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대장님, 왜 절 반기세요?

4화

회의는 사흘 후 배치 확정 여부를 결정한다고 했다. 사흘. 나에게 주어진 시간이 딱 그만큼이었다. 처음 그 소식을 들었을 때는 다리에 힘이 풀려서 그 자리에 주저앉을 뻔했는데, 다행히 아무도 못 봤다. 봤으면 또 뭐라고 놀렸을 거다. 도윤이 저놈 저거 겁쟁이라고. 그런데 겁쟁이가 아니면 이 상황에서 태연할 수 있는 놈이 대체 어디 있을까. 예비 대상자로 지정된다는 게 뭔 뜻인지, 이 학원에서 오 년이나 굴러먹은 나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예비 대상자는 실전 배치에서 가장 위험한 최전선, 사망률이 압도적으로 높은 곳에 우선적으로 밀어 넣어지는 이름표였다. 성적이랑 상관없이, 뒤를 봐주는 사람이 없으면 무조건 걸리는 뽑기. 그런데 그 뽑기가 나한테 걸렸다. 나는 그 사흘 동안 할 수 있는 모든 걸 하기로 마음먹었다. 가만히 앉아서 손가락만 빨고 있다가 죽으면 그것보다 억울한 일이 어디 있겠나. 최소한 발버둥은 쳐봐야, 나중에 죽어서도 후회가 덜할 것 같았다. 가장 먼저 떠오른 방법은 학원 배치 담당관을 찾아가는 것이었다. 절차대로, 정석대로 가보자는 심산이었다. 담당관실 앞에 줄을 서서 기다리는 동안에도 머릿속으로는 계속 말을 정리했다. 최대한 정중하게, 그러면서도 논리적으로. 흥분해서 목소리 높이면 안 된다, 그럼 그냥 미친놈으로 보인다. 성적표를 근거로 재심을 요청하는 것, 그게 내가 가진 유일한 카드였다. 줄이 줄어드는 속도가 어찌나 더디던지, 앞사람이 담당관하고 실없는 소리를 주고받는 걸 들으면서 속으로 이를 갈았다. 지금 나한테는 일 분 일 초가 아까운데, 저 사람은 대체 뭐가 그렇게 궁금한 게 많은지. 드디어 내 차례가 왔다. "담당관님, 이번 배치식에서 제 이름이 예비 대상자로 지정된 것에 대해 재심을 요청드리고 싶습니다." 나는 책상 앞에 서서 최대한 침착하게 말을 꺼냈다. 목소리가 떨리지 않도록 배에 힘을 꽉 주고. 백발이 성성한 담당관은 서류 더미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대답했다. "으응, 그건 나 혼자 결정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니여." 사투리가 짙게 섞인 말투였다. "상층부에서 지정한 사안이면 나 같은 놈이 뭘 어쩌겄나. 그냥 결과 기다리는 게 상책이여, 이 사람아." 그러곤 손을 휘휘 저으며 다음 사람을 부르라는 손짓을 했다. 여기서 물러날 거면 애초에 오지도 않았다. 나는 물러나지 않고 다시 입을 열었다. "저는 오 년간 수석을 놓친 적이 없습니다. 성적을 근거로 다른 부대로의 재배치를 검토해 주실 수는 없겠습니까." 최대한 예의 바르게, 최대한 겸손하게. 속으로는 이 양반아 나 좀 살려달라고 소리치고 싶었지만 겉으로는 미소까지 지어 보였다. 담당관이 그제야 고개를 들어 나를 힐끗 보더니 혀를 찼다. "성적 좋은 거랑 배치는 별개여. 아, 답답한 소리 좀 하지 말고 그냥 가여." 그러곤 다음 사람을 향해 손짓을 했다. 나는 그 자리에서 몇 마디 더 붙여보려 했지만, 담당관은 이미 서류에 시선을 다시 박은 뒤였다. 완전히 무시당하는 느낌. 아니, 무시가 아니라 이건 그냥 애초에 대화가 성립하지 않는 벽이었다. 결국 아무 소득 없이 돌아섰다. 예상은 했지만 역시나였다. 씨발, 이렇게 쉽게 막힐 줄이야. 담당관실을 나오면서 발걸음이 무거웠다. 복도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빛이 유난히 눈부셔서, 나는 잠깐 눈을 감고 숨을 골랐다. 첫 번째 카드가 이렇게 허무하게 날아갔으니, 두 번째 카드는 좀 더 확실한 걸 써야 했다. 나는 두 번째 카드를 꺼내기로 했다. 학년 내내 나를 지도했던 마법 교관. 최소한 실력을 아는 사람이니 뭔가 힘을 써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였다. 사실 기대라기보다는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었다. 이게 통하지 않으면 남은 카드는 없다. 교관실을 찾아가자 나이 든 교관은 나를 반갑게 맞았지만, 표정은 이내 어두워졌다. "도윤이, 나도 그 소식 들었네. 참 안타까운 일이여." 그는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 그 한숨이 어찌나 무겁던지, 그 안에 답이 이미 다 들어 있는 것 같았다. "내가 힘을 써볼 수 있으면 벌써 썼지. 근디 이게 상층부 세 놈이 다 같이 밀어붙이는 사안이라, 나 같은 교관 나부랭이가 낄 자리가 없어." 상층부 세 놈. 그 표현이 귀에 걸렸다. 세 명이나 얽혀 있다는 건, 이게 단순한 실수나 착오가 아니라는 뜻이었다. 누군가 작정하고 밀어붙이고 있다는 소리. "그 세 분이 누구신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나는 최대한 조심스럽게 물었다. 교관이 이걸 말해줄 의무는 없었다. 괜히 캐물었다가 교관까지 곤란해지면 안 되니까. 교관은 잠시 망설이다가 목소리를 낮췄다. 주위를 한 번 둘러보는 것까지 봤다. 이거 진짜 큰 사안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조현목 그놈이 주도하고 있고, 뒤에 자금줄인 귀족 둘이 붙어 있다더구먼. 이유는 뻔하지, 평민이 잘 되는 걸 못 보는 거지 뭐." 뻔한 이유라는 말에 나는 헛웃음이 나왔다. 어이없을 정도로 유치한 이유로 사람 목숨이 걸린 일이 정해진다는 게, 그게 정말인가 싶으면서도 이미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현실이었다. 조현목. 그 이름을 듣는 순간 속에서 뭔가가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그 자식하고 딱히 크게 부딪힌 적도 없는데, 그냥 평민이라는 이유 하나로 이런 짓을 벌이고 있다는 게. 세상이 원래 이렇게 불공평했나, 아니면 내가 그동안 운이 좋아서 몰랐던 건가. "교관님, 혹시 방법이 정말 아예 없을까요." 나는 마지막으로 매달려봤다. 교관이 안타까운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다 해봤어. 근디 이건 나 혼자 뒤집을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여. 도윤이 너도 알잖어, 상층부 결정에 우리 같은 사람들 목소리가 얼마나 힘이 있는지." 알고 있었다. 알면서도 물어본 거였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교관실을 나서면서 나는 이미 답을 알고 있었다.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절대 뒤집을 수 없다는 걸. 그렇다면 남은 건 비정상적인 방법뿐인데, 그게 뭔지는 아직 나도 몰랐다. 남은 하루, 나는 마지막 방법을 시도해보기로 했다. 상층부 회의에 직접 참관 신청을 넣는 것. 무모한 일이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가만히 앉아서 사흘을 흘려보낼 수는 없었다. 이렇게라도 눈앞에서 무슨 이야기가 오가는지 직접 봐야 마음이 놓일 것 같았다. 최소한 어떻게 죽는지는 알고 죽어야 하지 않겠나, 하는 생각도 들었고. 다행히 참관 신청 자체는 형식적으로 받아준다는 규정이 있었고, 나는 그 규정에 매달렸다. 도서관 구석에서 학원 규정집을 뒤져가며 관련 조항을 몇 번이나 확인했다. 규정이라는 게 이렇게 반가운 거였구나, 평소엔 지겹기만 했던 그 자잘한 조항들이 이럴 때는 유일한 구명줄이 되어주고 있었다. 신청서를 작성하며 손이 떨리는 걸 애써 감췄다. 종이 위에 이름을 쓰는데 글씨가 삐뚤빼뚤했다. 이게 통할지, 통해도 무슨 소용이 있을지는 알 수 없었지만, 적어도 아무것도 안 하고 끌려가는 것보다는 나을 거라고 믿기로 했다. 참관이라도 해서 뭔가 트집 잡을 구석이라도 찾으면, 그거라도 붙잡고 매달려볼 생각이었다. 지푸라기, 그것도 아주 얇고 가느다란 지푸라기였지만. 신청서 접수처는 학원 본관 이층에 있었다. 계단을 오르면서도 심장이 쿵쿵 뛰었다. 이게 마지막 카드다. 이거 하나까지 막히면 정말 방법이 없다. 그런데 신청서를 제출하러 가는 복도에서, 나는 뜻밖의 소식을 들었다. "들었나? 상층부가 회의를 하루 앞당겼다는군." 지나가던 훈련생 둘이 나누는 대화가 귀에 꽂혔다. 별생각 없이 지나가면서 하는 말투였는데, 나한테는 그야말로 벼락같은 소리였다. 하루 앞당겼다니. 그럼 사흘이 아니라 이틀 만에 결정이 난다는 소리였다. 나는 그 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손에 들고 있던 신청서가 손가락 사이에서 미끄러질 뻔했다. 심장이 다시 두방망이질을 쳤고, 하늘이 다시 한 번 노래지는 느낌이 들었다. 이런 게 정말 진짜로 있는 감각이었구나, 소설에서만 보던 그 표현이 지금 딱 내 몸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이게 우연일까, 아니면 누군가 일부러 시간을 줄인 걸까. 답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인정하기가 싫었다. 우연이라고 믿고 싶었다. 그냥 상층부 일정이 겹쳐서, 어쩔 수 없이 앞당겨진 거라고.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 타이밍이 너무 절묘했다. 내가 발버둥을 치기 시작하니까, 그 발버둥이 무슨 효과라도 낼까 봐 아예 시간 자체를 없애버린 것 같은 이 느낌. 지나가던 훈련생 둘을 붙잡고 더 물어보고 싶었지만, 그럴 용기도 나지 않았고 물어본다고 답이 나올 것 같지도 않았다. 나는 그냥 그 자리에 서서, 손에 든 신청서를 내려다봤다. 이제 이거 제출해봐도 무슨 의미가 있나. 참관 신청 승인되는 데도 시간이 걸릴 텐데, 하루 만에 그게 가능할까. 조현목이 내 발버둥을 미리 예상하고, 아예 시간을 아예 없애버린 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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