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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그로부터 며칠 뒤, 후작가 저택으로 후작님이 직접 서신을 보내왔다는 소식이 전해졌을 때, 나는 이미 이 이야기가 어디로 흘러가고 있는지 알고 있었기에 손끝이 차갑게 식는 걸 느꼈다. 원작 속에서 딱 이 시점에 이런 서신이 왔었다는 걸 기억하고 있었으니까. '올 게 왔구나.' 하필 그날은 유독 날이 흐려서, 창밖으로 보이는 하늘이 마치 내 속을 대변하듯 잔뜩 찌푸려 있었다. 계모는 서신을 받아 든 채 표정이 굳어졌는데, 그 표정만 봐도 좋은 소식이 아니라는 걸 짐작할 수 있었다. 손톱으로 서신 봉투 끝을 톡톡 두드리는 버릇이 있는 사람인데, 그 소리가 방 안에 유난히 크게 울렸다. "후작님께서 혼처를 확정하셨다고 하는구나." 계모의 목소리에는 못마땅함이 짙게 배어 있었다. "이렇게 급하게 진행할 필요가 있었는지 모르겠는데. 지안이 아직 사교계 예법도 제대로 못 익혔는데, 이래서야 후작가의 얼굴에 먹칠하는 게 아니냐고." 계모는 말끝마다 나를 향한 은근한 흠집 내기를 잊지 않았고, 나는 그 말을 들으며 원작에서도 계모가 이 결혼을 반대했다는 대목을 떠올렸다. '이 부분도 원작이랑 똑같이 가네.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아니면 이럴 때만 예언자가 되는 게 서글프다고 해야 하나.' 그러나 계모의 반대와는 별개로, 후작은 이미 결정을 내렸다는 소식이 이어졌다. 시녀 하나가 소식을 보태며 후작님이 서재에서 밤새 서신을 쓰셨다는 이야기까지 슬쩍 흘렸는데,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이게 얼마나 위에서부터 내리꽂힌 결정인지 실감했다. 계모가 아무리 못마땅해해도, 가주의 결정 앞에서는 그저 못마땅한 얼굴로 서신을 접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상대는 이현성 공작이시다." 계모의 입에서 그 이름이 나오는 순간, 나는 숨이 턱 막혔다. 이현성. 시장에서, 서점에서, 신전 광장에서 몇 번이나 마주쳤던 그 이름. 손에 쥐고 있던 찻잔이 미끄러질 것 같아 나는 무릎 위로 슬며시 내려놓았다. '설마, 진짜, 그 사람이었어?' 세상에 이현성이라는 이름이 흔하지 않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마지막까지 다른 사람이길 바라는 헛된 기대를 품었던 모양이었다. 그 기대가 지금 산산조각 나는 소리가 귓가에 들리는 것 같았다. 나는 애써 표정을 관리하려 했지만 손끝이 떨리는 것까지는 숨길 수 없었다. 무릎 위에 얹은 손을 슬쩍 옷자락 아래로 숨기며, 나는 숨을 천천히 내뱉었다. 계모는 내 반응을 눈치채지 못한 채 계속 말을 이었다. "왕족 출신 군인공작이시고, 북방에서 큰 공을 세우셨다고 들었다. 후작님이 국경 방어를 위해 이 결혼을 서두르신 모양이야. 정략이라는 거지, 뭐 다를 게 있겠니." 계모는 마치 남의 일처럼 심드렁하게 말했지만, 그 말속에는 이 결혼이 나에게 유리할 게 없다는 은근한 힐난이 섞여 있었다. 국경 방어라는 말에서 나는 아버지가 이 결혼을 정치적 계산으로 결정했다는 원작의 설정을 새삼 확인했고, 그 계산 속에서 내 감정 따위는 애초에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는 사실이 씁쓸하게 다가왔다. '내 의견을 물어본 적도 없으면서, 이제 와서 상견례 자리에 얌전히 앉아 있으라는 거지.' 후작가의 딸이라는 자리가 이렇게 무게감 있는 건 줄은, 서지안으로 살아온 지 얼마 안 된 나로서는 실감하기 어려운 부분이었다. 그래도 몸에 밴 예법과는 별개로, 감정은 하나도 익숙해지지 않은 채 그대로 나에게 쌓였다. 다혜가 방으로 들어와 소식을 전할 때는 이미 저녁이었다. 창밖으로 노을이 붉게 번지고 있었고, 그 색이 마치 불길한 전조처럼 방 안까지 스며드는 느낌이었다. "아가씨, 정식으로 발표되기 전에 상견례가 먼저 있을 거라고 해요." 다혜는 촛불을 켜며 별일 아니라는 듯 가볍게 말했지만, 나에게는 그 한마디가 천둥처럼 크게 들렸다. 상견례라는 말에 나는 심장이 내려앉았다. 지금까지 신분을 숨긴 채 만나왔던 그 남자를, 이번에는 정식으로, 서지안이라는 이름과 후작가의 딸이라는 신분을 걸고 마주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이거 완전 사고 현장이잖아.' 나는 침대에 걸터앉아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그동안의 만남을 하나씩 되짚었다. 시장에서의 흥정. 그가 배춧값을 깎아주지 않겠다고 버티던 상인 앞에서 슬쩍 은화 하나를 더 얹어주며 나를 쳐다보던 눈빛. 서점 앞의 시집. 낡은 표지의 시집을 내가 아쉬운 눈으로 바라보자, 다음에 만났을 때 그가 아무렇지 않게 그 책을 내밀었던 순간. 신전 광장에서의 죽 한 그릇. 추운 날씨에 손을 녹이며 나눠 먹던 죽이 유난히 따뜻했던 기억. 그 모든 순간에 나는 지안이라는 이름만 밝히고 성을 감췄고, 그는 나를 형편이 어려운 평민 아가씨로 여겼다. 심지어 한번은 옷차림이 허름하다며 자신의 외투를 벗어 걸쳐준 적도 있었는데, 그때 나는 그 배려가 부담스러워서 극구 사양했던 기억까지 났다. '그 사람 눈에는 내가 딱 불쌍한 평민 처녀였겠지.' 이제 와서 그 오해를 어떻게 풀어야 할지, 아니 풀어야 하는 게 맞는지조차 판단이 서지 않았다. 만약 상견례 자리에서 내가 서지안이라는 걸 알게 된다면, 그는 그동안의 만남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순수한 호의로 받아들일까, 아니면 신분을 속인 것에 대한 배신감으로 받아들일까. 후자라면, 상견례가 시작되기도 전에 이 결혼은 파국을 맞을 수도 있었다. '아니 근데 나는 딱히 속이려고 속인 게 아니라, 그냥 물어보지 않아서 안 알려준 거잖아. 이게 죄가 되나?' 스스로에게 던진 질문에도 딱히 답이 나오지 않았다. 다혜는 내 표정을 살피며 조심스레 물었다. "아가씨, 안색이 안 좋으세요. 걱정되시는 거예요?" 다혜의 손이 내 어깨를 조심스레 짚었는데, 그 온기가 오히려 더 불안하게 만들었다. 나는 뭐라 대답해야 할지 몰라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그냥… 처음 뵙는 자리니까." 겨우 그렇게 둘러댔지만, 다혜는 그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는 눈치였다. 걱정되는 건 사실이었지만, 그 걱정의 종류가 다혜가 짐작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방향이었다. 다혜는 내가 낯선 남자 앞에서 얌전한 숙녀 노릇을 해야 하는 부담감을 걱정하는 거라고 생각하는 듯했지만, 실상은 그보다 훨씬 복잡하고 훨씬 위태로운 문제였다. 상견례 자리에서 내 얼굴을 본 그가 나를 알아볼까, 아니면 알아보지 못한 채로 지나갈까, 그리고 만약 알아본다면 그동안의 오해는 어느 쪽으로 굴러갈까. '차라리 못 알아보는 게 나을까, 아니면 알아보고 웃어넘기는 게 나을까.' 어느 쪽이든 위험 부담이 있었다. 못 알아본다면 그건 또 다른 종류의 서운함으로 남을 것 같았고, 알아본다면 그동안의 만남이 전부 계산된 접근이었다고 오해받을 여지가 있었다. 원작에서는 이런 사전 만남 같은 설정이 없었기에, 나는 이 순간부터 이야기가 내가 아는 결말과는 다른 방향으로 틀어질 수도 있다는 예감이 들었다. 다혜가 방을 나서고 홀로 남은 방 안에서, 나는 촛불 하나만 켠 채로 오래 앉아 있었다. 창밖으로 저물어가는 해가 마지막 붉은빛을 방 안 깊숙이까지 밀어 넣고 있었고, 그 빛이 사그라들수록 내 마음도 함께 어두워지는 것 같았다. 그 예감이 희망인지 불안인지, 창밖으로 저무는 해를 바라보며 나는 오래도록 판단을 내리지 못했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상견례 날짜가 다가올수록, 나는 이 결혼이 단순한 정략혼으로 끝나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점점 커지고 있었다는 것. 그리고 그 확신의 끝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게 무엇인지, 나는 아직 알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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