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완벽한 부인, 배고픈 진심

3화

그날 밤, 나는 침대에 누워 낮의 일을 몇 번이나 되짚었다. 캐노피 너머로 스며드는 촛불 그림자가 천장에서 흔들릴 때마다 나는 몸을 뒤척였는데, 아무리 자세를 바꿔도 잠은 오지 않았다. '이현성이 흔한 이름인가?' 이 세계에 떨어진 지 벌써 몇 달째, 원작 소설 속 등장인물들의 이름과 설정을 하나씩 곱씹으며 살아온 나로서는 그 이름 하나가 마음에 걸리는 게 당연했다. 후작가의 몰락한 딸, 서지안. 그리고 원작에서 그녀를 파멸로 이끄는 수많은 조연들 중에, 이현성이라는 이름이 있었던가. 아무리 기억을 뒤져도 확신이 서지 않았다. '너무 오래전에 읽어서 기억이 가물가물한 거겠지.' 나는 애써 그렇게 결론을 내리고 이불을 목까지 끌어올렸지만, 눈은 여전히 감기지 않았다. 다음 날 아침, 다혜에게 세숫물을 받으며 슬쩍 물어보았다. "다혜야, 이현성이라는 이름 흔해?" 다혜는 대야를 내려놓다 말고 고개를 갸웃했다. "글쎄요, 아가씨. 흔하지는 않은 것 같은데요. 왜 그러세요?"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손을 저었지만, 그 대답을 듣는 순간 속에서 뭔가가 조여드는 기분을 느꼈다. 흔하지 않은 이름이라는 건, 그 남자가 정말로 원작 속의 그 인물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뜻이었으니까. 하지만 확인할 방법이 없었다. 무작정 그를 다시 찾아가 "혹시 성함이 무엇이고 가문이 어디인지, 그리고 검을 쓰는 이유가 뭔지 자세히 말씀해주시겠어요?" 라고 캐물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고, 그랬다간 미친 사람 취급을 받을 게 뻔했다. 나는 그저 우연이었을 거라고 스스로를 설득하며 다시 일상으로 돌아갔다. 계모의 아침 수업, 한 입씩만 먹는 식사, 자세 교정 수업이 반복되는 나날이었다. 계모는 매일 아침 정확히 같은 시간에 나를 응접실로 불러 예법을 가르쳤는데, 등을 곧게 펴라, 시선은 아래로 15도만 내려라, 웃을 때 치아가 보이면 안 된다는 식의 지시가 끝도 없이 이어졌다. 식사 시간에도 마찬가지였다. 스프 한 숟갈, 빵 한 조각, 그 이상은 손을 대는 순간 계모의 눈초리가 날아왔고, 나는 배가 고파도 배고픈 티를 낼 수 없었다. '이게 무슨 후작가 딸이야, 수도원 견습 수녀지.' 속으로 투덜거리면서도 나는 조금씩 이 몸에, 이 생활에 익숙해져 갔다. 등을 펴는 것도, 접시 위 음식을 아껴 먹는 것도, 어느새 몸이 먼저 반응했다. 그런데 그 익숙함이 오히려 더 무서웠다. '이대로 가면 진짜 원작대로 되는 거잖아.' 원작 속 서지안의 결말이 어떻게 흘러갔는지 정확히는 기억나지 않았지만, 좋은 쪽으로 끝나지 않았다는 것만은 분명했고, 나는 그 불길한 예감을 애써 밀어내며 매일을 버텼다. 두 번째 만남은 예상보다 빨리 찾아왔다. 계모가 신전에 기부할 물품을 사 오라며 다시 나를 왕도로 내보냈을 때,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저택 밖으로 나갈 수 있는 유일한 핑계가 이런 잔심부름이라는 게 조금 서글프기도 했지만, 그래도 바깥바람을 쐬는 것 자체가 반가웠다. 다혜와 함께 같은 번화가를 걷다가 서점 앞에서 책을 뒤적이는 그 남자를 다시 발견한 순간, 나는 걸음을 멈추고 잠시 숨을 골랐다. '이런 우연이 있나.' 세상이 이렇게 좁을 리가 없는데, 왕도의 인구가 몇만인데 하는 생각이 들면서도, 동시에 이 세계가 원작이라는 큰 흐름 안에서 움직이고 있다면 이런 우연도 우연이 아닐 수 있다는 불안이 함께 밀려왔다. 나는 애써 못 본 척 지나가려 했지만, 그가 먼저 나를 알아보고 고개를 돌렸다. "지안 씨."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나는 걸음을 멈췄고, 다혜는 눈치껏 뒤로 물러나 다른 가게를 구경하는 척했다. 눈치가 빠른 아이라 다행이다 싶으면서도, 이렇게 자연스럽게 자리를 피해주는 게 오히려 나를 더 곤란하게 만든다는 생각이 스쳤다. "또 뵙네요." 나는 최대한 무심한 척 인사했지만, 속으로는 심장이 조금 빠르게 뛰고 있었는데, 그게 반가움인지 경계심인지 스스로도 판단이 서지 않았다. 옷차림을 보니 그는 오늘도 검을 차고 있었고, 어깨에는 흙먼지가 살짝 묻어 있었다. 뭔가 훈련이라도 하고 온 모양이었다. 그는 서점 앞 진열대에서 얇은 시집 한 권을 집어 들며 나에게 내밀었다. "이런 책 좋아하십니까." 시집이라니. 병사 같은 체격에 시집이라는 조합이 너무 어색해서 나는 잠시 웃음이 새어 나오는 걸 참았다. 두꺼운 어깨와 굳은살 박인 손가락으로 얇은 시집 표지를 조심스럽게 쥐고 있는 모습이, 마치 곰이 유리잔을 들고 있는 것 같아서 나는 입가를 손으로 가려야 했다. "글 쓰시는 분이신가 봐요." 내 말에 그가 살짝 시선을 피하며 목덜미를 매만졌는데, 그 사소한 동작에서 나는 이 남자가 생각보다 서투른 사람이라는 걸 짐작했다. 이 정도 체격에 이 정도 분위기라면 어디 가서든 위압적으로 굴 법도 한데, 정작 본인은 시선 하나 제대로 못 마주치고 있다니, 뭔가 반전이 있다면 이런 게 반전이겠지 싶었다. "취미로 조금 씁니다." 그러더니 그는 번뜩 다혜가 사라진 방향을 살피며 물었다. "혼자 다니시기엔 위험한 거리인데, 늘 그렇게 다니십니까." 그 물음에는 걱정이 섞여 있었고, 나는 그 걱정이 낯설어서 순간 대답할 말을 고르지 못했다. 이 세계에 떨어진 이후로 누군가가 나를 진심으로 걱정해준 적이 있었던가. 계모는 내가 예법을 틀릴까 봐 걱정했고, 다혜는 내가 밥을 굶을까 봐 걱정했지만, 이 남자의 걱정은 결이 좀 달랐다. 그냥, 순수하게, 내가 다칠까 봐 하는 걱정 같았다. "저 같은 사람이야 뭐, 크게 위험할 일 없죠." 나는 얼버무리며 웃었는데, 그 대답이 스스로 듣기에도 궁색해서 속으로 혀를 찼다. '저 같은 사람'이라는 말이 이렇게 쉽게 나오다니, 서지안의 몸에 완전히 익숙해졌다는 뜻인지 아니면 그냥 순간적인 방어인지 헷갈렸다. 후작가의 딸이 위험할 일이 없다는 건 사실 거짓말도 아니었다. 왕도 한복판에서 강도를 만날 일은 거의 없었으니까. 다만 내 인생에서 위험한 건 강도가 아니라 계모의 눈초리와 원작의 흐름이라는 게 문제였는데, 그런 걸 설명할 방법은 없었다. 그는 내 대답을 듣고 뭔가 짐작하는 표정을 지었는데, 그 표정에서 나는 그가 나를 평민, 아마도 형편이 넉넉지 않은 평민으로 여기고 있다는 걸 분명히 읽었다. 하긴, 후작가의 딸이 매번 후줄근한 옷을 입고 시녀 한 명만 데리고 시장을 돌아다닐 거라고 누가 생각하겠는가. 나조차도 이 옷차림을 보면 평민이라고 확신할 것 같았다. "혹시 일자리가 필요하십니까. 아는 곳이 있어서 소개해드릴 수도 있는데." 일자리라니. 이 남자는 정말로 나를 생계가 곤란한 아가씨로 오해하고 있었고, 나는 그 오해를 정정할 방법이 없다는 사실에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몰랐다. '이거 어떻게 정정해야 하지. 사실 저는 후작가 딸입니다, 이럴 수도 없고.' 그렇게 말하는 순간 이 남자가 나를 어떻게 볼지도 문제였고, 계모의 귀에 이 만남이 들어가는 것도 더 큰 문제였다. 나는 그냥 괜찮다고 손을 저으며 물러섰고, 그는 더 이상 캐묻지 않고 순순히 물러났는데, 그 담백한 태도가 오히려 마음에 남았다. 보통 이런 상황이면 몇 번 더 권하거나 이유를 캐묻는 게 자연스러운데, 그는 딱 한 번 물어보고 내가 사양하자 바로 다른 이야기로 넘어갔다. 사람을 대하는 방식이 어딘가 조심스럽고, 그러면서도 선을 정확히 지키는 느낌이었다. 다혜가 돌아와 팔짱을 끼며 나를 데리고 갈 때까지, 그는 서점 앞에 서서 우리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몇 번이나 뒤를 돌아보고 싶은 충동을 느꼈지만 애써 참았다. 다혜는 걸으면서 나에게 이것저것 물었다. "아가씨, 저 분이랑 아는 사이세요? 지난번에도 뵀었잖아요." 나는 대충 우연히 만난 사람이라고 둘러댔지만, 다혜는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나를 흘겨보았다. "우연이 두 번이나 겹치면 그게 우연이 아니라 인연 아니에요?" 다혜의 말이 장난처럼 들렸지만, 나는 그 말이 웃기지가 않았다. 인연이라는 말이 이렇게 무겁게 들릴 줄은 몰랐다. 만약 저 남자가 정말로 원작 속 인물이라면, 이건 우연이 아니라 이야기가 나를 그쪽으로 몰아가고 있다는 뜻일 테니까. '설마 저 사람이 원작에서 서지안을 파멸시키는 그 남자는 아니겠지.' 그런 불길한 생각을 애써 떨쳐내며, 나는 걸음을 서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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