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 ›그날 이후 며칠이 흘렀다.
나는 최대한 평범하게 살기로 했다. 강의 듣고, 밥 먹고, 도서관 가고, 집에 돌아가고. 그 복도에서 있었던 일은 기억 저편으로 밀어두려 애썼다. 어차피 다시 볼 일 없는 사람이었다. 미팅 자리에서 한 번 마주친 게 전부였고, 학과도 다르고, 학교 안에서 스칠 확률조차 낮았다.
그렇게 믿었다.
밤마다 그 복도를 떠올리지 않으려고 일부러 다른 생각을 했다. 다음 주 시험, 밀린 과제, 아르바이트 스케줄. 하지만 눈을 감으면 어김없이 그 순간이 재생됐다. 낮은 목소리, 벽에 붙던 등, 그리고 아무렇지 않게 웃던 얼굴. 이불을 머리끝까지 덮고 억지로 잠을 청했다. 그럴수록 심장은 더 크게 뛰었다.
월요일 아침, 경제학개론 강의실 문을 열었을 때, 나는 그 믿음이 얼마나 순진했는지 깨달았다.
맨 앞줄에, 한서리가 앉아 있었다.
노트를 펴놓고 조용히 필기를 준비하는 모습이었다. 볼펜 뚜껑을 딸깍, 여닫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다른 학생들 눈에는 그냥 예쁘고 얌전한 여학생이었다. 옆자리 애가 지나가며 눈웃음을 보내도 그녀는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오직 앞만 보고 있었다. 하지만 내 눈에는 아니었다. 나는 그녀가 뭘 하고 있는지 정확히 알았다.
기다리고 있었다. 나를.
나는 최대한 자연스럽게 뒷줄로 걸어가 앉았다. 가방을 내려놓는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심장이 쿵쿵 뛰었다. 강의가 시작됐고, 교수님이 뭐라고 말했는지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녀의 뒷모습만 신경이 쓰였다. 정확히는 그녀의 목덜미, 그리고 가끔 살짝 기울어지는 고개의 방향이었다. 필기를 하는 척하며 나를 곁눈질로 확인하는 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 때마다 나는 애꿎은 볼펜을 꽉 쥐었다.
강의 중간, 교수님이 질문을 던졌다. 아무도 손을 들지 않았다. 정적이 흘렀다. 그 짧은 정적 속에서 그녀가 살짝 고개를 돌렸다. 나와 눈이 마주칠 것 같은 각도였다. 나는 재빨리 시선을 노트로 떨어뜨렸다. 손끝에서 식은땀이 났다.
강의가 끝나고, 가방을 챙겨 재빨리 강의실을 빠져나왔다. 계단을 두 개씩 뛰어 내려갔다. 뒤에서 누가 부르는 것 같은 느낌이 계속 들어서 몇 번이나 고개를 돌렸다. 아무도 없었다. 그게 더 이상하게 소름 끼쳤다.
정문 쪽으로 향하는 대신 후문으로 방향을 틀었다. 미로처럼 이어진 건물 뒤편 골목을 지나면 지름길로 학식당까지 갈 수 있었다. 아무도 모르는 길이었다. 재학생들도 잘 모르는, 청소 아주머니들이나 다니는 좁은 통로였다. 나는 이 길을 안다는 사실에 이상한 안도감을 느꼈다. 여기까지는 못 쫓아올 거야. 그렇게 생각했다.
골목 끝에서 나는 걸음을 멈췄다.
그녀가 벽에 등을 기대고 서 있었다.
어떻게.
말이 나오지 않았다. 강의실에서 나온 지 채 삼 분도 지나지 않았는데, 이 좁고 아무도 안 다니는 골목에 어떻게 먼저 와 있을 수 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숨이 턱까지 차오른 나와 달리 그녀는 숨소리 하나 흐트러지지 않았다. 마치 처음부터 그 자리에 서 있었던 것처럼.
"늦었네요."
그녀가 팔짱을 낀 채 나를 올려다봤다. 표정은 여전히 얌전했다. 목소리도 작았다. 하지만 나는 이제 그 겉모습에 속지 않았다.
"저를... 기다린 거예요?"
"네."
망설임이 없는 대답이었다. 나는 등에서 식은땀이 흐르는 걸 느꼈다. 골목 벽의 서늘한 기운이 등을 타고 올라오는 것 같았다.
"왜요."
"입 다물고 있는지 확인해야 하니까요."
그녀가 나에게 한 걸음 다가왔다. 나는 반사적으로 한 걸음 물러섰다. 발뒤꿈치가 뭔가에 걸려 휘청였다. 그녀는 그런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했다.
"아무한테도 말 안 했어요. 진짜예요."
"알아요."
"그럼 왜."
그녀의 눈이 아주 잠깐, 흔들렸다. 그건 정말 짧은 순간이었고, 곧 다시 무표정으로 돌아갔다. 그 짧은 흔들림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나는 알 수 없었다. 두려움일까, 아니면 다른 무엇일까.
"그냥 확인하는 거예요. 그리고."
"그리고요?"
"이준서 씨, 자꾸 도망치는 거 재밌네요."
재밌다는 말이 그렇게 무섭게 들린 건 처음이었다. 나는 뒷걸음질치다가 벽에 어깨를 부딪혔다. 벽돌의 거친 표면이 어깨를 파고드는 감각이 오히려 선명하게 느껴졌다.
"저 도망치는 거 아니에요. 그냥 수업 가는 길이었어요."
"그래요?"
그녀가 살짝 웃었다. 처음 보는 종류의 웃음이었다. 입꼬리는 올라갔지만 눈은 전혀 웃지 않았다. 그 웃음을 마주하는 순간 나는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걸 느꼈다.
"그럼 다음에도 이 길로 다녀요. 확인하기 편하니까."
"저, 저기요. 이거 너무한 거 아니에요? 저도 제 생활이 있는데..."
말을 끝맺기도 전에 목소리가 흔들렸다.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나를 바라보는 시선만 조금 더 길게 유지했다. 마치 내가 다음 말을 뭐라고 할지 이미 알고 있다는 듯한 눈빛이었다.
그 말을 남기고 그녀는 스르륵 걸어서 골목을 빠져나갔다. 나는 벽에 등을 붙인 채로 한참 동안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했다. 다리에 힘이 풀려서 그 자리에 주저앉을 것 같았다.
그날 오후, 나는 학식당 대신 편의점 도시락으로 점심을 해결했다. 사람 많은 곳은 피하고 싶었다. 삼각김밥 포장을 벗기는 손이 여전히 떨리고 있었다. 도서관 열람실에 자리를 잡았다. 창가 쪽, 사람들 눈에 잘 안 띄는 구석 자리였다. 이번에는 정말 아무도 모를 거라고 생각했다.
삼십 분쯤 지났을 때, 누가 맞은편 자리에 앉는 소리가 들렸다. 의자를 끄는 소리, 그리고 가방을 내려놓는 소리. 그 평범한 소리들이 그날따라 유난히 크게 울렸다.
고개를 들지 않았다. 굳이 확인할 필요가 없었다. 향이 먼저 알려줬다. 그녀 특유의 옅은 비누향이었다. 그 향을 맡는 순간 손끝에서 책장이 미끄러졌다.
"공부 열심히 하네요."
나는 책을 덮지도 못하고 그대로 얼어붙었다. 심장이 내려앉는 느낌이었다.
"저기, 여기까지 왜..."
"같은 대학교잖아요. 어디를 가든 이상할 거 없죠."
틀린 말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상했다. 확실히 이상했다. 도서관 열람실 오백 개가 넘는 자리 중에 하필 내 맞은편이라니. 그것도 커튼처럼 늘어진 서가 뒤, 아무도 지나다니지 않는 구석까지.
"수업 있으면 가봐야 하는데."
나는 가방을 챙기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손이 떨려서 지퍼를 두 번이나 다시 잡았다. 그녀는 그저 웃으며 나를 바라봤다. 붙잡지도 않았다. 말리지도 않았다. 그냥, 지켜보기만 했다.
그게 더 무서웠다.
도서관을 나오면서 나는 처음으로 진지하게 생각했다. 전학을 갈 수는 없나. 아니, 그건 너무 극단적이었다. 그럼 최소한 강의 시간표를 바꿀 수는 없을까. 아니, 이미 수강신청 정정 기간도 끝났다. 자퇴는. 그 생각이 스치자마자 나는 스스로에게 헛웃음이 났다. 이렇게까지 될 일인가.
선택지가 하나씩 사라지고 있었다.
마치 그녀가 미리 다 계산해둔 것처럼, 내가 도망칠 수 있는 모든 길이 조용히, 그리고 확실하게 막혀가고 있었다. 강의실, 도서관, 심지어 후문 골목까지. 학교 안에 내가 숨을 수 있는 곳이 정말 남아 있는지조차 의심스러웠다.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 안에서, 나는 창밖을 멍하니 바라봤다. 스쳐 지나가는 가로등 불빛이 유리창에 부딪혀 흩어졌다. 오늘 하루 있었던 일들이 머릿속에서 계속 재생됐다. 골목에서의 웃음, 도서관에서의 향기. 도망칠 곳이 없다는 사실이 조금씩 실감으로 다가왔다.
그때, 휴대폰이 진동했다. 모르는 번호였다.
『내일도 그 골목으로 다녀요.』
번호를 어떻게 알았는지 묻고 싶었지만, 이미 답을 알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몇 번이나 그 문자를 다시 읽었다. 지우려고 손가락을 화면 위에 올렸다가 그대로 멈췄다. 지운다고 달라지는 게 없을 것 같았다.
답장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손끝은 이미 차갑게 식어 있었다. 버스 창밖으로, 익숙한 정류장이 지나가는데도 나는 내려야 한다는 사실조차 잊고 있었다.
다음 정류장 알림음이 울렸을 때, 나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벨을 눌렀다. 문이 열리고 밖으로 나서는 순간, 서늘한 밤바람이 얼굴을 스쳤다. 그리고 그 바람 속에서, 나는 왠지 낯익은 비누향을 맡은 것 같았다. 뒤를 돌아봤다. 아무도 없었다. 그런데 왜 자꾸 뒤가 신경 쓰이는 걸까.
집으로 걸어가는 내내, 나는 몇 번이나 뒤를 돌아봤다. 그리고 매번, 아무도 없다는 사실이 오히려 나를 더 불안하게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