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야근 중에 정신을 잃는다는 게 어떤 느낌인지 알고 싶다면, 결재 서류 더미에 얼굴을 박고 눈을 감았다가 다음 순간 낯선 침대 위에서 눈을 뜨는 경험을 해보라고 권하고 싶다. 물론 이런 경험을 하고 싶어 할 사람이 세상에 나 말고 또 있을 리는 없겠지만. 눈을 뜨기 직전까지 나는 분명히 사무실 파티션 안에 있었고, 모니터 화면에는 팀장이 붙여놓은 "이번 주 내로" 라는 메모가 깜빡이고 있었으며, 손목시계는 새벽 두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내 눈앞에 있는 건 회사 천장의 얼룩진 텍스타일 타일이 아니라, 본 적 없는 화려한 몰딩이었다. 금박을 두른 듯한 문양이 천장 가득 새겨져 있었고, 창문으로 들어오는 빛은 형광등이 아니라 진짜 태양광 같았다. 그 순간 나는 내가 죽었거나, 어딘가 굉장히 비싼 요양원에 실려 왔다고 확신했다. '이 정도면 퇴사 위로금으로 장례라도 잘 치러줬나 보네.'
몸을 일으키려는데 이상하게 팔에 힘이 잘 들어가지 않았다. 손끝이 낯설고, 손가락이 지나치게 가늘고, 손톱 모양까지 내 것이 아니라는 걸 깨닫고서야 나는 뭔가 잘못됐다는 걸 알았다. 이불을 걷어내고 두 발을 내려다보니 발목마저 내가 알던 굵기가 아니었다. 협탁 위에 놓인 손거울을 집어 들고 얼굴을 비춰본 순간, 나는 숨을 삼켰다. 대리석을 깎아 만든 조각상처럼 이목구비가 지나치게 정교했고, 은빛에 가까운 금발이 어깨 위로 흘러내렸으며, 회청색 눈동자는 마치 서리 낀 유리창 같았다. 콧대는 조각가가 자를 대고 깎은 것처럼 직선이었고, 입술은 옅은 장밋빛으로 물들어 있어서 마치 화장품 광고 포스터에서 튀어나온 것 같았다. 이 얼굴, 알고 있었다. 정확히는 내가 밤마다 침대에 누워 스마트폰으로 읽었던 로맨스판타지 소설, 그 안에서 남주인공에게 상처만 주고 조용히 퇴장하는 조연 귀족 아가씨의 얼굴이었다.
서지안. 그 이름이 머릿속에 떠오르자마자 나는 이불을 움켜쥐며 '진짜 이런 전개가 나한테 일어난다고?' 하는 실소를 터뜨릴 뻔했다. 원작 속 서지안은 고아 신세로 자라 계모의 손에 엄격하게 길러지고, 왕족 출신 군인공작 이현성과 정략결혼을 하게 되는 인물이었으며, 완벽한 공작부인이 되겠다는 강박관념에 자신을 갈아 넣다가 결국 남편의 무관심과 오해 속에서 조용히 무너져 내리는, 독자들 사이에서 '불쌍하지만 딱히 응원은 안 되는' 캐릭터였다. 나는 그 결말을 알고 있었다. 정확히는 몇 번이나 정주행하면서 '저 여자는 대체 왜 저렇게 자기를 안 챙기나' 하고 답답해했던 기억이 선명했는데, 하필 그 답답한 여자가 되어 눈을 떴다는 사실이 억울하다기보다는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났다. '회사에서 야근하다 죽었으면 그냥 편히 쉬게 해주지, 굳이 여기다 데려다 놓냐.' 나는 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짚으며 이 상황을 받아들이려 애썼지만, 머릿속에서는 이미 원작의 타임라인이 자동으로 재생되고 있었다. 계모의 학대, 정략결혼, 공작저에서의 냉대, 그리고 결말부의 이혼 통보서. 나는 그 모든 걸 알고 있었고, 그게 오히려 더 무서웠다.
방문이 열리는 소리에 나는 재빨리 표정을 정리했다. 원작에서 서지안은 감정을 드러내는 법이 거의 없었고, 그 태도를 만든 사람이 지금 걸어 들어오는 여자라는 걸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문이 열리는 소리만으로도 이 몸의 근육이 저절로 굳는 게 느껴졌다. 마치 상사가 사무실 문을 벌컥 열었을 때의 그 반응과 똑같았다. "일어났으면 인사부터 해야지." 계모라 불리게 될 여자는 문 앞에 서서 팔짱을 낀 채 나를 내려다봤는데, 그 시선이 딱 신입 사원 첫 출근일에 팀장이 훑어보는 눈빛과 똑같아서 나는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켜 앉았다. 등이 침대 헤드보드에서 떨어지기도 전에 허리가 자동으로 곧게 펴지는 걸 느끼면서, 나는 '이 몸, 예의범절이 척추까지 새겨져 있구나' 하고 속으로 감탄했다.
"몸이 안 좋다고 들었는데, 아침 수업은 미룰 수 없다." 여자는 그렇게 말하며 손끝으로 문틀을 두 번 두드렸는데, 그 동작조차 뭔가를 재는 듯한 몸짓이었다. 나는 그 손끝을 보면서 결재 서류에 도장을 찍기 전에 늘 서류 각을 맞추던 우리 부장을 떠올렸다. '어딜 가나 저런 사람이 꼭 하나씩 있구나.' 아침 수업이라는 말에 나는 이 몸의 기억이 슬며시 밀려드는 걸 느꼈다. 예절 교육, 자세 교정, 그리고 식사법. 서지안, 아니 이제는 나이기도 한 이 사람은 매 끼니 음식을 딱 한 입씩만 먹도록 훈련되어 있었는데, 그 이유는 '귀족 숙녀는 식욕을 드러내지 않는다'는 계모의 원칙 때문이었다. 심지어 걷는 속도, 웃는 각도, 시선을 두는 위치까지 정해진 규칙이 있었다는 걸 깨닫자 나는 헛웃음이 나올 뻔했다. 회사에서 사규집을 외우던 시절보다 이쪽이 더 엄격했다. 나는 그 순간 회사 다닐 때 다이어트를 핑계로 점심을 거르곤 했던 나 자신을 떠올리며 '그때도 억지로 굶었는데 여기서도 굶어야 하나' 싶어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식사 자리는 응접실만큼 넓은 별도의 식당에서 이루어졌다. 하얀 식탁보 위에는 은식기가 줄을 맞춰 놓여 있었고, 수프가 담긴 그릇에서 올라오는 김이 얼굴에 닿을 정도로 가까웠는데도 나는 그 냄새를 마음껏 즐길 수가 없었다. 나는 수프에 숟가락을 담갔다가 딱 한 번만 입에 넣고 내려놓았는데, 몸이 이미 그렇게 하도록 훈련되어 있었는지 손끝이 저절로 멈췄다. 숟가락을 내려놓는 손목의 각도까지 정해진 것처럼 자연스러웠다. "잘하고 있구나." 계모가 흡족한 듯 고개를 끄덕이는 걸 보면서 나는 뱃속에서 나는 소리를 필사적으로 무시했다. '한 입 먹고 배부른 척하는 게 무슨 미덕이라고.' 옆에 놓인 빵 접시를 보면서 손을 뻗을까 잠깐 고민했지만, 몸이 알아서 그 유혹을 거부했다. 마치 야근 중에 배가 고파도 상사 앞에서는 도시락을 못 꺼내던 그 감각과 비슷했다.
그러나 이 세계에서 서지안으로 살아남으려면 일단은 이 규칙을 어기지 않는 게 안전하다는 계산이 빠르게 섰다. 원작을 아는 나는 이 결혼이, 그리고 이 억압적인 생활이 결국 서지안을 어디로 끌고 가는지 알고 있었으므로, 지금부터라도 조금씩 다른 선택을 해야 한다는 결심이 마음 깊은 곳에서 스멀스멀 올라왔다. 계모가 식당을 떠난 뒤에도 나는 한동안 식탁에 앉아 숟가락을 만지작거리며, 앞으로 이 몸으로 몇 번의 식사를 더 이렇게 흘려보내야 할지 가늠해봤다. '적어도 굶어 죽지는 말자.' 그것이 내가 이 몸에 들어와서 처음으로 세운, 아주 소박하고 현실적인 목표였다.
그날 오후, 시녀 다혜가 방으로 들어와 실크 리본을 정리하며 조심스레 건넨 한마디가 그 결심에 불을 붙였다. 다혜는 리본 하나하나를 색깔별로 정리하면서도 눈치는 계속 내 쪽을 살피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마치 신입사원이 상사 기분을 살피며 파일을 정리하는 것과 똑 닮아 있었다. "아가씨, 곧 왕도에 나가실 일이 생길 것 같아요." 다혜는 리본을 손에 쥔 채 잠깐 말을 멈췄다가, 목소리를 낮춰 이었다. "후작님께서 혼처 이야기를 꺼내셨다고 들었어요." 나는 그 말을 듣는 순간, 원작의 첫 장면이 코앞까지 다가왔다는 걸 실감하며 손끝이 차갑게 식는 걸 느꼈다. 다혜는 내 표정이 굳는 걸 눈치채지 못한 듯, 리본을 정리하던 손을 멈추고 나를 빤히 바라봤다. "아가씨? 괜찮으세요?" 나는 애써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고개를 끄덕였지만, 머릿속에서는 이미 이현성이라는 이름이 크게 울리고 있었다. 정략결혼, 냉대, 그리고 그 끝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결말까지. 나는 창밖을 바라보며, 이 모든 것이 시작되기 전에 뭔가를 바꿀 수 있을지 스스로에게 묻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