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 ›말발굽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처음엔 그냥 바람 소리인 줄 알았다.
그런데 소리가 점점 규칙적으로 바뀌었다.
또각, 또각, 또각.
말굽이 궁 앞 돌바닥을 때리는 소리가 분명해졌다.
하연이 창문으로 다가가 조심스럽게 밖을 살폈다.
커튼 자락을 살짝 들어올리는 그녀의 손가락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서흔국의 기수입니다."
그녀의 목소리가 낮게 잠겼다.
은서의 표정이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방금 전까지 나와 눈을 맞추며 뭔가 설명해주던 얼굴이, 순식간에 다른 사람의 얼굴로 바뀌는 걸 봤다.
"이 시간에 왜……"
나는 서흔국이라는 이름을 처음 들었을 때부터, 그게 좋은 의미로 쓰이지 않는다는 걸 짐작하고 있었다.
'옆 나라구나. 근데 왜 밤중에 기수를 보내.'
'보통 이런 시간에 사람 보내는 건, 좋은 소식일 때가 아니지.'
하연이 재빨리 설명했다.
"서흔국은 대연제국 서쪽 국경을 맞댄 나라입니다. 왕자 선우진이 몇 해 전부터 국경을 넘나들며 세력을 넓히고 있습니다."
"그 왕자가 은서 씨랑 무슨 상관인데요?"
"청혼을 넣었습니다."
은서가 대신 대답했다.
목소리에 혐오가 섞여 있었다.
"두 번이나 거절했어요. 그런데도 계속 사람을 보내요."
"세 번째면 뭐가 다른데요?"
내가 물었다.
은서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 대신 창밖을 향한 시선이 더 굳어졌다.
말발굽 소리가 궁문 앞에서 멈췄다.
정적이 방 안을 가득 채웠다.
그 정적이 오히려 더 무서웠다.
잠시 후, 시녀 하나가 다급히 방으로 들어왔다.
숨이 거칠었다.
여기까지 뛰어온 게 분명했다.
"황녀님, 서흔국 사신이 서신을 전달했습니다."
은서가 서신을 받아 펼쳤다.
봉투를 뜯는 손끝이 조심스러웠다.
마치 그 안에 뭐가 들어있는지 이미 알고 있는 사람처럼.
그녀의 눈이 서신을 훑는 동안, 나는 그 표정이 점점 굳어가는 걸 지켜봤다.
눈동자가 좌우로 움직이다가, 어느 순간 딱 멈췄다.
"성년식 전에 답을 달라는군요."
그녀가 서신을 접었다.
접는 손길이 평소보다 세게 눌러졌다.
종이가 구겨지는 소리가 방 안에 크게 울렸다.
"거절하면, 국경에서 군사를 움직이겠다고요."
방 안이 침묵에 잠겼다.
하연도 아무 말이 없었다.
시녀도 고개를 숙인 채 미동이 없었다.
나는 그제야 이 결혼 요청이 얼마나 다층적인 문제인지 실감했다.
대귀족은 내부에서 압박하고, 서흔국은 외부에서 압박하고 있었다.
둘 다 이 소녀 하나를 손에 넣으려고 이를 갈고 있었다.
'하나는 안에서, 하나는 밖에서.'
'이 나라 전체가 저 사람 하나를 두고 싸우는 것 같은데.'
"이제 시간이 정말 없어요."
은서가 나를 돌아보았다.
눈빛이 조금 전과 달랐다.
두려움 대신 결심이 담겨 있었다.
"내일 아침, 위장 신분을 만들어서 정식으로 궁에 들여야 해요."
하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몰락한 백작가의 방계 자손, 강 도윤이라는 이름으로 신원을 세우겠습니다. 오래전 국경 지역으로 이주했다가 최근에 귀환한 것으로 하겠습니다."
나는 순간 어색한 웃음이 나왔다.
'며칠 전만 해도 회사에서 엑셀 시트나 만지던 사람인데.'
'강 도윤이라니. 이름도 낯설다.'
갑자기 백작가 후손이 되는 게 실감이 나지 않았다.
내 이름도 아닌 이름을, 내 것처럼 써야 한다는 게.
하지만 지금은 웃을 상황이 아니었다.
방 안의 두 사람 다 웃지 않고 있었으니까.
"내일부터 뭘 하면 되나요?"
내가 물었다.
목소리를 최대한 차분하게 유지하려고 했다.
"내일 정오, 황실 회의에서 황녀님의 배필로 공표될 겁니다."
하연이 말했다.
"그 자리에는 대귀족들이 모두 참석합니다. 그중에서도 장현도 공작이 가장 위험한 인물입니다."
"공작이 절 알아볼까요?"
"소환된 직후라 얼굴을 아는 사람은 없습니다. 다만……"
하연이 말을 흐렸다.
말을 흐릴 때마다 심장이 한 번씩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다만요?"
"소환자 특유의 기운이 있습니다. 감정이 격해지면 자연스럽게 드러날 수 있습니다."
나는 그 말에 미묘한 불안을 느꼈다.
'감정이 격해지면 드러난다니.'
'그럼 화나면 안 되는 거네. 놀라도 안 되고.'
'그게 제일 어려운 거잖아.'
은서를 보니, 그녀 역시 나와 같은 걸 걱정하는 눈치였다.
미간이 살짝 좁아진 채, 손가락으로 서신 끝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내일은 최대한 침착하게 계셔야 해요."
은서가 진지하게 말했다.
"공작은 사람을 자극하는 데 능해요. 화나게 만들어서 반응을 끌어내려 할 거예요."
"어떤 식으로요?"
"모욕을 줄 수도 있고, 도발적인 질문을 던질 수도 있어요. 뭐든 견뎌내야 해요."
"노력해볼게요."
나는 대답하며 속으로 생각했다.
'화 안 내는 거야 자신 있는데.'
'문제는 저 사람들이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는 거지.'
'회사에서 진상 손님 상대할 때도 안 흔들렸으니까, 이것도 비슷하려나.'
'……비슷할 리가 없지.'
그날 밤, 나는 처음으로 이 궁의 손님방에서 잠을 청했다.
낯선 천장, 낯선 냄새, 낯선 침대.
이불에서는 이상하게도 마른 풀 같은 향이 났다.
그리고 내일부터는 낯선 이름으로 살아야 한다는 사실.
강 도윤.
몰락한 백작가의 방계 자손.
입 안으로 몇 번이고 되뇌어봤다.
그럴수록 오히려 더 낯설어졌다.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았다.
창밖으로 두 개의 달이 여전히 떠 있었다.
하나는 크고 붉었고, 하나는 작고 푸르렀다.
이 세계에 온 첫날부터 봤던 그 달이었다.
'죽은 줄 알았는데.'
'이렇게 다시 시작하게 될 줄은 몰랐네.'
'엑셀 시트 만들다 죽어서, 백작가 후손으로 다시 산다니.'
'누가 들으면 웃기다고 하겠지.'
그렇게 뒤척이던 중, 문 밖에서 낮은 발소리가 들렸다.
나는 몸을 일으켰다.
심장이 순식간에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발소리는 느렸다.
일부러 조심하는 듯한 걸음이었다.
문틈으로 그림자 하나가 스쳐 지나가는 게 보였다.
분명 하연이나 은서의 걸음걸이는 아니었다.
두 사람의 걸음은 가볍고 규칙적이었는데, 이 발소리는 무겁고 불규칙했다.
한 걸음, 한 걸음마다 뭔가를 계산하는 듯한.
나는 숨을 죽인 채 그 그림자가 사라진 방향을 바라봤다.
방 안의 어둠이 갑자기 훨씬 짙어진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