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대장님, 왜 절 반기세요?

5화

회의가 앞당겨졌다는 소식을 들은 게 불과 한 시간 전이었다. 원래 예정대로면 사흘의 여유가 있었는데, 누군가 일정을 조작한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갑작스러운 변경이었다. 나는 소식을 듣자마자 서류함에서 참관 신청서를 낚아채 들고 상층부 회의실로 뛰었다. 계단을 세 칸씩 건너뛰며 올라가는 내내 머릿속에서는 하나의 생각만 맴돌았다. 늦으면 끝이다. 이미 늦었을지도 모른다는 불안이 자꾸 발걸음을 재촉했고, 숨이 턱까지 차오르는데도 멈출 수가 없었다. 회의실 앞에 도착하니 무장한 경비병 둘이 창처럼 딱딱하게 서 있었다. 표정 하나 없이 나를 내려다보는 그 얼굴들이, 마치 여기까지 오느라 애썼다만 소용없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나는 숨을 몰아쉬며 신청서를 내밀었다. "참관 신청입니다." 경비병들은 서로 눈짓을 주고받았는데, 그 눈짓의 의미를 나는 나중에야 이해했다. 마지못해 문을 열어주는 그들의 태도가 이상하게 순순했다. 원래라면 신원 확인이며 절차며 한참 걸렸어야 했는데, 이렇게 쉽게? 뭔가 이상하다 싶었지만 그 순간엔 그저 운이 좋았다고만 생각했다. 곧 그게 얼마나 큰 착각이었는지 깨닫게 됐지만. 회의실 안은 넓고 서늘했다. 벽에 걸린 등불이 뿜어내는 빛조차 왠지 차갑게 느껴지는 공간이었다. 긴 탁자 상단에 세 남자가 앉아 있었는데, 가운데는 조현목이었고 양옆에 앉은 두 사람은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옷차림만 봐도 상당한 지위의 귀족이라는 걸 단번에 알 수 있었다. 금실로 자수를 놓은 소매며 손가락마다 낀 반지며, 저런 걸 걸치고 다니려면 대체 얼마짜리 인간이어야 하나 싶은 생각이 잠깐 스쳤다. 이 판국에도 그런 잡생각이 드는 걸 보면 나도 참 태평한 놈이다. 그리고 그들에게서 조금 떨어진 자리, 회의 탁자의 끝자락에 자주색 머리를 길게 늘어뜨린 여인이 조용히 앉아 있었다. 다른 이들과 달리 그녀는 이 논의에 별 관심이 없다는 듯 팔짱을 낀 채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그 무심함이 오히려 이 방 안에서 가장 위압적으로 느껴졌다. 이상한 일이었다. 큰소리로 뭘 지시하는 것도 아니고 시선 한 번 마주치지도 않았는데, 왜 저 여자만 보면 등골이 서늘해지는 걸까. "강도윤 훈련생이 참관을 신청했습니다." 경비병이 보고하자 조현목이 나를 힐끗 보더니 피식 웃었다. 그 웃음이 진짜 웃음이 아니라는 걸 나는 바로 알아챘다. 저건 재밌어서 웃는 게 아니라, 뻔한 결과를 앞에 두고 여유를 부리는 자의 웃음이었다. "본인이 직접 오셨군요. 그렇다면 마지막 발언 기회를 드리는 것도 나쁘지 않겠습니다." 마지막 발언이라는 말에서 나는 이미 결론이 정해져 있다는 걸 직감했다. 마지막이라는 단어는 원래 끝을 의미하는 법이니까. 이미 끝난 얘기에 형식적으로 한마디 하라고 던져주는 자리라는 뜻이었다. 그래도 물러날 수는 없었다. 여기까지 뛰어온 게 억울해서라도, 최소한 발언은 하고 나가야 했다. "감사합니다." 나는 최대한 예의를 갖춰 인사하고는, 오는 길에 머릿속으로 몇 번이나 정리해둔 말을 최대한 차분하게 꺼냈다. 목소리가 떨리지 않게 하려고 배에 힘을 주면서. "오 년간 학원에서 쌓아온 성적과 실력을 근거로, 저를 칠흑대가 아닌 다른 부대로 배치해주시기를 요청드립니다. 저는 이 배치가 실력이 아닌 다른 기준으로 결정되었다는 인상을 받았고, 그것이 사실이라면 제국의 인재 운용 원칙에도 맞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최대한 논리적으로 말을 마쳤다고 생각했는데, 옆에 앉은 귀족 하나가 코웃음을 쳤다. 그 소리가 왜 이렇게 사람 신경을 긁는지. "인재 운용 원칙이라, 평민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오니 참 우습군." 다른 귀족도 맞장구를 쳤다. "성적이 뭐 대수인가. 배치는 어차피 상층부의 재량 아닌가." 그 말투가 짧고 날카로워서, 마치 나를 상대로 반박할 가치조차 없다는 듯한 태도였다. 나는 속으로 이 새끼들이, 라는 말을 삼키며 표정을 관리했다. 겉으로는 침착한 척, 속으로는 온갖 욕이 폭풍처럼 지나가는데 그걸 얼굴에 하나도 안 드러내는 게 이럴 때마다 스스로 대단하다 싶다. 이런 능력이 성적표에 반영되면 나 진짜 수석이었을 텐데. "성적을 근거로 재배치를 요청하는 건 규정상 정당한 절차입니다." 나는 물러서지 않고 다시 말을 이었다. 목소리에 힘을 더 넣었다. 어차피 이길 확률이 낮다면 최소한 끝까지 밀어붙이는 모습이라도 보여야 했다. 그러자 이번엔 조현목이 나섰다. "규정상 정당한 절차라는 건 인정하네. 다만 이미 세 표 중 두 표가 배치 확정에 찬성한 상태고, 남은 한 분의 의견만 남았지." 조현목의 시선이 자주색 머리 여인을 향했다. 이제 보니 이 셋이 표결권을 나눠 가진 구조였구나. 두 표가 이미 확정이면 사실상 결론은 끝난 거고, 남은 한 표는 형식적인 절차에 불과한 거 아닌가. 그런데 왜 저 여자 한 명한테 저렇게 시선이 몰릴까. 설마. 그녀는 여전히 창밖을 보고 있다가, 그 시선을 느꼈는지 천천히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봤다. 처음으로 마주한 그 눈빛은 놀랄 만큼 차가웠다. 감정이 거의 느껴지지 않는, 그저 관찰하는 시선이었다. 마치 내가 사람이 아니라 하나의 변수처럼 취급되는 듯한 느낌이었다. 심장이 두방망이질 치는 게 느껴졌다. 이런 게 무섭다는 감정인가 보다. 상대는 아무 말도 안 했는데 이미 내가 지고 있는 기분. "강도윤이라고 했나." 그녀의 목소리는 낮고 부드러웠지만, 그 부드러움 안에 어떤 냉정함이 배어 있었다. 부드럽다고 안심할 수 있는 목소리가 아니었다. "네, 그렇습니다." 나는 최대한 담담하게 대답했지만 속으로는 심장이 다시 뛰기 시작했다. 이 여자, 뭔가 다르다. 다른 두 귀족은 그냥 나를 무시하고 깔보는 부류였는데, 이 여자는 그런 감정조차 없어 보였다. 무시할 가치도 없다는 게 아니라, 애초에 나를 감정의 대상으로 놓지 않는 것 같은. "수석 졸업생이 죽음의 땅에 배치되는 게 아깝지 않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아깝다고 생각하네." 그녀가 말을 이었다. 예상 밖의 발언이었다. 조현목의 표정이 순간 굳어지는 게 보였다. 오, 이건 좀 흥미로운 전개인데. 어쩌면 이 여자가 내 편을 들어줄지도 모른다는 기대가 잠깐 부풀었다. 심장이 아까와는 다른 이유로 두근거렸다. 설마 여기서 반전이 있는 건가. 하지만 이어진 말은 그 기대를 완전히 무너뜨렸다. "하지만 나는 이 배치를 반대할 이유도 찾지 못했네. 자네의 실력이 아깝다는 것과, 이 결정이 부당하다는 것은 다른 문제니까." 그 말이 끝나자마자 조현목이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세 표 모두 배치 확정에 찬성한 것으로 결론짓겠습니다." 나는 그 자리에 그대로 굳어버렸다. 하늘이 완전히 노래지는 느낌이었고, 다리에서 힘이 빠지는 게 느껴졌다. 무릎이 후들거려서 그 자리에 주저앉을 것 같았는데, 이상하게 그럴 수도 없었다. 다리는 힘이 빠지는데 몸은 꼿꼿이 서 있어야 한다는 이 괴리감. 이렇게 끝나는 건가. 이 모든 발버둥이 아무 의미도 없었던 건가. 계단을 세 칸씩 뛰어 올라온 것도, 며칠 동안 머릿속으로 논리를 다듬은 것도, 결국 저 세 명 앞에서 몇 마디 형식적인 발언으로 소비되고 끝인 건가. 자주색 머리 여인은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마치 방금 있었던 일이 아무 일도 아니었다는 것처럼. 그런데 회의실을 나서기 직전, 나는 그녀가 아주 짧게 나를 향해 다시 눈길을 던지는 걸 느꼈다. 그 눈빛에 담긴 게 동정인지, 흥미인지, 아니면 전혀 다른 무언가인지 나는 끝내 읽어낼 수 없었다. 다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저 여자는 이 결정에 아무 감정도 없어 보였지만, 동시에 나라는 존재를 결코 잊지는 않을 것 같았다. 경비병이 문을 열어줄 때 나는 다리에 힘을 억지로 넣어가며 걸어 나왔다. 등 뒤에서 문이 닫히는 소리가 유독 크게 들렸다. 배치는 이제 완전히 확정됐다. 사흘도 아니고 단 이틀 만에, 내 운명은 그렇게 서명 하나로 끝나 있었다. 회의실 복도를 걸어가면서 나는 생각했다. 죽음의 땅이라 불리는 칠흑대에, 그것도 수석 졸업생이라는 이름표를 달고 배치된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그리고 저 자주색 머리 여인이 나를 향해 던진 마지막 눈빛이, 정말 아무 뜻도 없는 것이었는지. 아니면 뭔가를 알고 있었던 건지. 그 답을 알아낼 시간이 내게 남아 있을지도 의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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