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퇴근길이었다.
야근을 마치고 나온 시간이 밤 열한 시를 넘기고 있었다.
회사 앞 편의점에서 산 캔커피를 손에 쥔 채, 나는 몸을 질질 끌듯이 걷고 있었다.
일주일째 이어진 야근이었다.
눈꺼풀이 무거웠고, 어깨는 돌덩이를 얹은 것처럼 뭉쳐 있었다.
그날은 딱히 특별한 날이 아니었다.
그냥, 늘 그렇듯 지친 하루의 끝이었을 뿐이었다.
횡단보도 앞에 서서 신호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스마트폰 화면을 멍하니 들여다봤다.
부재중 전화가 한 통 있었다.
어머니였다.
'내일 전화드려야지.'
그렇게 생각했다.
신호가 초록불로 바뀌는 순간, 나는 아무 생각 없이 발을 뗐다.
그리고 헤드라이트 두 개가 시야를 가득 채웠다.
너무 밝았다.
너무 빨랐다.
브레이크 소리는 없었다.
그냥 커다란 충격과, 몸이 붕 떠오르는 이질적인 감각뿐이었다.
세상이 느려지는 것 같으면서도, 동시에 모든 게 순식간에 지나갔다.
'아, 이거 죽는 건가.'
이상하게도 그 순간엔 그런 생각만 들었다.
서른도 안 된 나이에, 결혼도 못 해보고, 부모님한테 인사도 못 하고.
의식이 흩어지는 와중에도 그런 억울함들이 순서대로 스쳐 지나갔다.
마지막으로 떠오른 건 어머니의 부재중 전화 표시였다.
'그거 하나 못 받아드리고.'
그리고 다음 순간, 나는 눈을 떴다.
천장이 아니었다.
하늘이었다.
하지만 서울의 밤하늘이 아니었다.
낯선 별자리가 낯선 색으로 흩뿌려져 있었고, 두 개의 달이 떠 있었다.
달 하나는 붉었고, 다른 하나는 푸르스름했다.
'……뭐?'
나는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켰다.
몸에 아픈 곳이 없었다.
트럭에 치인 사람의 몸이라기엔 지나치게 멀쩡했다.
손을 들어 얼굴을 만져봤다.
내 얼굴이 맞았다.
옷도 그대로였다.
야근할 때 입고 있던 셔츠, 회사 로고가 박힌 넥타이까지.
주변을 둘러보니, 커다란 원형 문양이 바닥에 그려져 있었고, 그 문양 안에 내가 앉아 있었다.
문양은 은은한 빛을 내며 천천히 잦아들고 있었다.
바닥은 대리석처럼 차갑고 매끄러웠다.
벽에는 촛불이 줄지어 타오르고 있었고, 실내 공기에서는 향 비슷한 냄새가 났다.
낯설고 이질적인 향이었다.
그리고 그 앞에, 누군가가 서 있었다.
은발이었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긴 은발이 촛불 아래서 물처럼 흔들렸다.
눈동자는 벽안이었다.
짙은 청금석 같은 색이었다.
하얀 드레스 자락이 바닥에 닿을 듯 길었고, 그 위에 걸친 로브에는 낯선 문양들이 자수로 새겨져 있었다.
소녀 같기도 하고, 이미 무언가를 짊어진 어른 같기도 한 얼굴이었다.
나이를 가늠하기 어려웠다.
스물 초반일 수도, 그보다 더 어릴 수도 있었다.
그녀는 나를 보자마자 무릎을 꿇었다.
드레스 자락이 바닥에 넓게 퍼졌다.
'……뭐?'
나는 두 번째로 같은 생각을 했다.
머릿속이 하얗게 비었다.
방금까지 트럭에 치여 죽어가던 사람이, 지금은 낯선 여자가 무릎을 꿇은 앞에 앉아 있었다.
이게 무슨 상황인지, 뇌가 따라잡지를 못했다.
"소환에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녀가 고개를 숙인 채 말했다.
또렷한 한국어였다.
분명 이 세계 사람일 텐데, 왜 한국어가 들리는지는 나중에야 알았다.
소환된 자에게는 언어가 자동으로 통한다고, 그녀가 나중에 설명해주었다.
"저는 대연제국의 황녀, 연은서입니다."
그녀가 다시 고개를 들었다.
벽안이 흔들리고 있었다.
촛불에 비쳐 그 색이 더 짙어 보였다.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릴게요. 저와 결혼해 주세요."
나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죽었다가 살아난 것도 받아들이기 힘든데, 처음 만난 여자가 다짜고짜 결혼을 요구하고 있었다.
'이거 무슨 상황이야.'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죽었다 살았고, 이상한 세계로 왔고, 눈앞에 있는 여자는 자기가 황녀라면서 결혼하자고 하고.'
'하나씩만 좀 던져줬으면 좋겠는데.'
"저기요, 잠깐만요."
나는 겨우 입을 열었다.
목소리가 갈라져 나왔다.
"제가 지금 상황을 전혀 이해 못 하고 있는데요."
"죄송해요."
은서가 눈을 내리깔았다.
"순서가 뒤바뀐 건 알지만, 시간이 없어서요."
그녀의 목소리는 침착했지만, 손끝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무릎 위에 놓인 두 손이, 꽉 쥐어져 있었다.
그 떨림이 이상하게도 눈에 밟혔다.
죽음 앞에서도 이렇게까지 손을 떨었던가, 나는.
"저는 지금, 죽지 않기 위해서 당신이 필요해요."
방 안의 촛불이 순간 크게 흔들렸다.
바람 한 점 없는데도.
불꽃이 옆으로 길게 눕더니,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다.
나는 그 순간, 이 세계가 내가 알던 물리 법칙과는 다르게 돌아간다는 걸 실감했다.
'……촛불이 왜 저래.'
이성적으로 생각하려 했지만, 도무지 납득이 가지 않았다.
이곳에서는 상식이라는 게 통하지 않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등줄기를 스쳤다.
은서가 다시 입을 열려는 순간, 문 밖에서 다급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여러 명의 발소리였다.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황녀님!"
젊은 여자의 목소리였다.
문이 벌컥 열리고, 상궁 복장을 한 여인이 뛰어들었다.
숨이 턱까지 차 있었다.
머리는 흐트러져 있었고, 얼굴에는 핏기가 거의 없었다.
"장현도 공작이…… 지금 궁 안으로 들어오고 있습니다!"
은서의 얼굴에서 핏기가 빠져나갔다.
방금까지 침착하던 그 얼굴이, 순식간에 무너지고 있었다.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벌써요……?"
그녀가 낮게 되물었다.
목소리에 물기가 배어 있었다.
상궁이 다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정보다 이틀이나 빠릅니다. 서둘러야 합니다, 황녀님!"
나는 그 순간, 이 결혼 요청이 단순한 취향이나 감정 문제가 아니라는 걸 직감했다.
뭔가가, 아주 급박하게, 그녀를 벼랑 끝으로 몰아넣고 있었다.
'장현도 공작이라는 게, 뭐 하는 사람인데.'
'궁으로 들어오고 있다는 게, 무슨 뜻인데.'
그녀는 여전히 무릎을 꿇은 채,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벽안 가득 눈물이 차오르고 있었다.
"부탁드려요."
떨리는 목소리로, 그녀가 다시 말했다.
"제 편이 되어주세요. 지금 당장."
문밖의 발소리가, 점점 더 크고,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