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숨겨진 여동생의 후견인

4화

"채무요?" 도윤의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전화기 너머의 남자는 사무적인 말투를 유지했다. "네, 강태식 씨 명의로 대출이 세 건 있습니다. 총 금액이 육천만 원 정도 되는데요. 상속 관련해서 안내드리려고 연락드렸습니다." 도윤은 순간 숨이 턱 막혔다. '육천만 원? 아버지가 그런 빚을 지고 있었다고?' 손끝이 저릿했다. 휴대폰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자세한 내역을 좀 알 수 있을까요." "서류로 안내드릴 수 있습니다. 이메일 주소 남겨주시면……" 남자의 목소리는 여전히 무미건조했다. 마치 이게 누군가의 인생을 통째로 뒤집는 얘기라는 걸 모르는 것 같았다. 도윤은 이메일을 불러주고 전화를 끊었다. 손이 살짝 떨렸다. 하은이 옆에서 도윤의 표정을 살피며 물었다. "오빠, 무슨 전화예요?" 도윤은 손으로 눈가를 문질렀다. "아니야, 별거 아니야." 하지만 목소리에 힘이 없었다. 하은은 더 묻지 않았지만, 걱정스러운 눈으로 도윤을 바라보고 있었다. 겁먹은 강아지 같은 눈이었다. 그 눈을 보고 있으니 더 무너질 것 같아서, 도윤은 일부러 시선을 돌렸다. 전화를 끊은 도윤은 벤치에 등을 기댔다.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별이 흐릿하게 보였다. 장례식장 마당의 조명 때문인지, 마음이 어두운 탓인지 알 수 없었다. '상속을 포기하면 빚도 안 갚아도 되겠지. 근데 하은이는…… 하은이 앞으로 나올 유산이 있다면 그것도 포기해야 하는 건가.' 머릿속이 복잡하게 엉켰다. 빚, 후견인, 하은의 학교, 회사, 소라…… 생각이 갈래갈래 뻗어나가다가 결국 한 곳으로 모였다. 아버지. 왜 하필 지금, 이런 식으로. 다음 날 아침, 발인이 시작됐다. 장례식장 마당에는 검은 옷을 입은 사람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차가운 새벽 공기가 코끝을 스쳤다. 미숙은 눈이 붓은 채로 앞줄에 섰다. 도윤은 상주로서 관 옆에 섰다. 하은은 그 뒤편, 조금 떨어진 자리에 서 있었다. 검은 교복 재킷을 어깨에 걸친 모습이 유난히 작아 보였다. 장의차가 도착하자 사람들이 관을 들어 옮겼다. 도윤은 무거운 관의 한쪽 끝을 잡았다. 어깨가 짓눌리는 듯한 무게였다. 하지만 그 무게보다 마음이 더 무거웠다. 한 걸음, 한 걸음. 발밑의 자갈이 밟히는 소리마저 크게 들렸다. 관이 차에 실리는 순간, 하은이 조용히 다가와 도윤 옆에 섰다. "오빠." "응." "저 아빠 얼굴, 마지막으로 못 봤어요." 도윤은 하은을 내려다보았다. 눈이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속눈썹 끝에 눈물이 매달려 있다가 뚝, 떨어졌다. "입관식 때 못 왔어?" "몰랐어요. 어제 편지 보고 겨우 여기 온 거라……" 도윤의 마음이 다시 무너져 내렸다. '삼 일 동안 이 애는 혼자서 뭘 하고 있었던 거야.' 그 삼 일이 어떤 시간이었을지, 상상만 해도 가슴이 조여왔다. 텅 빈 집에서, 아무도 없이, 아버지의 부재를 실감하며 보낸 시간. 도윤은 손을 뻗어 하은의 어깨를 짧게 감쌌다. 말은 하지 않았다. 할 말이 없었다. 장례 절차가 끝나고, 화장이 진행되는 동안 사람들은 대기실에서 기다렸다. 누군가는 종이컵에 담긴 커피를 마셨고, 누군가는 창밖을 바라보며 담배 생각을 참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미숙이 도윤 옆에 앉아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채무 얘기, 나도 들었다." 도윤이 고개를 돌렸다. "어떻게 아세요?" "은행에서 나한테도 전화 왔어. 오래된 빚이더라. 태식이 사업한다고 벌인 거야." 미숙은 한숨을 내쉬며 팔짱을 꼈다. 목소리에 오래된 원망이 스며 있었다. "그 사람 항상 그랬어. 뭐 하나 크게 벌여놓고 뒷일은 생각도 안 하고." "상속 포기해. 안 그러면 너까지 빚더미에 앉는다." "그럼 하은이는요?" 미숙이 도윤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 애도 같이 포기해야지. 미성년자니까 네가 대신 신청해야 할 거다." 도윤은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서류, 후견인 신청, 상속 포기까지. 일주일 사이에 처리해야 할 일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게다가 회사는, 하은의 전학은, 당장 살 집은……. 숨이 턱 막혔다. 이게 다 물리적으로 가능한 일인가. 그때 대기실 문이 열리며 소라가 들어왔다. 손에는 서류 파일을 들고 있었다. 숨이 조금 가쁜 걸 보니 급하게 온 모양이었다. "선배님, 제가 미리 알아봤는데요." 도윤이 고개를 들었다. "뭘?" "후견인 신청 서류랑 상속 포기 신청, 같이 진행할 수 있대요. 저희 팀 자문 변호사님이 도와주신다고 했어요. 필요한 서류 목록도 정리했고요." 소라가 파일을 펼쳐 보였다. 빼곡하게 적힌 체크리스트가 눈에 들어왔다. 가족관계증명서, 기본증명서, 상속포기심판청구서…… 도윤은 소라를 바라보았다. 뭔가 뭉클한 감정이 올라왔다. "고마워, 소라야. 진짜." 소라는 살짝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그 미소 뒤에 뭔가 복잡한 감정이 섞여 있는 것도 같았다. "별말씀을요. 저도…… 이제 하은이 신경 쓰이는 거 마찬가지니까요." 하은이 그 말을 듣고 소라를 바라보았다. 작게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응, 잘 지내보자." 소라가 하은에게 웃어 보였다. 그 웃음이 조금 어색하게 느껴졌지만, 도윤은 그걸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화장이 끝나고, 유골함을 받아든 도윤의 손이 떨렸다. 따뜻했다. 그 온기가 오히려 더 슬프게 느껴졌다. 미숙이 옆에서 눈물을 닦았다. 하은은 유골함을 잠시 바라보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아빠, 나 이제 오빠랑 살 거야." 작은 목소리였지만, 그 안에 담긴 무게는 결코 작지 않았다. 도윤은 그 말을 듣고 눈을 질끈 감았다. 장례식장을 나서는 길, 도윤의 휴대폰이 다시 울렸다. 이번에는 낯익은 번호였다. 회사 팀장이었다. "강 팀장, 장례 잘 치렀어? 그런데 하나 물어볼 게 있는데." "네, 말씀하세요." "윤소라 씨한테 들었는데, 자네 갑자기 미성년자 조카를 데려온다고? 인사팀에서 이것저것 물어보더라고. 회사 규정상 부양가족 등록도 해야 하고, 이게 좀 복잡해서……" 도윤은 걸음을 멈췄다. '벌써 회사까지 소문이 났다고?' 머리가 어지러웠다. 소라가 팀장한테 뭐라고 말했는지, 그게 정확히 무슨 의미로 전달됐는지 순간적으로 온갖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팀장님, 그게 조카가 아니라……" "뭐가 됐든, 일단 월요일에 인사팀 좀 들렀다 가. 서류 필요하대." 전화가 끊겼다. 도윤은 휴대폰을 든 채로 잠시 멍하게 서 있었다. 발밑이 흔들리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하은이 그 표정을 보고 조심스레 물었다. "오빠, 회사에서 뭐라고 해요?" 도윤은 억지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아니야, 별거 아니야." 하지만 마음속으로는 다른 걱정이 스멀스멀 올라오고 있었다. '인사팀, 후견인 신청, 상속 포기, 채무, 전학까지…… 이걸 다 어떻게 하지.' 목록이 머릿속에서 자꾸만 늘어났다. 하나를 정리하면 두 개가 새로 생기는 기분이었다. 그날 오후, 도윤과 하은은 아버지의 집으로 향했다. 하은이 삼 년 동안 혼자 살았던 곳이었다. 좁은 골목길 끝에 작은 주택이 서 있었다. 낡은 지붕과 시멘트 담벼락이 오후 햇살 아래 유난히 스산해 보였다. 골목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하은의 발걸음이 조금씩 느려졌다. 대문 앞에서 하은이 걸음을 멈췄다. "여기가…… 저희 집이었어요."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도윤은 낡은 대문을 바라보았다. 페인트가 벗겨진 문패에 '강태식'이라는 이름이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그 옆에는 훨씬 더 흐릿하게, 다른 글자가 지워진 흔적이 있었다. 도윤은 그 흔적을 향해 손을 뻗었다. 손끝이 문패의 차가운 표면에 닿는 순간, 심장이 이상하게 뛰기 시작했다. 지워진 글자가 원래 무엇이었는지, 왠지 알아서는 안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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