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완벽한 부인, 배고픈 진심

2화

왕도 나들이 허락이 떨어진 건 순전히 자수용 실을 사야 한다는 명목 덕분이었는데, 나는 그 핑계가 이렇게 유용할 줄 몰랐다. 후작 부인께 "요즘 자수 실이 다 색이 죽어서 못 쓰겠어요"라고 며칠을 걸쳐 흘려두었더니, 정작 허락은 어이없을 만큼 쉽게 떨어졌다. '역시 귀족 여자의 취미 생활만큼 안전한 명분이 없구나.' 나는 마차에 오르면서도 이게 진짜 통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아서 몇 번이나 다혜의 눈치를 살폈다. 다혜는 그런 나를 보며 어깨를 으쓱했는데, 마치 "이 정도는 기본이죠"라고 말하는 것 같은 표정이었다. 마차가 왕도의 성문을 지나 번화가로 접어드는 동안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이 점점 촘촘해졌다. 좁은 길가에 늘어선 건물들, 지붕 위로 걸린 빨래들, 짐을 진 채 뛰어가는 소년들. 그리고 마차에서 내려 그 한가운데로 발을 디딘 순간, 향신료 냄새와 마부의 외침, 좌판 위에 쌓인 과일들이 한꺼번에 밀려들었고, 나는 이 세계에 온 이후 처음으로 '살아 있는 도시'라는 감각을 느꼈다. '회사 앞 재래시장이랑 묘하게 비슷하네.' 심지어 어디선가 생선 비린내까지 섞여 들어오는 게, 이게 다른 세계 왕도인지 우리 동네 시장인지 헷갈릴 지경이었다. 다만 여기는 좌판 주인들이 죄다 억양이 이상한 사투리를 쓴다는 게 유일한 차이였다. 다혜는 실 가게로 먼저 들어가겠다며 나를 잠시 혼자 세워두고는 손을 흔들었다. "지안 아가씨, 여기 서 계세요. 저 눈치껏 흥정하고 올게요." "흥정을 왜 나 몰래 하는 거야?" "아가씨가 계시면 다들 값을 두 배로 부르니까요." 그 말에 딱히 반박할 말이 없어서 나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고, 다혜는 사람들 사이로 순식간에 사라졌다. 나는 그 틈에 눈에 띄는 은장식을 떼어내 소매 안쪽에 쑤셔 넣고, 다혜가 챙겨온 낡은 겉옷을 걸쳐 입어 신분을 지워버렸다. 옷을 갈아입는 그 몇 초 동안 내가 얼마나 후련했는지, 아마 다혜는 짐작도 못 할 것이다. 후작가의 딸이라는 티를 벗어던지면, 잠깐이라도 서지안이 아니라 그냥 나로 있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겉옷 하나 걸쳤을 뿐인데 시선이 달라지는 게 느껴졌다. 아까까지 나를 힐끔거리던 좌판 상인들이 이제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이게 이렇게 편할 일인가.' 나는 그 해방감에 취해서 좌판 사이를 어슬렁거리며 걸었다. 말린 과일을 파는 노점, 헌 책을 쌓아둔 수레, 목걸이며 반지를 늘어놓은 좌판까지 구경하다가, 나는 노점 주인과 시비가 붙은 남자를 발견했는데, 정확히는 그 남자가 시비의 대상이었다. "이 가격에는 못 팝니다." 노점 주인이 팔짱을 끼고 단호하게 말했다. 목소리가 크고 억센 게, 협상의 여지가 조금도 없다는 티를 온몸으로 내고 있었다. 남자는 동전 몇 개를 세어 보이며 한숨을 쉬었다. "그럼 이만큼은 되겠습니까." 그가 다시 손을 펼쳐 동전을 보여주는데, 개수를 세는 손짓이 지나치게 어색해서 나는 저절로 웃음이 나올 뻔했다. '저 손, 평생 돈 세본 적 없는 손 같은데.' 그 목소리가 낮고 담담해서 나는 저절로 시선이 그쪽으로 향했다. 키가 크고 어깨가 넓은 남자였는데, 회색 로브를 걸치고 있었지만 그 아래로 드러난 자세만큼은 병사처럼 곧았다. 얼굴은 조각가가 밤새 깎아 만든 것처럼 선이 뚜렷했고, 짙은 흑발 아래 눈동자가 유난히 침착했으며, 콧날은 마치 대리석에서 방금 떠낸 것처럼 반듯했다. 저런 얼굴을 하고 흥정에서 밀리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부조리해 보일 정도였다. '저 얼굴로 시장에서 흥정 실패라니. 세상 참 불공평하네.' 나는 웬일인지 그 상황이 안타까워서 몸이 먼저 움직였다. "저기, 제가 좀 더 낼게요." 나는 주머니에서 몰래 챙겨온 동전을 꺼내며 노점 주인에게 내밀었다. 주인은 눈을 크게 뜨고 나와 남자를 번갈아 보더니, 이내 흡족한 표정으로 물건을 건넸다. "역시 아가씨 같은 분이 계셔야 장사가 되지." 그 말에 남자보다 내가 더 당황했는데, 딱히 대답할 말이 없어서 그냥 어색하게 웃고 물건을 남자 쪽으로 밀었다. 남자는 뜻밖의 도움에 잠시 멈춰 서서 나를 바라봤는데, 그 시선이 너무 곧아서 나는 순간 뺨이 달아오르는 걸 느끼며 시선을 슬쩍 피했다. '뭘 그렇게 똑바로 봐, 사람 부담스럽게.' "갚아야 할 것 같은데." 그가 낮게 말하며 손을 내밀었다. 나는 급하게 손을 저으며 괜찮다고 둘러댔다. "이 정도는 그냥, 지나가다 도와드린 거예요." "그래도." "정말요. 저도 흥정 실패한 적 많거든요." 마지막 말은 순전히 그의 민망함을 덜어주려고 지어낸 거짓말이었는데, 뜻밖에도 효과가 있었는지 그가 조금 낮게 웃었다. 그 웃음이 어딘가 낯설고 서투른 느낌이라서, 이 사람이 평소에 잘 웃지 않는 부류라는 걸 짐작할 수 있었다. 마치 웃는 근육을 오랫동안 안 쓴 사람이 억지로 움직이는 것 같은, 그런 웃음이었다. "이름이라도 알려주면 안 되겠습니까." 그 물음이 뜻밖에 정중해서 나는 잠깐 말을 골랐다. 이름을 말해야 하나 고민하던 나는 순간적으로 성을 떼고 이름만 뱉었다. "지안이라고 해요." 성 없이 이름만 대답하는 순간, 나는 이 남자가 나를 그저 평민 아가씨로 여길 거라는 걸 계산했고, 실제로 그의 표정에서 그런 짐작이 스치는 걸 놓치지 않았다. '좋아, 완벽하게 속였어.' 나는 속으로 은근히 만족스러워했다. 후작가의 딸이 시장 바닥에서 낯선 남자에게 동전 몇 개 던져줬다는 소문이 나면, 어머니가 뒷목을 잡고 쓰러질 게 뻔했으니까. "현성이라고 합니다." 그가 짧게 자기 이름을 밝히며 물건을 받아 옷 속에 챙겨 넣었다. 딱 그 순간, 나는 그 이름을 듣는 순간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현성. 원작 남주인공 이현성의 이름이 이렇게 우연히, 이렇게 허름한 로브를 걸친 남자의 입에서 나올 수는 없다고 생각했지만, 동시에 세상에 흔한 이름일 수도 있다는 가능성이 머릿속에서 서로 부딪혔다. '설마, 아니겠지. 공작이 이런 데서 흥정을 하겠어. 흥정에서 지는 공작이라니, 그런 설정은 원작에도 없었잖아.' 나는 애써 그 가능성을 지워버리려고 애썼지만, 눈은 자꾸만 그의 손등이며 목덜미며 자세를 훑고 있었다. 병사처럼 곧은 그 자세가, 하필 원작 묘사와 이상하게 겹쳐 보였다. "그, 흥정하시던 물건은 뭐였어요?" 나는 애써 화제를 돌리려고 물었는데, 그는 살짝 시선을 내리며 대답을 피했다. "별거 아닙니다." 그 말투가 어딘가 방어적으로 들려서, 나는 더 캐묻지 않기로 했다. 낯선 남자의 사연을 파고드는 것도 이상하고, 무엇보다 이 이상 대화를 끌면 다혜가 찾으러 나올 것 같았다. "지안 아가씨! 여기 계셨어요?" 멀리서 다혜가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고, 나는 그 틈에 몸을 돌렸다. "그럼 저는 이만." 인사를 하는 등 뒤로, 그가 짧게 대답했다. "지안 씨, 여기서 만나서 다행이었습니다." 뒤에서 들려온 그 인사말이 이상하게 오래도록 귓가에 남았다. 나는 실 가게로 돌아가는 내내 그 목소리를 곱씹었는데, 담담한 어조 속에 뭔가 무게가 있는 것 같아서 자꾸만 신경이 쓰였다. "뭐 하다 오셨어요, 얼굴이 왜 그렇게 빨개요?" 다혜가 실 뭉치를 한가득 안고 나오며 묻는 말에, 나는 괜히 손사래를 쳤다. "날이 더워서 그래." "지금 겨울인데요." 다혜의 그 한마디에 나는 아무 말도 못 하고 그냥 걸음을 서둘렀다. 마차가 세워진 쪽으로 돌아가는 길, 나는 자꾸 뒤를 돌아보았지만 회색 로브를 걸친 남자는 어느새 인파 속으로 사라진 뒤였다. '흔한 이름이야. 그냥 흔한 이름.' 나는 몇 번이나 그렇게 되뇌었지만, 어쩐지 그 말이 나 자신조차 완전히 설득하지 못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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