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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세 번째 마주침은 순전히 우연이라고 부르기엔 지나치게 잦았다. 계모의 심부름, 다혜의 부탁, 그리고 신전 봉사 일정까지 겹치면서 나는 그 한 달 사이에 왕도를 세 번이나 더 드나들었고, 그중 두 번은 어김없이 그 남자, 현성과 마주쳤다. 처음엔 포목점 앞에서였다. 계모가 시킨 대로 겨울 예복에 쓸 옷감을 고르러 갔다가 마차에서 내리는 그를 보았는데, 그는 나를 알아보자마자 반가운 얼굴로 손을 들었고 나는 그 반가움의 온도가 지나치게 따뜻해서 오히려 뒷걸음질을 치고 싶었다. 두 번째는 다혜가 부탁한 약재를 사러 시장 골목을 지나던 중이었는데, 그때는 멀리서 마주 오는 것만 보고 나는 슬쩍 옆길로 새는 데 성공했다. '피할 수 있으면 피하는 게 정답이다.' 나는 원작을 읽었기에 이현성이라는 이름이 이 이야기에서 얼마나 무거운 자리를 차지하는지 알고 있었고, 그래서 '운명'이라는 단어를 떠올릴 때마다 스스로에게 코웃음을 쳤다. 이 정도면 우연이 아니라 운명이라고 해야 하나, 하는 생각이 스칠 때마다 나는 그 생각을 도끼로 쪼개듯 부수어 버렸다. 하지만 매번 마주칠 때마다 그는 나를 알아보고 먼저 다가왔고, 나는 그 익숙한 인사에 조금씩 마음이 풀어지는 걸 느끼며 이게 위험한 신호라는 걸 애써 무시했다. 그날은 신전 앞 광장에서였다. 하늘이 유난히 낮게 내려앉아서 곧 비가 올 듯한 날이었는데, 나는 봉사 활동으로 노숙자들에게 죽을 나눠주고 있었다. 국자를 젓는 손목이 시큰거릴 때쯤, 문득 줄 끝에서 죽을 받아 든 그가 보였다. 로브를 걸치고 있었지만 신발만큼은 값비싼 가죽으로 만들어진 것이었고, 나는 그 부조화를 눈치채면서도 굳이 캐묻지 않았다. '귀족 나부랭이가 변장을 한다고 발끝까지 신경 쓰는 건 아니었나 보네.' 속으로 그렇게 비아냥거리면서도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을 유지하는 게 요즘 나의 특기였다. "여기서도 뵙네요." 나는 국자를 든 채 웃으며 인사했고, 그는 죽 그릇을 들고 잠시 머뭇거리다가 물었다. "이런 일까지 하십니까." 그의 목소리에 놀라움이 섞여 있어서 나는 살짝 어깨를 으쓱했다. "이런 일 정도는 해야죠." 실제로 서지안의 몸이 기억하는 봉사 일정은 계모가 만들어놓은 사교용 이력이었지만, 나는 그 사실을 밝히지 않고 그냥 웃어넘겼다. 줄이 조금씩 줄어들고 광장의 소음이 낮아질 때쯤, 그는 그릇을 든 채로도 자리를 뜨지 않고 내 옆에 서 있었다. 다른 참가자들이 힐끗거리는 시선이 느껴졌지만 그는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그가 죽을 한 입 떠먹더니 나를 보며 물었다. "지안 씨는 식사를 제대로 하십니까." 갑작스러운 질문에 나는 순간 당황했는데, 하필 그날도 나는 아침에 수프 한 입, 빵 반쪽만 먹고 나온 상태였다. 위장이 그 순간을 노린 듯 작게 꾸르륵거려서 나는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하필 지금.' "왜 그런 걸 물으세요." 나는 얼버무리려 했지만, 그는 진지한 얼굴로 대답했다. "얼굴이 자꾸 야위어 보여서." 그 말에 나는 뭔가 뜨거운 게 목 안쪽에서 올라오는 걸 느꼈는데, 지금까지 아무도 그렇게 물어봐 준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계모는 늘 '식욕을 드러내지 말라'고 가르쳤지, '제대로 먹었느냐'고 물어본 적은 없었다. 심지어 다혜조차 내 끼니를 챙길 때는 걱정보다는 업무적인 태도가 앞섰다. 그런데 이 남자는, 이 낯선 로브 차림의 남자는 아무 이유 없이 내 얼굴빛 하나를 신경 쓰고 있었다. '이 남자, 진짜 이상한 사람이네.' 나는 애써 목소리를 가볍게 했다. "저는 원래 소식이에요." 그러자 그는 그 대답을 곧이곧대로 믿는 눈치였는데,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그렇습니까" 하고 중얼거리는 모습이 어쩐지 안심한 듯 보이기도 했다. 나는 그때는 몰랐지만 그 대답이 나중에 얼마나 큰 오해의 씨앗이 될지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그저 그 순간엔 국자를 다시 죽통에 담그며 다음 사람에게 그릇을 받는 일에만 집중했을 뿐이었다. 그가 자리를 뜨기 전에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 있었다. "제가 그렇게 무서운 사람은 아닌데, 자꾸 지안 씨가 저를 경계하시는 것 같아 서운합니다." 그 말투가 어딘가 익숙해서 나는 하마터면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원작 속 이현성이 부하들 앞에서 습관처럼 쓰던 말투와 똑같았기 때문이었다. '내가 그렇게 -는 아닌데'라는 자기 정당화 화법. 원작에서 그는 부하가 실수를 저질러도 그 말을 먼저 꺼내고서야 벌을 내렸다고 했다. 지금 이 순간, 그 말이 나를 향해 나온다는 사실이 어딘가 소름 끼치면서도 우스웠다. '당신, 지금 나한테 그 대사를 쓴 거예요?' 나는 그 순간 등줄기가 서늘해지면서도 애써 태연한 척 손을 흔들며 그를 배웅했다. 그의 뒷모습이 로브 자락을 휘날리며 광장을 벗어나는 걸 지켜보는데, 값비싼 가죽신이 흙바닥을 밟는 소리마저 유난히 크게 들리는 것 같았다. 다혜가 다가와 슬쩍 귀엣말을 건넸다. "아가씨, 저분 자꾸 마주치시네요. 인연인가 봐요." 다혜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눈을 반짝이며 짓궂은 웃음을 지었는데, 마치 재미있는 구경거리를 발견한 사람의 표정이었다. 나는 그 말에 대답 대신 미소만 지었지만, 속으로는 심장이 쿵쿵 뛰고 있었다. "인연은 무슨, 그냥 자꾸 겹치는 거지." 나는 국자를 죽통 안에 탁 소리 나게 내려놓으며 애써 화제를 돌렸지만, 다혜는 눈치가 빠른 아이라 내 목소리 끝이 살짝 떨렸다는 걸 알아챘을지도 모른다. 인연이라는 말이, 이번만큼은 그저 좋은 뜻으로만 들리지 않았다. 원작에서 '인연'이라는 단어가 등장할 때마다 뒤이어 벌어지는 사건들을 나는 이미 알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그 사건들 중 어느 것도 서지안이라는 조연에게 좋게 끝난 적은 없었다. 돌아오는 마차 안에서 나는 창밖으로 지나가는 왕도의 풍경을 멍하니 바라보며 생각했다. 이대로 계속 마주친다면, 나는 언젠가 이현성이라는 인물이 원작에서 정말로 어떤 존재였는지, 그가 왜 그렇게 위험한 화법을 몸에 익히게 되었는지를 직접 목격하게 될지도 몰랐다. 그리고 그 순간이 오기 전에, 나는 이 어설픈 호감을 어떻게든 정리해 두어야 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알고 있었지만, 마차가 흔들릴 때마다 죽 그릇을 들고 머뭇거리던 그의 얼굴이 자꾸만 눈앞에 떠올랐다는 걸 부정할 수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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