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 ›옥상으로 올라가는 계단은 유난히 길게 느껴졌다.
한 칸, 한 칸 밟을 때마다 심장이 먼저 도착해서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
태민이 앞장서서 올라가다가 문득 걸음을 멈추고 나를 돌아봤다.
"너 지금 얼굴이 백지장이야."
"알아."
"진짜 할 수 있겠어?"
"못 하면 여기까지 온 게 다 뭐가 돼."
태민이 어깨를 툭 치고는 다시 앞서 걸었다.
그 손길이 무심한 듯했지만, 이상하게 힘이 됐다.
옥상 문을 열자 찬바람이 얼굴을 때렸다.
하늘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서윤은 아직 오지 않았다.
나는 난간 근처에 서서 손끝을 문질렀다.
계속 떨렸다.
바람이 불 때마다 옷깃이 흔들렸고, 그 소리마저 크게 들렸다.
멀리서 운동장 스피커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오다가 곧 끊겼다.
학교 전체가 하루를 마무리하는 시간이었다.
나만 아직 시작도 못 한 것 같았다.
"진짜 온다는 거지."
태민이 계단 입구에서 고개만 내밀고 물었다.
"온다고 했어."
"몇 시에 온다고 했는데."
"그냥, 곧."
"곧이 도대체 몇 분이야."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사실 서윤이 정확히 몇 시에 오겠다고 말한 건 아니었다.
그냥 '갈게'라는 말 한마디를 붙잡고 이 자리에 서 있는 거였다.
"긴장돼?"
"긴장 안 되면 이상하잖아."
태민이 피식 웃었다.
"잘될 거야."
"그 말 벌써 몇 번째야."
"믹서다."
"뭐?"
"안 믹서, 근거 있는 확신이라고."
무슨 소리인지 못 알아들었지만 더 물어볼 시간이 없었다.
태민이 왜 저런 실없는 소리를 하는지, 저 애 나름의 위로 방식인 건지, 그런 걸 따질 정신이 없었다.
머릿속으로는 이미 백 번쯤 되뇐 문장들이 맴돌고 있었다.
〈나 너 좋아해.〉
〈처음 봤을 때부터.〉
〈그냥 알아주기만 해도.〉
전부 다 연습했던 말들이었는데, 정작 이 순간이 되니 어느 게 먼저였는지도 헷갈렸다.
손바닥이 축축했다.
바지에 몰래 문질러 닦았다.
계단 쪽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태민이 재빨리 몸을 숨겼다.
발소리는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았다.
그 속도가 서윤답다고, 순간적으로 그런 생각을 했다.
서윤이 옥상으로 나왔다.
교복 위로 걸친 카디건이 바람에 살짝 흔들렸다.
머리카락이 흩날렸다.
구두 끝에서 시작된 시선이 교복 바지의 주름을 지나, 카디건 자락을 지나, 마침내 얼굴에 닿았다.
그 모습을 보고 나는 순간 숨을 삼켰다.
"많이 기다렸어?"
서윤이 다가오며 물었다.
"아니, 별로."
거짓말이었다.
30분은 족히 서 있었던 것 같은데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감이 안 갔다.
휴대폰을 꺼내 확인할 용기도 없었다.
지금 이 순간 시간을 재는 게 무의미하게 느껴졌으니까.
서윤이 난간 옆에 나란히 섰다.
하늘을 보며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침묵이 이상하게 편했다.
옆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어깨가 스칠 듯 말 듯한 거리였다.
바람이 불 때마다 서윤의 냄새가 옆에서 흘러왔다.
비누 냄새 같은, 익숙하지 않은 냄새였다.
"아까 강혁 선배가 그렇게 나와서 놀랐지."
서윤이 먼저 입을 열었다.
"조금."
"신경 쓰지 마. 그 선배 원래 그래."
"원래 그런 사람이야?"
"자기 마음대로 안 되면 못 견뎌 하는 타입."
서윤의 목소리에 짜증이 살짝 묻어 있었다.
예전에 정말 무슨 일이 있었던 것 같았다.
〈너 걔랑 뭐야.〉
강혁 선배가 복도에서 서윤을 붙잡고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때 서윤의 표정이 지금과 비슷했던 것 같기도 했다.
"둘이 원래 알던 사이야?"
물으려던 말이 튀어나갔다.
서윤이 잠깐 나를 쳐다봤다.
"그런 거 지금 안 궁금해도 돼."
단호한 목소리였다.
더 물을 용기가 없었다.
"그래서, 할 말이 있다고 했잖아."
서윤이 나를 향해 몸을 돌렸다.
큰 눈이 정면으로 나를 마주 봤다.
심장이 목까지 차올랐다.
숨을 한 번 크게 들이마셨다.
붉은 하늘빛이 서윤의 얼굴에 얕게 번져 있었다.
그 얼굴을 보고 있으니 오히려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어···."
말이 나오지 않았다.
연습했던 문장들이 하나도 기억나지 않았다.
어제부터 몇 번이나 머릿속으로 되뇌었던 말들이 지금 이 순간 전부 사라져버렸다.
서윤이 기다리듯 나를 바라봤다.
조급해하지 않는 표정이었다.
그 여유가 오히려 나를 더 초조하게 만들었다.
빨리 뭐라도 말해야 하는데, 입이 얼어붙은 것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계단 쪽에서 태민이 숨죽이고 있는 걸 알았다.
그 애가 지금 이 순간을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이, 이상하게도 조금은 위안이 됐다.
혼자가 아니라는 감각.
비록 숨어 있는 관객일 뿐이지만.
그 순간, 문득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거절당할 거다.
그 확신이 오히려 이상한 용기를 만들었다.
어차피 결과는 정해져 있으니, 최소한 제대로 말이라도 해야 하지 않을까.
손끝의 떨림이 조금 잦아드는 것 같았다.
아니, 잦아든 게 아니라 그냥 무시하기로 한 것 같았다.
"나 너 좋아해."
말이 튀어나갔다.
생각보다 훨씬 빨리, 훨씬 크게.
말을 뱉은 순간, 옥상의 공기가 완전히 멈춘 것 같았다.
바람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서윤의 표정이 얼어붙은 것처럼 보였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귓가에 그 소리만 들렸다.
쿵. 쿵. 쿵.
서윤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1초, 2초, 3초.
그 짧은 시간이 영원처럼 느껴졌다.
계단 쪽에서 숨죽인 태민의 존재가 느껴졌다.
그 애도 지금 이 순간을 숨죽이고 지켜보는 게 분명했다.
나는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어차피 거절당할 거라면, 마지막까지 도망치고 싶지 않았다.
눈을 깜빡이는 것도 잊은 채 서윤의 얼굴만 바라봤다.
붉은 하늘빛이 서윤의 눈동자에 비쳐 흔들리고 있었다.
서윤의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 수 없었다.
표정이 너무 복잡해서 읽을 수가 없었다.
놀란 건지, 당황한 건지, 화가 난 건지.
그 어떤 것도 확신할 수 없는 얼굴이었다.
손끝이 떨렸다.
다리에 힘이 풀리는 것 같았다.
바람이 다시 불었다.
서윤의 카디건 자락이 흔들렸고, 머리카락 몇 가닥이 이마 위로 흘러내렸다.
그걸 넘길 생각도 하지 않고, 서윤은 계속 나를 보고 있었다.
"그러니까···."
서윤의 목소리가 처음으로 흔들렸다.
평소의 단정한 어조가 아니었다.
그 흔들림이, 오히려 나를 더 불안하게 만들었다.
어떤 대답이 나올지, 전혀 예측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