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이상하게 마음속이 고요했다. 마치 폭풍이 지나간 뒤의 바다 같았다. 파도는 여전히 남아 있지만, 그 파도에 휩쓸리지는 않는 상태. "화내지 않을 거야. 대신 정확히 말해줘. 언제부터야." 내 목소리가 놀라울 정도로 차분했다. 나조차도 이 목소리가 낯설었다. 다혜도 그 차분함에 오히려 더 당황한 듯했다. 눈물이 그친 것도 아닌데, 표정에는 혼란이 겹쳐 있었다. 마치 내가 소리를 지르거나 화를 냈다면 오히려 더 익숙했을 거라는 듯이. "그, 그게... 협박당해서 시작한 거야. 영도 선배가... 나 사진 가지고 있대. 예전에 실수로..." 다혜의 말이 뒤엉켰다. 협박, 사진, 처음엔 어쩔 수 없이. 단어들이 순서 없이 튀어나왔다. 마치 미리 준비해둔 대본을 급하게 읊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 말들 사이에서 나는 이미 다른 진실을 읽고 있었다. 십오 초짜리 영상 속에서, 다혜는 웃고 있었다. 협박당하는 사람의 표정이 아니었다. 어깨가 편안하게 늘어져 있었고, 눈은 곡선을 그리며 접혀 있었다. 그건 두려움에 짓눌린 사람의 얼굴이 아니라, 어떤 순간을 즐기는 사람의 얼굴이었다. 나는 그 장면을 처음 봤을 때부터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 몇 번이나 다시 돌려봤다. 결과는 똑같았다. "처음엔 그랬을 수도 있겠지." 나는 조용히 말했다. 목소리에 날을 세우지 않으려 애썼다. "근데 지금은 아니잖아." 다혜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침묵이 길어졌다. 바람이 옥상 난간을 스치는 소리만 들렸다. 어딘가에서 새 우는 소리가 들렸는데, 그 소리가 이상하게 크게 느껴졌다. 그 침묵이 모든 걸 말해주고 있었다. 나는 휴대폰을 다시 주머니에 넣었다. 화면이 꺼지는 순간, 검은 액정에 내 얼굴이 잠깐 비쳤다. 표정이 없었다. "당장 뭘 결정하지는 않을게. 시간을 좀 줘." "오빠..." 다혜가 한 걸음 다가왔다. 손을 뻗으려는 듯한 몸짓이었다. 나는 물러서지 않았지만, 그 손을 잡지도 않았다. "대신 한 가지만 약속해. 나한테 거짓말은 더 하지 마." 다혜는 고개를 끄덕였다. 눈물이 후두둑 떨어졌다. 고장난 수도꼭지처럼, 한 번 터진 눈물은 멈출 줄 몰랐다. 나는 그 자리를 먼저 떠났다. 등을 돌리는 순간까지도 심장이 아팠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등 뒤에서 다혜가 우는 소리가 들렸다. 그런데도 걸음은 흔들리지 않았다. 계단을 내려오면서 나는 스스로에게 말했다. 이 정도로 무너지지 않을 거야. *** 그날 이후 나는 이상하게 학교에서 눈에 띄기 시작했다. 다혜와 옥상에서 이야기하는 걸 몇몇 애들이 목격했던 모양이었다.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는 이야기가 돌았다. 누군가는 다혜가 울고 있었다고 했고, 또 누군가는 내가 다혜의 손목을 잡고 소리를 질렀다고 했다. 정작 진짜 있었던 일과는 전혀 다른 소문들이 복도를 타고 번졌다. 그런데 소문의 방향이 예상과 달랐다. "이서윤 되게 어른스럽던데." "다혜가 울고 있었는데 서윤이는 진짜 침착하게 얘기하더라." "보통 그런 상황이면 다 뒤집어지는데, 걘 안 그러던데?" 준혁이 그 소문들을 전해줬다. 점심시간, 매점 앞 계단에 앉아서였다. 준혁은 삼각김밥 포장을 뜯으며 실실 웃었다. "너 완전 재평가받는 중이야." 나는 웃지 않았다. "그런 거 필요 없어." 준혁이 김밥을 씹다가 나를 힐끗 봤다. "뭐야, 표정이 왜 그래. 너 좋은 얘기 듣는 거잖아." "좋은 얘기든 나쁜 얘기든, 다혜한테는 상관없는 거잖아." 내 말에 준혁이 잠깐 멈췄다가, 다시 김밥을 삼켰다. 필요한 건 딱 하나였다. 확실한 증거, 그리고 완벽한 타이밍. 머릿속에서 계속 그 문장이 맴돌았다. 소문 따위에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지금 필요한 건 감정이 아니라 사실이었다. 나는 준혁에게 부탁했다. "영도 선배 쪽도 좀 더 알아봐 줄 수 있어? 이게 처음이 아니라는 거, 확실하게 알아야 할 것 같아." 준혁이 김밥 포장지를 접어 쓰레기통에 던져넣었다. 정확하게 들어갔다. "검도부 애들한테 더 물어볼게." "고마워." "고맙긴. 이건 나도 화나는 일이야." 준혁의 목소리에 평소와 다른 무게가 실려 있었다. 나는 그 말에 잠깐 고개를 들었다. 준혁은 이미 다른 곳을 보고 있었다. 그리고 며칠 후, 준혁이 다시 나를 찾아왔다. 이번엔 표정이 더 심각했다. 방과 후, 교실 뒷문 근처였다. 아이들이 다 빠져나간 뒤였다. 준혁은 주변을 한 번 살피고 나서야 입을 열었다. "서윤아, 이거 하나 더 나왔어." 목소리가 낮았다. 휴대폰을 내미는 손이 조금 굳어 있었다. 새로운 영상이었다. 날짜가 더 오래된, 지금보다 훨씬 이전의 영상. 나는 화면을 받아 들었다. 손끝이 차가웠다. 재생 버튼을 눌렀다. 화면 속 다혜는 지금보다 어색해 보였다. 표정도 굳어 있었고, 몸짓도 뻣뻣했다. 확실히 지금의 다혜와는 달랐다. 하지만 그 옆의 최영도는 확실히 위압적인 태도로 다혜의 어깨를 감싸고 있었다. 손의 위치도, 힘의 방향도 명백했다. 다혜가 벗어나려는 듯 몸을 살짝 틀었지만, 그 손은 놓아주지 않았다. 그리고 그 영상 끝에, 최영도의 목소리가 짧게 잡혔다. "소문나면 너부터 끝나는 거야. 알지?" 나는 그 문장을 몇 번이나 다시 들었다. 재생, 정지, 다시 재생. 같은 문장이 귀에 박히듯 반복됐다. 협박이 사실이었다는 증거였다. 최소한 처음에는, 다혜가 원해서 시작한 일이 아니었다는 것. 하지만 그 협박이 언제 끝났는지, 그 이후로도 계속된 관계가 자발적이었는지는 여전히 알 수 없었다. 영상 속 어색한 다혜와, 얼마 전 영상 속 웃고 있던 다혜 사이에는 분명한 시간의 간극이 있었다.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건 다혜 본인 말고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준혁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거 어떻게 할 거야?" 나는 휴대폰을 돌려주며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할 수 없었다. 확실한 건 하나였다. 이 모든 걸 그대로 덮을 수는 없다는 것. 그리고 또 하나,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자꾸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이 영상을 최영도가 알게 되는 순간, 상황이 지금보다 훨씬 복잡해질 거라는 것. 나는 교실 창밖을 바라봤다. 운동장에서 검도부 아이들이 죽도를 휘두르는 소리가 들렸다. 딱, 딱, 규칙적인 소리였다. 그 소리 사이로, 낯익은 얼굴이 보였다. 최영도였다. 멀리서도 알 수 있었다. 그 특유의 여유로운 자세, 다른 아이들과는 다른 태도. 자신이 이 상황을 전혀 모르고 있다는 듯한 얼굴. 나는 그 얼굴을 한참 동안 바라봤다. 준혁이 내 시선을 따라가더니, 낮게 중얼거렸다. "저 새끼, 진짜 뻔뻔하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머릿속으로 다음 단계를 계산하고 있었다. 증거는 쌓이고 있었다. 하지만 아직 부족했다. 부족한 게 뭔지, 나는 정확히 알고 있었다.
♡ 좋아요 0 · 로그인 후 좋아요/별점/댓글 참여 가능

댓글 0

  •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