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대장님, 왜 절 반기세요?

1화

발표까지 십칠 분. 대강당 정면에 걸린 마법시계의 숫자가 또 하나 줄어드는 걸 보면서 나는 속으로 헛웃음을 삼켰다. 십칠 분 뒤에 내 인생이 어디로 굴러갈지가 결정된다는 건데, 그 중요한 순간을 초 단위로 카운트다운해 놓은 학원 측의 취향도 참 고약하다 싶었다. 누가 만들었는지 몰라도 취미가 참 고문에 가깝구나, 라고 생각하니 헛웃음이 자꾸 새어 나왔다. 졸업생 삼백여 명이 계급장도 없는 훈련복을 입은 채 줄지어 앉아 있었고, 다들 표면적으로는 무심한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무릎 위에 얹은 손이 미세하게 떨리는 건 나 하나만이 아니었다. 이런 게 다들 겪는 감정인가 보다, 라고 생각하니 조금 위안이 됐다가, 곧 저들과 나는 근본적으로 다른 처지라는 사실이 다시 목을 조여왔다. 저들에게 배치는 그저 첫 발걸음의 방향일 뿐이지만, 나에게는 오 년을 버텨온 근거가 통째로 증명되느냐 마느냐의 문제였다. 그 차이가 얼마나 큰지, 옆자리 귀족 자제의 여유로운 하품 소리를 들을 때마다 새삼 실감하곤 했다. 주변 자리는 대부분 귀족가의 자제들이었다. 저 뒤쪽에서 킬킬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려오기에 나도 모르게 어깨가 굳었는데, 이번에도 나를 두고 하는 소리인가 싶어서였다. "저 평민 놈은 발표 전부터 얼굴이 노랗구먼." 낮게 깔린 목소리가 귀에 꽂혔지만 나는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저런 걸로 흔들리면 오 년을 어떻게 버텼겠나, 라는 자기 위안을 되뇌면서도 속으로는 이 새끼들이, 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겉으로는 그저 정면만 바라보며 침착한 표정을 유지했지만, 사실 내 손바닥은 이미 땀으로 흥건했고 심장은 두방망이질을 치고 있었다. 겉과 속이 이렇게 다를 수가 있나 싶을 정도였다. 옆에서 또 다른 목소리가 거들었다. "쟤가 뭐, 이번에도 수석이라던데?" "수석이면 뭐 해. 배치는 다르잖아." 배치는 다르다, 라는 말이 유독 오래 귀에 남았다. 저 말속에 숨은 뜻을 모를 리 없었다. 성적은 성적이고 배치는 배치라는 소리, 즉 아무리 잘해도 결국 어디로 보내지느냐는 다른 잣대로 정해질 수 있다는 뜻이었다. 그 잣대가 뭔지는 굳이 묻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핏줄, 가문, 뒷배. 내가 가지지 못한 것들. 마법학원 오 년, 나는 단 한 번도 수석 자리를 놓친 적이 없었다. 평민 출신 장학생이라는 딱지를 달고 입학한 첫날부터, 나는 저들이 나를 어떻게든 끌어내리려 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입학시험 성적표를 받아 들던 날이 떠올랐다. 시험장 감독관이었던 조현목 교관이 내 답안지를 한참이나 들여다보다가, 결국 표정을 굳힌 채 아무 말 없이 넘겨 버리던 그 순간을. 그때는 그냥 깐깐한 교관이구나 싶었는데,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그건 단순한 깐깐함이 아니라 못마땅함이었던 것 같았다. 평민이 귀족 자제들보다 뛰어난 걸 두 눈으로 목격해 버린 자의 표정, 그런 거였다. 입학 후에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나는 매 학기 성적표 최상단에 이름을 올렸고, 그럴 때마다 주변의 시선은 점점 날카로워졌다. 대놓고 텃세를 부리는 놈들도 있었고, 뒤에서 조용히 방해를 놓는 부류도 있었다. 실습 수업에서 갑자기 내 마법 재료만 바닥나 있던 적도 있었고, 조별 과제에서 나 혼자 다른 조 명단에 잘못 적혀 있던 적도 있었다. 그럴 때마다 담당 교관들은 “착오가 있었나 보다”라며 대충 넘겼고, 나는 그 착오라는 말이 몇 번 반복되니 더 이상 착오로 안 들리기 시작했다. 그런데도 나는 버텼다. 딱히 대단한 각오가 있어서가 아니라, 그냥 여기서 밀리면 평민 출신 후배들이 다시는 이 문을 넘지 못할 거라는 부담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거창하게 말하면 사명감이고, 솔직하게 말하면 자존심이었다. 밤새 마법이론서를 붙들고 눈이 시뻘게져서도 다음 날 시험장에 앉아 있던 이유, 다들 잠든 새벽에 연습장을 몰래 빌려 실전 마법을 익히던 이유, 그게 다 그거였다. 지는 게 무서웠던 게 아니라, 나 하나 지는 걸로 끝나지 않을까 봐 무서웠다. 마법시계가 십오 분을 가리키는 순간, 대강당 문이 열리며 제복 차림의 남자가 들어왔다. 나는 그 얼굴을 보는 순간 등골이 서늘해졌다. 조현목이었다. 오 년 전 그 표정 그대로, 나를 향해서만 유난히 차가운 눈빛을 하고 있는 그 사람. 왜 하필 발표식에 저 사람이 오는 건지, 나는 불안한 예감을 애써 눌러 삼켰다. 원래 발표는 학사 담당 교관이 진행하는 게 관례였는데, 그 자리에 조현목이 서 있다는 것부터가 이상했다. 관례를 깼다는 건 뭔가 특별한 이유가 있다는 뜻이고, 그 이유가 나와 무관하지 않을 거라는 직감이 스쳤다. 이런 직감은 대체로 틀리지 않았다, 특히 나쁜 쪽으로. "다들 조용히." 조현목의 목소리가 대강당을 울렸다. 낮고 무거운, 그러면서도 어딘가 여유가 느껴지는 어조였다. 그 여유가 나는 유난히 불길하게 느껴졌다. 뭔가 준비된 자의 태도랄까. 저 사람이 저렇게 느긋한 표정을 지을 때는 대개 누군가에게 불리한 일이 벌어질 때였다는 걸, 나는 오 년의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언젠가 실습 평가에서 내가 최고점을 받았을 때도, 조현목은 저런 표정으로 서 있다가 갑자기 재시험을 발표한 적이 있었다. 이유는 “절차상 오류”였고, 그 재시험에서도 나는 수석을 했지만, 그날 이후로 나는 저 사람의 여유로운 표정을 절대 좋게 해석하지 않기로 했다. 강당 안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삼백여 명의 숨소리마저 잦아드는 그 정적 속에서, 나는 내 심장 소리만 유난히 크게 들리는 것 같아서 손을 슬쩍 가슴에 얹었다. 이러다 옆자리에까지 들리는 거 아닌가, 하는 실없는 걱정이 스쳤다가 곧 지워졌다. 지금 그런 걸 걱정할 때가 아니었다. "오늘 발표되는 배치는 앞으로 여러분 인생의 방향을 결정짓게 될 것입니다." 조현목이 강당 앞에 서서 좌우를 훑었다. 그 시선이 잠깐, 아주 잠깐 나에게 멈추는 걸 느꼈을 때, 나는 확신할 수 있었다. 이거 뭔가 있다. 씨발, 뭔가 있어. 단순히 기분 탓이라고 하기엔 그 시선이 너무 명확했다. 삼백여 명 중에 딱 한 명, 나에게만 머물렀던 그 짧은 순간. 다른 사람이라면 눈치채지 못했을 수도 있지만, 나는 오 년 동안 저 사람의 눈빛을 볼모로 살아온 사람이었다. 그 미묘한 차이를 놓칠 리가 없었다. 저건 그냥 훑어보는 시선이 아니라, 뭔가를 확인하는 시선이었다. 마치 이미 결정된 일을 지켜보러 온 사람의 눈빛. 머릿속으로 온갖 최악의 가능성이 스쳐 지나갔다. 성적 조작? 배치 누락? 아니면 아예 명단에서 빠지는 건가? 오 년을 수석으로 버텨왔는데 그게 다 무효가 되는 상상을 하니 손끝이 차가워졌다. 아니야, 설마. 그렇게까지 할 리는. 라고 생각하면서도 조현목이라면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동시에 들어서, 나는 스스로도 어이가 없었다. 믿음과 불신이 이렇게 동시에 존재할 수 있다니. 마법시계는 여전히 돌아가고 있었다. 십사 분, 십삼 분. 남은 시간이 줄어드는 게 이렇게 공포스러운 감각인 줄은 처음 알았다. 초침 하나가 넘어갈 때마다 목덜미가 서늘해지는 느낌, 심장이 그 박자에 맞춰 두방망이질을 치는 느낌. 조현목은 여전히 여유로운 얼굴로 서류를 뒤적이고 있었고, 그 손끝이 넘기는 종이 한 장 한 장이 마치 내 오 년을 한 장씩 넘기는 것처럼 느껴졌다. 저 안에 뭐가 적혀 있을지, 나는 감히 짐작조차 하고 싶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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