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 ›"차강혁."
태민이 옆에서 작게 이름을 읊었다.
"누군데."
"3학년 축구부 에이스."
그 말에 교실 안 몇몇이 술렁였다.
에이스라는 두 글자가 이렇게 무거울 수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축구부 에이스라는 말만으로도 그의 존재감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이 갔다.
키가 크고, 어깨가 넓고, 팔짱을 낀 자세만으로도 위압적이었다.
교실 문틀에 반쯤 몸을 걸친 채 서 있는 그 모습이, 마치 이 공간의 주인은 자신이라는 걸 증명하려는 것 같았다.
"저 선배, 예전에 서윤이랑 무슨 일 있었어?"
태민이 목소리를 더 낮췄다.
"몰라. 근데 소문은 있었어. 작년에 고백했다가 차였다고."
그 말을 듣는 순간 뭔가 속이 울렁거렸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네가 서윤이한테 고백한다는 애야?"
낮고 단정적인 말투였다.
반문의 여지를 주지 않는 어투.
나는 대답을 못 하고 서 있었다.
책상 다리를 잡은 손끝이 저절로 하얗게 질렸다.
"맞잖아."
강혁이 성큼 다가왔다.
한 걸음, 한 걸음마다 교실 안 공기가 무거워졌다.
발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쿵. 쿵.
바닥을 밟는 소리 하나하나가 심장을 짓누르는 것 같았다.
"어···."
제대로 대답도 못 하고 얼버무리는 사이, 그가 내 앞까지 다가와 섰다.
키 차이가 확실히 느껴졌다.
올려다보는 시선 앞에서, 나는 어깨가 저절로 움츠러들었다.
가까이서 보니 더 압도적이었다.
운동으로 다져진 팔뚝과 딱딱하게 굳은 턱선.
그 앞에 서 있는 내 모습이 한없이 작아지는 기분이었다.
"서윤이 좋아해?"
"그게···."
"대답해."
짧고 명령적인 어조였다.
반 애들 시선이 전부 이쪽에 쏠려 있었다.
숨이 막혔다.
누군가 숨죽여 침을 삼키는 소리가 귓가에 닿을 만큼 조용했다.
"···네."
작게 대답이 나왔다.
스스로도 놀랄 만큼 순순히 나온 말이었다.
말을 뱉고 나서야 아, 내가 방금 뭘 인정한 거지 싶었다.
되돌리기엔 이미 늦었다.
강혁의 입꼬리가 비틀렸다.
"웃기네."
그 웃음에는 비웃음과 짜증이 반반씩 섞여 있었다.
"저기, 선배."
태민이 끼어들려 했지만 강혁의 시선 한 번에 멈췄다.
"넌 빠져."
낮은 한마디에 태민조차 말을 잃었다.
교실 안이 완전히 얼어붙었다.
누구도 움직이지 않았다.
숨소리조차 조심스러웠다.
강혁이 다시 나를 내려다봤다.
"난 걔한테 고백했다가 차였어."
예상은 했지만 직접 듣는 건 다른 무게였다.
머릿속으로 태민이 방금 했던 말이 겹쳐 들렸다.
'작년에 고백했다가 차였다고.'
그게 사실이었구나.
"그런데 너 같은 애가?"
말끝이 비웃음으로 끝났다.
"넌 걔 눈에도 안 들어갈 거야."
그 말이 가슴에 콱 박혔다.
반박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사실 나조차도 확신이 없었다.
서윤이 왜 나를 다시 얘기하자고 했는지, 왜 웃어줬는지 전혀 알 수 없었다.
그냥 무시해버릴까.
강혁이고 뭐고 다 집어치우고.
하지만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발끝이 바닥에 붙어버린 것 같았다.
그 순간,
"강혁 선배."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교실 안 모두가 그쪽을 봤다.
서윤이었다.
어느새 문 앞에 서 있었다.
가방끈을 쥔 손이 살짝 힘이 들어가 있었다.
교복 재킷 사이로 보이는 어깨선이 평소보다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여기서 뭐 하세요."
강혁의 표정이 순간 부드러워졌다.
"서윤아, 오랜만이네."
목소리 톤이 완전히 바뀌었다.
방금 전까지 나를 향해 쏟아내던 냉기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 낙차가 오히려 더 소름 끼쳤다.
"뭐 하시냐고요."
서윤의 목소리가 단호했다.
평소의 다정한 톤과는 완전히 다른 어조였다.
교실에서 몇 번 들어본 서윤의 목소리 중, 이렇게 날이 선 건 처음이었다.
"그냥 얘기 좀 하러."
"도윤이한테 무슨 볼일 있으세요?"
내 이름을 부르는 순간, 이상하게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도윤이한테, 라고 부르는 그 말투가 이상하게 다정했다.
그 두 글자에 담긴 온도가 조금 전 강혁의 목소리와는 전혀 달랐다.
강혁이 팔짱을 풀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냥 궁금해서."
"궁금한 게 있으면 저한테 물으세요."
서윤이 걸어와 내 옆에 섰다.
발소리조차 나지 않는 걸음이었다.
어깨가 스칠 듯 가까웠다.
그 순간 손끝이 살짝 맞닿았다.
순전히 우연이었다.
하지만 그 짧은 접촉에 온몸이 굳었다.
피부가 닿았던 자리가 유난히 뜨거웠다.
강혁이 그 모습을 보고 눈을 가늘게 떴다.
"뭐야, 벌써 그런 사이야?"
"그건 선배가 알 필요 없죠."
서윤의 대답이 단칼같았다.
교실 안이 조용해졌다.
누구도 숨소리를 내지 않았다.
시계 초침 소리가 들릴 만큼 정적이었다.
강혁이 잠깐 나를 쏘아보다가, 다시 서윤을 봤다.
시선이 오가는 그 짧은 틈에도 팽팽한 긴장이 흘렀다.
"두고 봐."
그 말을 남기고 그는 몸을 돌려 교실을 나갔다.
발소리가 복도 끝으로 사라질 때까지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유독 크게 울렸다.
탁.
그 소리에 반 아이들 몇몇이 그제야 숨을 몰아쉬었다.
서윤이 나를 돌아봤다.
"괜찮아?"
"어, 어."
제대로 된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목소리가 목구멍에 걸려 나오는 것 같았다.
서윤이 살짝 웃었다.
그 웃음이 방금 전 강혁을 상대하던 얼굴과는 전혀 다른, 원래의 서윤이었다.
"많이 놀랐지."
"아니, 그게 아니라···."
말을 제대로 잇지 못했다.
서윤이 내 표정을 살피더니 작게 웃음을 흘렸다.
"이따 옥상에서 얘기하는 거, 잊지 않았지?"
"안 잊었어."
대답하는 목소리가 떨렸다.
서윤이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로 돌아갔다.
멀어지는 뒷모습을 눈으로 좇는 동안, 방금 있었던 일이 아직도 실감이 나지 않았다.
태민이 내 옆으로 다가와 작게 속삭였다.
"봤어? 걔가 너 감싸는 거?"
"봤어."
"이거 확실한 거 아냐?"
태민의 눈이 반짝거렸다.
평소 같으면 나도 그 흥분에 같이 들썩였을 텐데, 지금은 그럴 여유가 없었다.
확실한 게 뭔지 나도 알고 싶었다.
하지만 강혁의 마지막 말이 계속 귓가에 남아 있었다.
두고 봐.
그 말이 단순한 협박으로 끝날 것 같지 않았다.
교실 뒷문으로 사라진 강혁의 등이 눈앞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그 넓은 어깨와 낮게 깔린 눈빛이, 마치 아직도 이 교실 어딘가에 남아 있는 것 같았다.
책상 위에 놓인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떨림을 멈추려 손을 꽉 쥐었지만, 소용없었다.
방과 후, 옥상에서의 시간이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심장이 뛰는 속도가 점점 빨라졌다.
수업 시간 내내 칠판 글씨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오직 두 개의 목소리만 머릿속에서 번갈아 울렸다.
'넌 걔 눈에도 안 들어갈 거야.'
그리고,
'도윤이한테 무슨 볼일 있으세요?'
어느 쪽이 진짜인지, 나조차도 판단이 서지 않았다.
수업 종이 울릴 때마다 옥상으로 향하는 시간이 조금씩 줄어들었고, 그만큼 심장은 조금씩 더 빨리 뛰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