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게임 화면에 빨간 글자가 떴다.
"DEFEAT"
나는 마우스를 놓고 뒤로 기댔다.
의자가 삐걱거리는 소리를 냈다.
헤드셋 너머로 마지막 타워가 무너지는 이펙트음이 울렸다.
화면 가득 붉은 글씨가 깜빡였다.
"야, 김도윤."
태민이 내 어깨를 툭 쳤다.
입꼬리가 이상하게 올라가 있었다.
그 웃음이 낯설었다.
뭔가 잘못됐다는 직감이 등줄기를 타고 올라왔다.
"뭐."
"내기 기억하지."
기억한다.
지난주에 태민이 먼저 꺼낸 말이었다.
마지막 판에서 지는 쪽이 좋아하는 애한테 고백하는 거.
그때는 웃으면서 오케이 했다.
어차피 안 질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절대 안 져.'
그 말을 했던 게 불과 일주일 전이었다.
그런데 지금 화면에는 DEFEAT라는 글자가 선명하게 떠 있었다.
운이 나빴다고 하기엔, 마지막 한타에서 내가 스킬을 잘못 눌렀다.
그 순간이 자꾸 머릿속에서 리플레이됐다.
"설마 진짜로 하라는 거 아니지."
"진짜로 하라는 거야."
태민이 팔짱을 끼고 나를 내려다봤다.
키는 나보다 반 뼘 작은데 이럴 때만 유독 위압적으로 느껴졌다.
방 안의 조명이 태민의 얼굴 절반에만 그림자를 만들었다.
그게 더 이상하게 보였다.
"장난이잖아, 그냥 게임하다 나온 말이잖아."
"녹음했어."
핸드폰을 흔들어 보이는 태민의 손짓에, 나는 말을 잃었다.
녹음이라니.
이 자식은 언제부터 이런 걸 준비한 거지.
핸드폰 화면에는 재생 시간이 표시된 음성 파일 아이콘이 떠 있었다.
파일명까지 붙어 있었다.
'도윤이 고백 약속'.
소름이 끼쳤다.
"이걸 언제 켠 거야."
"내기 얘기 나올 때부터."
"미리 켜놓고 있었다는 거잖아."
"응."
태민은 당연하다는 듯 대답했다.
그 담담함이 오히려 더 무서웠다.
"내가 언제 좋아하는 애 있다고 말한 적 없잖아."
"있어."
단호했다.
너무 단호해서 반박할 틈이 없었다.
"누구."
"몰라서 물어?"
나는 정말 몰랐다.
아니, 몰랐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태민의 눈빛이 뭔가를 확신하고 있었다.
소름이 돋았다.
확신에 찬 눈빛 앞에서 나는 자꾸만 말을 더듬었다.
"설마 서윤이라고 하려는 거면."
입 밖으로 그 이름을 꺼내자마자 심장이 쿵, 소리를 냈다.
왜 하필 그 이름이 먼저 나왔을까.
생각할 틈도 없이 태민이 손가락을 튕겼다.
"정답."
방 안의 공기가 얼어붙는 것 같았다.
이서윤.
한빛고 전체가 다 아는 이름.
2학년 3반, 전교 1등, 배구부 주장, 얼굴은 연예인급이라는 소문까지 있는 애.
남학생들 사이에서는 거의 여신급으로 불렸다.
급식실에서 그 애가 지나가면 줄 서 있던 애들이 다 고개를 돌린다는 얘기도 들었다.
그런데 왜 내가 그 애를 좋아한다는 결론이 나온 건지 전혀 알 수 없었다.
"내가 언제 서윤이 좋다고 그랬어."
"말은 안 했지만 다 보여."
"뭐가 보여."
"수업 시간에 걔 뒤통수만 뚫어져라 쳐다보잖아."
그건 사실이었다.
서윤은 내 앞자리에 앉는다.
앞자리에 앉은 애를 쳐다보는 게 이상한 일인가.
아니, 이상한 일이었다.
남들은 앞자리 애를 그렇게 오래 쳐다보지 않는다는 걸 나도 알고 있었다.
수업 시간마다 내 시선이 저절로 그 애 뒤통수로 향한다는 것도, 사실은 알고 있었다.
서윤의 머리카락이 창문 빛을 받아 반짝일 때, 나는 필기를 멈추고 그걸 쳐다본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건 그냥···."
말이 이어지지 않았다.
태민이 눈을 가늘게 떴다.
"거봐."
"그게 왜 좋아하는 증거가 돼."
"그럼 반박해봐."
반박할 말이 없었다.
나는 아무 말도 못 하고 시선을 돌렸다.
창밖으로 해가 지고 있었다.
주황빛이 방 안으로 스며들어 태민의 얼굴을 반쯤 물들였다.
웃는 얼굴인데 웃는 게 아니었다.
뭔가를 즐기고 있는 얼굴이었다.
"태민아, 진짜로."
"뭐."
"이거 진심으로 하는 말이야?"
"내일 등교하면 고백해."
"내일?"
"내일 아니면 이 녹음 반 애들한테 다 뿌린다."
협박이었다.
명백한 협박이었다.
나는 마우스를 다시 잡았다가 놓았다.
손끝이 떨렸다.
모니터 불빛만이 방을 밝히고 있었고, 그 불빛 아래서 내 손가락이 유난히 하얗게 보였다.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건데."
태민의 표정이 잠깐 굳었다.
웃음기가 사라진 얼굴이 오히려 더 낯설었다.
잠깐 정적이 흘렀다.
그 정적이 길게 느껴졌다.
"나도 예전에 걔한테 고백했다가 차였거든."
예상치 못한 말이었다.
태민이 서윤을 좋아했었다니.
언제였을까.
중학교 때? 아니면 고등학교 입학하고 나서?
그런데 그게 왜 나한테 벌칙으로 이어지는지는 여전히 이해가 안 됐다.
"언제."
"1학년 때. 알 필요 없어."
"그러면 왜 나한테···."
"넌 다를 것 같아서."
그 말을 하고 태민은 다시 웃었다.
뭔가 알고 있는 사람의 웃음이었다.
나는 그 웃음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다르다는 게 뭔데."
"몰라도 돼."
태민은 더 이상 설명하지 않았다.
캐묻고 싶었지만, 그 눈빛을 보니 더 물어봐도 대답이 나올 것 같지 않았다.
"어쨌든 내일이야."
"태민아."
"등교하자마자."
"잠깐만, 얘기 좀 더 해보자."
"할 얘기 없어."
태민이 자리에서 일어나 가방을 챙겼다.
지퍼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가방끈을 어깨에 걸치면서 태민은 방문 쪽으로 걸어갔다.
나는 여전히 의자에 앉아 화면을 보고 있었다.
DEFEAT라는 글자가 아직도 떠 있었다.
그 글자를 보다가, 나는 조용히 중얼거렸다.
"망했다."
태민이 문을 열다 말고 고개를 돌렸다.
"뭐가 망해. 잘될 거야."
"뭘 근거로."
"직감."
말도 안 되는 대답이었다.
직감이라는 두 글자로 사람 인생을 이렇게 흔들어놔도 되는 건가.
나는 그 말에 대꾸도 하지 못하고 태민이 나가는 뒷모습만 쳐다봤다.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가 유독 크게 울렸다.
혼자 남은 방은 조용했다.
모니터 불빛만이 깜빡이고 있었다.
나는 한동안 그 자리에 앉아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DEFEAT라는 글자를 몇 번이나 다시 읽었는지 모른다.
그러다 겨우 컴퓨터를 끄고 침대로 기어들어갔다.
천장을 보며 서윤의 얼굴을 떠올렸다.
앞자리에 앉은 뒤통수, 가끔 뒤돌아볼 때 마주치는 눈, 웃을 때 살짝 올라가는 입꼬리.
생각해보니 나는 그 애를 꽤 오래 쳐다봤던 것 같았다.
왜 그랬는지는 나조차 몰랐다.
'수업 끝나고 저기 필기 좀 보여줄 수 있어?'
언젠가 서윤이 나한테 건넨 말이었다.
그때 나는 뭐라고 대답했는지 기억도 안 났다.
그저 심장이 이상하게 빨리 뛰었던 것만 기억났다.
그게 언제였더라.
3월이었나, 4월이었나.
계절도 헷갈릴 만큼 오래된 기억인데 그 장면만은 이상하게 선명했다.
창밖에서 바람 소리가 들렸다.
나는 이불을 머리까지 뒤집어썼다.
이불 속은 더웠고 숨이 조금 막혔지만 그래도 나오고 싶지 않았다.
내일 아침, 등교하자마자 고백을 해야 한다.
그 상대는 전교생이 다 아는 미녀 이서윤이다.
거절당할 게 뻔했다.
거절당한 뒤에 남을 시선들도 뻔했다.
교실 전체가 나를 쳐다보고, 누군가는 웃고, 누군가는 수군거리고.
그 장면들이 눈앞에 생생하게 그려졌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심장이 계속 뛰었다.
두려움 때문인지, 다른 이유 때문인지 구분이 안 갔다.
이불 속에서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다.
어둠 속에서도 서윤의 얼굴이 자꾸 떠올랐다.
잠들기는 글렀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 생각대로, 나는 창밖이 희미하게 밝아올 때까지 한숨도 자지 못했다.
핸드폰 알람이 울리기 오 분 전, 나는 이미 눈을 뜨고 천장을 보고 있었다.
오늘 안에 이 모든 게 끝날 거라는 걸 알면서도, 어떻게 끝날지는 전혀 예상할 수 없었다.
가슴 한쪽이 답답했다.
등교 준비를 하는 손이 평소보다 느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