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빙산 여왕의 사냥감이 됐다

1화

미팅은 재앙이었다. 도윤이 부른 자리라는 걸 알았을 때부터 예감이 안 좋았다. 강도윤, 저 자식은 항상 이런 식이었다. 조용히 학교 다니고 싶다는 사람을 굳이 끌어내서, 이런 자리에 앉혀놓고, 정작 자기는 옆에서 실실 웃기만 한다. 지난달에도 그랬다. 재작년 여름에도 그랬다. 나는 매번 안 간다고 했고, 매번 끌려나왔다. "야, 오늘 백로여고 나온 애들 온대. 완전 퀄리티 다르다니까." 도윤이 팔꿈치로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나는 물컵만 만지작거렸다. 손끝이 미리 차가워지는 기분이었다. 미팅이라는 단어만 들어도 심장이 쪼그라들었다. 낯선 사람과 어색한 대화를 나누고, 적당히 웃어주고, 상대가 실망하지 않게 리액션을 조절하는 그 모든 과정이 나에게는 노동이었다. 즐거운 노동이 아니라, 그냥 노동. 월급도 안 나오는 노동. "너는 진짜 이런 거 왜 좋아하냐." "인생에 낭만이 있어야지, 낭만." 도윤이 팔짱을 끼고 카페 입구를 뚫어지게 쳐다봤다.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테이블 위에 놓인 메뉴판 모서리를 손톱으로 긁었다. 손톱 끝에 각인처럼 남은 초조함이었다. 카페 안은 은은한 조명으로 채워져 있었다. 원목 테이블, 낮게 깔린 재즈 음악, 커피 냄새와 섞인 달콤한 디저트 향. 이런 분위기 좋은 카페에 와서 정작 내 기분은 최악이라는 게 아이러니했다. 창밖으로 보이는 거리는 평화로웠다. 사람들이 웃으며 걸어 다녔다. 나는 이 안에서 혼자 다른 세계에 있는 기분이었다. 카페 문이 열렸다. 종소리가 울렸다. 도윤의 눈이 번쩍 뜨였다. "왔다." 나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들 필요가 없었다. 어차피 이 자리는 삼십 분 안에 끝날 예정이었다. 적당히 웃고, 적당히 대답하고, 화장실 간다고 하고 슬쩍 빠져나가는 것. 그게 내 계획이었다. 이미 몇 번이나 성공한 전략이었다. 도윤은 매번 화를 냈지만 다음번에도 또 나를 끌고 나왔다. 그런데 도윤이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 안녕하세요." 목소리가 이상하게 떨렸다. 나도 모르게 고개를 들었다. 조용한 여자가 서 있었다. 긴 생머리, 하얀 셔츠, 무릎 밑까지 오는 단정한 스커트. 표정은 없었다. 눈은 마주치는 순간 바로 다른 곳을 향했다. 인사를 하는 목소리도 거의 들리지 않을 만큼 작았다. 옆에 있던 여자애가 대신 소개를 해줬다. "이쪽이 서리야. 한서리." 한서리. 그 이름을 듣는 순간에도 나는 별생각이 없었다. 그저 조용하고 예쁜 여자애구나, 정도였다. 그녀가 자리에 앉는 모습조차 조심스러웠다. 무릎을 가지런히 모으고, 두 손을 테이블 아래로 내리고, 시선은 어딘가 애매한 지점에 고정되어 있었다. 도윤이 흥분해서 속삭였다. "저 여자가 그 유명한 빙산의 여왕이야. 백로여고에서 삼 년 내내 남자애들 다 씹어먹었대. 근데 아무한테도 안 웃어줬대." 빙산의 여왕이라니. 이름부터 부담스러웠다. 나는 그냥 조용히 앉아있기로 했다. 다행히 그녀도 말을 거의 하지 않았다. 다른 애들이 대화를 주도했고, 나와 서리는 각자 존재감을 숨기듯 앉아만 있었다. 동질감이랄까. 나쁘지 않았다. 옆자리 남자애가 자기 학교 축제 얘기를 늘어놓았다. 다른 여자애는 웃으며 맞장구를 쳤다. 도윤은 어떻게든 대화의 중심에 서려고 애썼다. 나는 그 사이에서 물컵을 세 번 더 채웠다. 서리는 커피를 한 모금도 마시지 않았다. 잔에 담긴 커피 표면이 조명을 받아 반짝이고 있었는데, 그게 왠지 그녀의 표정처럼 고요했다. 한 번은 그녀가 핸드폰을 확인했다. 화면이 잠깐 밝아졌다가 곧 꺼졌다. 그녀의 눈썹이 아주 살짝 움직였다. 나는 그걸 봤지만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그때는 정말로 몰랐다. 삼십 분쯤 지났을 때, 화장실을 다녀오겠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계획대로였다. 화장실에 다녀온 다음에는 그대로 밖으로 빠져나갈 생각이었다. 도윤에게는 나중에 문자로 사과하면 될 일이었다. 매번 그랬듯이 "미안, 급한 일 생겼어" 정도면 충분했다. 카페 안쪽 복도는 어두웠다. 밝은 홀과 대조적으로 조명이 거의 없어서 눈이 잠깐 적응하는 데 시간이 걸렸다. 화장실 표지판을 따라 걸어가는데, 저 앞에 누군가 서 있는 게 보였다. 한서리였다. 등을 보이고 서서 누군가와 통화를 하고 있었다. 어깨가 미묘하게 굳어 있었다. 나는 걸음을 멈추지 않고 지나가려 했다. 굳이 마주칠 이유가 없었으니까. 그런데 그녀의 목소리가 귀에 걸렸다. "그래서 어쩌라고." 낮았다. 서늘했다. 조금 전 카페 테이블에서 들었던 그 조용하고 작은 목소리가 아니었다. 완전히 다른 사람이 거기 서 있는 것 같았다. "내가 왜 니 말을 들어야 되는데. 웃겨 진짜." 나는 그 자리에 멈춰섰다. 발이 저절로 굳었다. 심장이 이상한 속도로 뛰기 시작했다. 등을 돌려서 도망치고 싶었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됐고, 다시 전화하지 마. 한 번만 더 걸면 진짜 후회하게 만들어줄 테니까." 전화를 끊는 소리가 들렸다. 뚝, 짧고 단호한 소리였다. 그 소리가 복도 벽에 부딪혀 이상하게 크게 울렸다. 그녀가 뒤를 돌아봤다. 눈이 마주쳤다. 표정이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조금 전 카페에서 보였던 조용하고 얌전한 얼굴이 아니었다. 눈빛이 날카롭게 나를 파고들었다. 입꼬리가 아주 조금, 위로 올라갔다. 그건 웃음이라기보다는 관찰이었다. 마치 벌레를 발견한 사람의 표정 같았다. 나는 그 시선 앞에서 숨 쉬는 법을 잊어버린 기분이었다. "...들었어요?" 목소리는 여전히 낮았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거짓말이었다. 다 들었다. 한 글자도 빠짐없이. "안 들었는데요." "거짓말." 단정적이었다. 반박할 틈도 주지 않는 말투였다. 그녀가 한 걸음 다가왔다. 좁은 복도라서 뒤로 물러날 곳도 없었다. 등이 벽에 닿았다. 차가운 벽면의 감촉이 셔츠 너머로 스며들었다. 그녀의 얼굴이 예상보다 훨씬 가까이 들어왔다. 숨이 막혔다. 향수 냄새인지 뭔지, 은은하지만 분명한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저는요, 이런 거 굳이 소문내고 다니는 애들 진짜 싫어해요." 그녀가 손가락으로 내 셔츠 깃을 살짝 잡아당겼다. 손끝이 차가웠다. 나는 얼음이 된 것처럼 움직이지 못했다. 그녀의 눈이 내 눈을 정확히 겨누고 있었다. 피할 곳이 없었다. "그러니까 입 다물어요. 알겠죠?" 말투는 여전히 존댓말이었지만, 그 안에 담긴 건 명령이었다. 거스를 수 없는 온도였다. 나는 겨우 고개를 끄덕였다. 목이 말라서 대답할 힘조차 없었다. 그녀가 손을 놓았다. 그리고 다시, 마치 스위치를 끄듯 표정이 원래대로 돌아갔다. 조용하고, 얌전하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한 얼굴로. 방금까지의 날카로움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그 전환이 너무 자연스러워서, 오히려 더 무서웠다. "먼저 갈게요." 그녀는 사뿐히 걸어서 복도를 빠져나갔다. 발소리조차 조심스러웠다. 나는 그 자리에 붙박인 듯 서 있었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 손끝은 아직도 차가웠다. 등이 벽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얼마나 그렇게 서 있었는지 모르겠다. 카페 안쪽에서 누군가 웃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다른 세계의 소리 같았다. 빙산의 여왕이라는 별명이 왜 붙었는지, 나는 그제야 이해했다. 얼음처럼 차갑다는 뜻이 아니었다. 얼음 아래에 뭐가 있는지, 아무도 알아채지 못했다는 뜻이었다. 표면 위의 냉기는 사람들의 시선을 밀어내는 방패였을 뿐, 진짜는 그 안쪽에 있었다. 나는 그걸 봤다. 딱 한 번, 정확히 나만. 화장실도 가지 않고 그대로 자리로 돌아갔다. 서리는 이미 다시 그 조용한 얼굴로 앉아 있었다. 아무렇지 않게 커피잔을 만지고 있었다. 그녀와 눈이 마주쳤을 때, 아주 짧게, 그녀의 입꼬리가 다시 살짝 올라갔다. 나만 알아볼 수 있는 신호처럼. 그리고 그날 이후, 나는 조용히 도망칠 수 없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도윤은 그날 밤 나에게 전화를 걸어 "야, 서리 어땠냐, 인상 괜찮지 않았냐"고 물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 괜찮았다고 해야 할지, 무서웠다고 해야 할지. 둘 다 사실이었으니까. 전화를 끊고 나서도 나는 한참 동안 핸드폰을 손에 쥔 채로 앉아 있었다. 그녀의 마지막 표정이 눈앞에 계속 남아 있었다. 조용한 얼굴 뒤에 숨겨둔 그 서늘한 웃음. 그게 나한테만 보여진 거라면, 그건 대체 무슨 의미일까. 다음 날, 학교 복도에서 낯익은 얼굴이 눈에 들어왔을 때, 나는 심장이 내려앉는 걸 느꼈다. 같은 학교였다. 한서리가, 내가 다니는 학교로 편입을 온 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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