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국민배우와 계약결혼이라니

4화

며칠 뒤, 인구청에서 연락이 왔다. 낯선 번호였다. 받을까 말까 세 번쯤 고민하다가 결국 눌렀다. "강준서 씨 되시죠." 담당관 그 목소리였다. 딱딱하고 사무적인, 인간미라고는 1그램도 섞이지 않은 그 특유의 톤. "국가 지정 커플 대상 공개 행사가 있습니다. 참석 필수입니다." "...무슨 행사요." "자세한 건 문자로 안내드리겠습니다. 방송 촬영이 포함되어 있으니 복장은 정장 권장드립니다." 방송. 촬영. 그 단어들이 귀에 걸려서 한동안 떨어지지 않았다. "안 가면요." "계약 위반 사유가 됩니다." 담당관은 그 말을 하면서 목소리 톤이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위반 사유. 그 네 글자가 참 깔끔하게 들렸다. 마치 오늘 날씨가 흐리다고 말하는 것처럼. 선택권이 없었다. 전화를 끊고 나서 한참 천장을 봤다. 방 안 공기가 갑자기 무거워진 느낌이었다. 손끝이 저절로 펜던트... 아니, 아무것도 없는 목덜미를 만지려다 멈췄다. 습관이란 게 참 무섭다. *** 행사장은 방송국 스튜디오였다. 조명이 너무 밝아서 눈이 아팠다. 눈을 몇 번 깜빡였다. 적응이 안 됐다. 이런 데 익숙해질 리가 없지. 나는 평생 조용한 진료실에서 손을 뻗는 게 일이었던 사람인데. 대기실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서하은이 보였다. 이미 완벽한 화장을 하고 무대 옆에 서 있었다. 속눈썹 한 올까지도 정확하게 계산된 듯 곧게 뻗어 있었고, 입술 끝은 자연스럽게 살짝 올라가 있었다. 평소와는 완전히 다른, 티브이에서 보던 그 미소를 걸치고 있었다. 가짜라는 걸 나는 이제 알았다. 며칠 지냈다고, 서하은의 웃는 방식을 두 종류로 구분할 수 있게 됐다. 이건 놀랄 일도 아니었다. 그냥 관찰력이 늘었다고 해두자. "오셨네요." 그녀가 나를 보고 인사했다. 목소리도 방송용 톤이었다. 매끄럽고, 완벽하고, 조금도 균열이 없는. "네." "긴장하지 마세요. 그냥 웃고만 있으면 돼요." 말은 다정한데 눈은 나를 스캔하듯 훑고 있었다. 옷차림 확인. 넥타이 위치 확인. 표정 확인. 이 여자는 이 순간에도 일을 하고 있었다. 스태프가 다가와서 마이크를 채워줬다. 옷깃에 뭔가 걸리는 느낌이 이상했다. 나는 계속 손끝을 꾹 눌렀다. 별거 아닌데 그냥 뭔가라도 붙잡고 있어야 했다. "국가 지정 커플, 치유 적성 강준서 씨와 국민 배우 서하은 씨 나오시죠." 사회자가 손짓했다. 박수 소리가 쏟아졌다. 쿵쿵. 심장이 이상하게 뛰었다. 무대 조명 아래로 걸어 나가는 그 몇 걸음이 유난히 길게 느껴졌다. 무대 위에서 우리는 나란히 섰다. 서하은이 내 손을 살짝 잡았다. 손끝이 차가웠다. "연기해요." 작게 속삭였다. 입술은 거의 움직이지 않았는데 그 말이 정확하게 귀에 박혔다. 프로는 프로구나. "어떻게요." "웃어요, 그냥." 나는 어색하게 웃었다. 이게 웃는 거 맞나. 아니야, 이건 그냥 입만 벌린 거다.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카메라 플래시가 쏟아졌다. 번쩍, 번쩍. 눈이 아팠다. 옆에서 서하은이 완벽한 각도로 고개를 살짝 기울이는 게 보였다. 나도 따라 해야 하나. 아니, 그건 너무 티가 날 것 같았다. 사회자가 몇 가지 질문을 던졌다. 만난 계기, 첫 인상, 서로에 대한 호감도 같은. 서하은은 미리 준비된 답을 물 흐르듯 뱉어냈다. 나는 옆에서 고개만 끄덕이거나 짧게 대답했다. "네, 맞아요." "그렇죠." 대본에도 없던 애드리브를 던질 자신이 없었다. 그때 진행자가 갑자기 나를 지목했다. "치유 적성을 실제로 보여주실 수 있나요?" 예정에 없던 요청이었다. 서하은의 손이 순간 굳었다. 손가락 끝이 내 손을 살짝 더 세게 쥐었다. 이거 사고 났다는 신호인가. 나도 모르겠다. 대기실에서 이런 시나리오는 들은 적이 없었다. "음, 저..." 내가 말을 더듬는 사이 스태프가 이미 준비된 듯 움직이고 있었다. 우연이 아니었다. 이건 다 계산된 거였구나. 순간 헛웃음이 나올 뻔했다. 이 방송판이 얼마나 치밀하게 짜여 있는지 새삼 깨달았다. 스태프가 다친 강아지 한 마리를 데려왔다. 다리를 절고 있었다. 작은 몸을 웅크리고 낑낑거리는 소리가 마이크에 그대로 잡혔는지 관객석에서 안타까운 탄식이 흘러나왔다. 나는 강아지 앞에 앉아 손을 뻗었다. 미열이 손바닥에서 퍼졌다. 작은 빛이 잠깐 손끝을 감돌았다. 이 순간만큼은 방송이든 아니든 상관없었다. 손끝의 감각에 집중했다. 다리뼈 어디쯤 실금이 갔는지, 어디가 부어 있는지, 그런 것들이 감각으로 흘러들어왔다. 늘 그렇듯 익숙한 흐름이었다. 강아지가 낑낑거리다가 이내 조용해졌다. 다리를 딛고 서서 꼬리를 흔들었다. 관객석에서 탄성이 터졌다. 와아아. 박수가 이어졌다. 사회자도 놀란 얼굴로 몇 마디를 더 붙였고, 카메라는 강아지와 내 손을 번갈아 클로즈업했다. 나는 그냥 멍하니 강아지 등을 쓰다듬었다. 이런 반응, 익숙하지 않았다. 서하은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표정에서 뭔가가 무너지는 게 보였다. 완벽하게 세팅되어 있던 그 미소가 아주 잠깐, 정말 1초도 안 되는 시간 동안 흔들렸다. 나만 본 건지 카메라에도 잡혔는지는 모르겠다. *** 행사가 끝나고 대기실로 돌아오는 길, 복도가 유난히 길게 느껴졌다. 형광등 불빛이 깜빡이는 것도 아닌데 계속 눈이 시렸다. 그녀가 처음으로 먼저 입을 열었다. "...진짜였네요." "뭐가요." "그 능력이요. 사기 아니었네." "의심했어요?" "당연히 의심했죠. 세상에 공짜인 게 있나요." 그 말투에 조금 웃음이 섞여 있었다.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방송용 미소도 아니고, 계약자를 대하는 사무적인 얼굴도 아니었다. 그냥, 사람 대 사람으로 웃는 것 같은. "그럼 지금까지는 뭐라고 생각한 거예요." "솔직히 말해요?" "네." "국가에서 급조한 설정인 줄 알았어요. 실제로 능력 있는 사람 구하기 힘들다고 들었거든요. 그래서 그냥... 적당히 사람 하나 데려다가 커플이라고 붙여놓은 거 아닌가, 하고." "저를 사기꾼으로 봤단 소리네요." "미안해요." 미안하다는 말이 그렇게 쉽게 나올 줄은 몰랐다. 나는 잠깐 멈춰 서서 그녀를 봤다. 화장은 그대로였는데 표정만 다른 사람 같았다. 그 순간, 복도 끝에서 낯익은 실루엣이 스쳐 지나갔다. 서하은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었다. 손끝이 파르르 떨리는 게 눈에 보였다. 방금까지 웃고 있던 그 얼굴이 채 몇 초도 안 되어서 새하얗게 질렸다. "저 사람..." 그녀가 말을 잇지 못했다. "누군데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가 않았다. 그녀의 눈동자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흔들리는 눈빛, 굳은 어깨, 살짝 뒷걸음질 치는 발.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하면서 몸은 정확히 반대로 움직이고 있었다. 복도 저편, 그 실루엣은 이미 모퉁이를 돌아 사라진 뒤였다. 나는 그저 그 방향을 멍하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딸깍. 어디선가 문 닫히는 소리가 났다. 서하은은 여전히 그 자리에 굳어 있었고, 나는 그녀의 손이 아직도 떨리고 있다는 걸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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