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 ›점심시간이 끝나갈 무렵, 준혁이 내 어깨를 툭 쳤다.
"잠깐 옥상 갈래?"
목소리가 평소와 달랐다. 장난기가 전혀 없었다.
준혁은 중학교 때부터 알던 친구였다. 같은 학교, 같은 동네, 지금은 같은 반에 검도부. 시험 전날이면 늘 내 노트를 빌려 갔고, 나는 그때마다 잔소리를 하면서도 결국 빌려줬다. 중학교 때부터 지금까지 붙어 다니면서 싸운 적도 몇 번 없었다.
그런 준혁이 이렇게 심각한 얼굴을 보인 건 처음이었다.
계단을 오르는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발소리만 또각또각 계단에 부딪혔다. 평소라면 시시껄렁한 농담을 던졌을 텐데, 오늘은 준혁도 나도 입을 다물었다.
옥상 문을 밀자 바람이 훅 들어왔다. 오후의 햇살이 눈부셨지만, 그 밝음이 이상하게 낯설게 느껴졌다.
아무도 없는 곳에서 준혁이 휴대폰을 꺼냈다.
"이거, 어제 검도부 후배들이랑 강남역에서 훈련 끝나고 밥 먹으러 가다가 찍은 건데."
손이 떨렸다. 준혁의 손인지 내 손인지 구분이 안 갔다. 화면을 보기도 전에 이미 뭔가를 예감했다. 배 속 깊은 곳에서부터 서늘한 기운이 올라왔다.
"보여줘."
목소리가 갈라져 나왔다.
준혁이 영상을 재생했다.
러브호텔 입구, 익숙한 간판. 그 아래로 다혜가 걸어 나왔다. 나비 머리핀이 화면 속에서도 선명하게 흔들렸다. 다혜가 웃고 있었다. 그 웃음이, 나한테 보여주던 것과 똑같아서 더 낯설었다.
그 옆의 남자, 이번엔 얼굴이 보였다.
최영도.
축구부 주장, 3학년. 학교 안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는 얼굴이었다. 키가 크고 몸이 다부졌다. 체육관 앞을 지날 때마다 여자애들이 몰려있던 이유가 있었다. 다혜가 그의 팔을 붙잡고 웃고 있었다.
영상은 십오 초 정도였다. 짧았지만 확실했다.
준혁이 다시 영상을 재생했다. 한 번, 두 번. 나는 말리지 않았다. 오히려 더 자세히 보고 싶었다. 저 각도, 저 표정, 저 웃음소리까지 전부.
"이게 처음이 아니라는 것도 들었어. 검도부 애들이 몇 번 더 봤대. 항상 그 근처였다고."
준혁이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한 번은 도윤이가 봤고, 한 번은 성민이가 봤어. 다 같은 데였대. 근처 편의점에서도 봤다고 하더라."
한 번이 아니었다. 여러 번이었다. 여러 사람이 목격했다. 나만 몰랐던 거였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손끝이 차가웠다. 심장이 내려앉는 느낌이었다. 옥상 난간을 붙잡았다. 손바닥에 차가운 철제 감촉이 닿았다.
"미안해. 말 안 하는 게 나을까 고민했는데, 너 요즘 얼굴 보니까 이미 뭔가 눈치챈 것 같아서."
준혁의 목소리가 조심스러워졌다.
"며칠 전부터 계속 고민했어. 말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근데 이건 아니다 싶어서."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말해줘서 고마워."
놀랍게도 그 순간, 눈물이 나지 않았다. 대신 머릿속이 이상하게 차분해졌다. 마치 폭풍이 지나간 뒤의 바다처럼, 겉으로는 잠잠했다.
확인하지 못해 흔들리던 며칠, 미뤄왔던 질문, 손을 놓던 다혜의 표정. 대답을 피하던 눈동자, 갑자기 늘어난 약속들, 자꾸만 꺼지는 휴대폰. 모든 게 하나로 이어졌다. 조각조각 흩어져 있던 퍼즐이 한순간에 맞춰지는 기분이었다.
"이거, 나한테 보내줄 수 있어?"
"당연하지."
준혁이 파일을 전송했다. 휴대폰 화면에 뜬 다운로드 완료 표시를 나는 오래 바라봤다. 진동이 짧게 울리고, 파일 크기가 표시되고, 완료라는 글자가 떠올랐다. 그 짧은 순간이 이상하게 길게 느껴졌다.
최영도. 이름을 알고 나니 오히려 마음이 가벼워졌다. 상대가 누군지 모를 때가 가장 무서웠던 거였다. 상상 속에서 그 남자는 얼굴 없는 그림자였는데, 이제는 구체적인 얼굴과 이름이 있었다.
"어떻게 할 거야?"
준혁이 물었다. 걱정스러운 눈빛이었다.
나는 잠시 생각했다. 옥상 바닥에 깔린 타일의 무늬를 보면서, 이 상황을 정리해보려 애썼다.
"당장은 아무것도 안 할 거야."
"뭐?"
준혁이 눈을 크게 떴다.
"너 지금 이 상황에서 그런 말이 나와? 나라면 당장 뛰어가서 따졌을 것 같은데."
"확실한 게 더 필요해. 이거 하나로는 다혜가 발뺌할 수도 있잖아."
스스로도 놀라운 대답이었다. 화를 내야 할 순간에, 나는 오히려 계산하고 있었다. 상처받은 마음과는 별개로, 머릿속 어딘가에서 냉정한 판단이 작동하고 있었다. 마치 내 감정과 이성이 두 개의 다른 사람처럼 따로 움직이는 것 같았다.
준혁이 나를 이상하다는 듯 쳐다봤다.
"너 되게... 침착하네."
"침착한 게 아니라, 그냥 이러는 게 맞는 것 같아서."
사실은 아니었다. 속에서는 뭔가가 무너지고 있었다. 다만 그 무너짐을 겉으로 드러내는 순간, 다혜에게 주도권을 넘겨주는 것 같았다. 울고, 소리치고, 매달리는 순간부터 나는 지는 쪽이 될 거였다. 그건 싫었다.
"밥 먹었어?"
준혁이 갑자기 물었다.
"아니."
"매점 가서 뭐라도 사줄게."
"괜찮아."
"안 괜찮아 보여."
준혁이 억지로 내 팔을 끌었다. 나는 순순히 끌려갔다. 매점에서 산 삼각김밥을 반도 먹지 못하고 쓰레기통에 버렸다.
수업 시간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선생님의 목소리가 웅웅거리는 소음처럼 멀게 들렸다. 칠판의 글씨가 흐릿하게 보였다. 옆자리의 다혜 쪽은 애써 보지 않았다. 보면 안 될 것 같았다.
그날 밤, 나는 영상을 몇 번이나 다시 봤다. 볼 때마다 심장이 아렸다. 그럼에도 지우지 않았다. 이불 속에서, 휴대폰 화면의 불빛만이 방을 밝혔다. 새벽 한 시가 넘도록 그 십오 초짜리 영상을 반복 재생했다.
다혜의 웃음, 최영도의 손, 나비 머리핀의 흔들림. 하나하나 뜯어보듯 관찰했다. 마치 그렇게 하면 이 상황이 덜 아플 것처럼.
대신 폴더를 하나 만들어 저장했다.
증거, 라는 이름을 붙였다.
폴더 이름을 타이핑하는 손가락이 유난히 무거웠다. 그 두 글자가 이렇게 차갑게 느껴질 줄 몰랐다.
그리고 다혜에게 문자를 보냈다.
"내일 학교 끝나고 옥상에서 얘기하자."
보내기 버튼을 누르기 전, 나는 몇 번이나 문장을 지우고 다시 썼다. 화가 난 것처럼 보이면 안 됐다. 아무 일 없는 것처럼, 그냥 평범한 부탁처럼 보여야 했다.
답장은 금방 왔다.
"응, 무슨 일 있어?"
나는 답장을 보내지 않았다. 다만 그 질문에 담긴 태연함이, 아까 본 영상보다 더 아프게 느껴졌다. 물음표 하나에도 죄책감이 섞여 있지 않았다. 그 담담함이, 지난 며칠간 나를 피해왔던 그 무심함과 똑같았다.
휴대폰 화면을 끄고 천장을 바라봤다. 내일, 옥상에서 다혜의 얼굴을 마주하게 되면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나는 아직도 정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