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 ›다음 날 아침, 나는 냉장고를 열어봤다.
안이 텅 비어 있었다.
생수 몇 병과 유통기한이 한참 지난 요구르트가 전부였다.
문을 닫았다가 다시 열어봤다.
혹시 못 본 게 있나 싶어서.
없었다.
이 집 주인이 정말 밥을 먹긴 하는 걸까.
냉장고 안쪽 벽에 서리가 살짝 껴 있었다.
그마저도 오래 방치된 흔적이었다.
나는 팔짱을 끼고 잠시 서 있었다.
계약서를 다시 떠올렸다.
가사 도우미, 숙식 제공, 하루 세끼 관리.
그 어디에도 굶어 죽지 않게 하라는 조항은 없었지만, 굶어 죽으면 계약 자체가 무의미해질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지갑을 챙겨 근처 마트로 향했다.
장바구니에 두부와 계란, 대파, 된장을 담았다.
한참 고민하다가 마늘도 한 봉지 집어넣었다.
누가 볼 것도 아닌데 괜히 신중해졌다.
이 집에서 처음으로 만드는 밥상이니까.
집에 돌아와 부엌에 서서 된장국을 끓였다.
계란말이도 부쳤다.
불 앞에서 계란을 뒤집을 때마다 손목이 살짝 떨렸다.
왜 떨리는지는 나도 몰랐다.
식탁에 두 그릇을 놓고, 나는 문 앞으로 갔다.
숨을 한 번 들이쉬고 조심스레 말을 걸었다.
"저기, 밥 다 됐는데요."
대답이 없었다.
"서하은 씨."
문 안쪽에서 아무 기척도 없었다.
귀를 대볼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너무 이상한 짓 같았다.
나는 결국 문을 두 번 두드렸다.
딸깍.
문이 살짝 열렸다.
서하은이 팔짱을 낀 채 나를 내려다봤다.
잠옷 차림이었는데도 눈빛만은 날카로웠다.
"말 걸지 말라고 했잖아요."
"밥은 먹어야죠."
"필요 없어요."
문이 다시 닫혔다.
딱, 잠기는 소리까지 났다.
나는 잠긴 문을 잠깐 쳐다보다가 몸을 돌렸다.
식탁에는 국이 식어가고 있었다.
나는 혼자 앉아 두 그릇을 다 먹었다.
맛은 괜찮았는데, 이상하게 목이 막혔다.
계란말이를 씹으면서 문 쪽을 몇 번이나 돌아봤다.
저 문 안에서 뭘 하고 있을까.
정말 아무것도 안 먹고 버틸 수 있는 사람일까.
그릇을 씻으면서 혼자 중얼거렸다.
계약이잖아, 계약.
저 사람이 굶든 말든 내가 신경 쓸 필요 없잖아.
그런데 왜 신경이 쓰이는 걸까.
***
그날 밤, 화장실을 가려고 복도를 걷다가 부엌 쪽에서 소리가 났다.
냉장고 문이 열리는 소리였다.
심장이 쿵, 뛰었다.
나는 벽 뒤에 붙어 몰래 살펴봤다.
서하은이 냉장고 앞에 서서 내가 남긴 계란말이를 손으로 집어 먹고 있었다.
젓가락도 없이, 급하게.
한 손으로는 냉장고 문을 붙잡고, 다른 손으로는 계란말이를 입에 밀어 넣고 있었다.
씹는 속도가 너무 빨랐다.
마치 누가 볼까 봐 겁내는 사람처럼.
냉장고 불빛이 그녀의 얼굴 위로 흐릿하게 번졌다.
평소 화면에서 보던 완벽한 미소도, 도도한 표정도 없었다.
그냥 배가 고픈, 어린애 같은 얼굴이었다.
심장이 다시 한번 쿵, 내려앉았다.
저 모습은 티브이에서 본 그 완벽한 배우의 것이 아니었다.
나는 못 본 척 조용히 방으로 돌아갔다.
발소리를 최대한 죽이고 걸었다.
괜히 마주치면 서로 민망할 것 같았다.
아니, 민망한 건 저 사람 쪽이겠지.
나는 그냥 못 본 척해주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침대에 누워서도 그 장면이 계속 떠올랐다.
저렇게까지 자존심을 세우면서 왜 몰래 먹는 걸까.
자존심이 밥그릇 앞에서도 무너지지 않는 사람인가.
아니면 자존심을 지킬 수 없어서 몰래 먹는 걸까.
***
다음 날 아침, 식탁 위에 접시가 깨끗하게 씻겨 있었다.
물기까지 완벽하게 닦여 있는 걸 보니 헛웃음이 나왔다.
저렇게 부인할 거면서 왜 이렇게 깨끗이 씻어놓은 걸까.
"먹었네요."
나는 그냥 지나가듯 말을 던졌다.
서하은이 커피잔을 들다가 잠깐 멈췄다.
잔을 든 손끝이 살짝 굳어 있었다.
"...맛이 없어서 버렸어요."
거짓말이 너무 뻔했다.
웃음이 나올 뻔했는데 참았다.
입술 안쪽을 살짝 깨물면서 겨우 참았다.
"그래요? 그럼 오늘은 더 맵게 할게요."
"필요 없다고요."
"네네."
그녀가 나를 잠깐 쳐다봤다.
눈빛이 어제와 조금 달랐다.
경계는 여전한데, 그 안에 뭔가 다른 게 스쳐 지나갔다.
아주 짧게, 마치 실수로 흘러나온 감정처럼.
손끝을 꾹 눌렀다.
왜 저 사람 표정 하나에 내가 이렇게 신경이 쓰이는 걸까.
계약이잖아, 계약.
돈 받고 하는 일이잖아.
나는 스스로 되뇌었지만 별로 소용이 없었다.
그녀가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목울대가 살짝 움직이는 게 보였다.
나는 괜히 시선을 돌렸다.
저런 것까지 눈에 들어오면 안 되는데.
그때 그녀의 손목에서 짧은 소매가 흘러내렸다.
가느다란 팔목에 오래된 흉터 같은 게 보였다.
길고, 희미하지만 분명한 선이었다.
순간 그녀가 재빨리 소매를 잡아당겼다.
손목을 감추듯 팔을 몸 쪽으로 붙였다.
"뭘 봐요."
목소리가 날카로웠다.
방금 전과는 완전히 다른 온도였다.
아까의 그 미묘한 틈은 완전히 사라지고, 다시 벽이 세워졌다.
나는 아무 말도 못 하고 시선을 돌렸다.
분명 뭔가가 있었다.
저 흉터 안에.
식탁 위의 커피잔이 달그락, 소리를 냈다.
그녀가 잔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의자가 밀리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밥은... 앞으로 신경 쓰지 말아요."
그녀가 방으로 들어가며 마지막으로 던진 말이었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
나는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
방금 본 흉터가 눈앞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저 사람, 도대체 무엇을 숨기고 있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