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 ›"모르겠다는 게 무슨 뜻이에요?"
나는 다시 물었다.
은서는 대답 대신 고개를 저었다.
그녀의 시선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손끝이 옷자락을 꽉 움켜쥐고 있었다.
나는 그 손을 보면서, 이 소녀가 지금 뭔가를 억누르고 있다는 걸 알았다.
"상궁 어른, 이제 말씀해 주세요."
그녀가 옆에 서 있던 상궁을 돌아보았다.
상궁의 이름은 하연이라고 했다.
머리는 은백색으로 단정하게 틀어 올렸고, 옷차림은 짙은 남색 궁중복이었다.
나이는 오십 안팎으로 보였는데, 눈빛만은 젊은 사람보다 더 날카로웠다.
하연은 잠시 망설이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황후 폐하께서는…… 반란 직후 실종되셨습니다."
"실종이요?"
내 목소리가 살짝 갈라졌다.
"공식적으로는 그렇게 발표되었습니다."
하연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하지만 저는, 다른 소문을 들었습니다."
은서의 눈이 크게 떠졌다.
숨소리가 순간 멈춘 것 같았다.
"무슨 소문이요?"
"장현도 공작 가문에…… 유폐되어 계신다는 소문입니다."
그 순간, 방 안의 온도가 확 떨어지는 것 같았다.
착각이 아니었다.
정말로, 공기가 차가워졌다.
나는 은서의 손이 하얗게 질리는 걸 보았다.
손끝부터 핏기가 사라지듯, 색이 점점 빠져나갔다.
"왜 지금까지 말하지 않았어요?"
은서의 목소리가 날카로워졌다.
"삼 년이나요. 삼 년 동안 그걸 알고 있었으면서!"
목소리가 방 전체를 긁는 것처럼 울렸다.
하연이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이마가 거의 바닥에 닿을 정도로 몸을 낮췄다.
"확실하지 않은 정보였습니다. 잘못 알려드렸다가 황녀님께서 위험한 행동을 하실까 두려워서……"
"두려워서요?"
은서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의자가 뒤로 밀리며 바닥을 긁는 소리가 났다.
방 안의 공기가 다시 무겁게 가라앉았다.
숨을 쉬는 것조차 조심스러워졌다.
창밖에서 바람 소리가 이상하게 커졌다.
휘이이잉.
바람이 창틀을 두드리는 소리가 아니었다.
뭔가 안에서부터 새어 나오는 소리였다.
나는 그 순간, 그녀의 분노가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진짜 힘으로 변하고 있다는 걸 느꼈다.
탁자 위 촛대가 저절로 부르르 떨렸다.
촛불이 옆으로 길게 늘어지듯 흔들렸다.
벽에 걸린 그림도 살짝 기울어졌다가 도로 제자리로 돌아왔다.
'이거, 진짜구나.'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이 세계, 진짜 마법 같은 게 있는 세계구나.'
머리로는 알고 있었는데, 눈으로 보는 건 또 다른 느낌이었다.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하지만 동시에, 이 소녀를 그냥 두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더 강하게 들었다.
"은서 씨."
나는 그녀의 이름을 처음으로 불렀다.
그녀가 흠칫하며 나를 돌아보았다.
눈동자에 물기가 그득 차 있었다.
"일단 진정하세요. 화내는 건 나중에 해도 돼요."
내 말에 그녀는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천천히, 아주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한 번, 두 번.
숨을 뱉을 때마다 방 안의 떨림이 조금씩 잦아들었다.
촛불도 다시 곧게 서기 시작했다.
"……미안해요."
그녀가 다시 자리에 앉았다.
목소리에서 방금 전의 날카로움이 다 빠져나가 있었다.
대신 그 자리엔 지친 기색만 남아 있었다.
하연은 여전히 바닥에 엎드려 있었다.
등이 살짝 떨리고 있는 게 보였다.
나는 그 광경을 보며 생각을 정리했다.
'황제는 죽고, 황후는 어딘가에 갇혀 있고, 대귀족은 그걸 알면서 숨겼다.'
'그리고 이 소녀는, 두 달 후면 강제로 결혼당한다.'
머릿속에서 정보들이 하나씩 정리되어 갔다.
결론은 하나였다.
이 세계에 온 게 우연이든 필연이든, 나는 이미 발을 들여놓은 것이다.
돌아갈 방법도 모르는 채, 여기 이 방 안에 앉아 있는 것이다.
"결혼, 받아들일게요."
내가 말했다.
목소리가 스스로 듣기에도 낮고 단단했다.
은서가 놀란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진심이세요?"
"솔직히 무섭기도 해요."
나는 솔직하게 인정했다.
숨기고 싶지 않았다.
"근데 여기서 도망칠 곳도 없잖아요. 이미 한 번 죽었는데, 이제 와서 겁먹어봤자 뭐가 달라지겠어요."
말을 하면서, 나 스스로도 조금 놀랐다.
이 말이 이렇게 쉽게 나올 줄은 몰랐다.
은서의 눈에 눈물이 차올랐다.
눈꼬리가 붉어지고, 입술이 살짝 떨렸다.
하지만 그녀는 곧 표정을 다잡았다.
손등으로 눈가를 한 번 훔치고, 다시 허리를 곧게 세웠다.
"고맙습니다. 그런데……"
그녀가 말을 흐렸다.
"그런데요?"
"이대로 정식 발표를 하면, 당신은 바로 대귀족들의 표적이 될 거예요."
그 말에 방 안이 다시 조용해졌다.
하연이 몸을 일으키며 끼어들었다.
무릎을 꿇었던 자세에서 천천히 일어나, 두 손을 앞으로 모았다.
"방법이 하나 있습니다."
그녀의 눈빛이 진지했다.
조금 전까지 죄인처럼 엎드려 있던 사람이 아니라, 다시 상궁의 얼굴로 돌아와 있었다.
"강도윤 님을 소환자라는 사실을 숨기고, 몰락한 방계 황족의 후손으로 위장하는 겁니다."
"위장이요?"
"소환된 존재는 특별한 힘을 얻습니다."
하연이 설명을 이었다.
"만약 그 힘이 드러나면, 대귀족들이 더욱 위험하다고 판단해 먼저 손을 쓸 겁니다. 차라리 평범한 방계 혈통으로 알려지는 게 안전합니다."
나는 그 말에 살짝 긴장했다.
'특별한 힘이라니, 나한테?'
아직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몸도 그대로였고, 딱히 뭔가 달라진 감각도 없었다.
하지만 이 세계의 규칙이 그렇다면, 언젠가는 드러날 문제였다.
방금 은서가 촛불을 흔들었던 것처럼, 나도 언젠가 무언가를 흔들게 될지도 모른다.
그 생각이 들자 손끝이 조금 떨렸다.
은서가 나를 바라보았다.
"위험한 부탁이라는 건 알아요. 그래도, 받아들여 주실 수 있나요?"
나는 잠시 눈을 감았다.
머릿속으로 여러 생각들이 스쳐 지나갔다.
원래 세계로 돌아갈 방법도 모르고, 이 세계에서 믿을 사람도 거의 없다.
그나마 지금 눈앞에 있는 이 소녀와 상궁이, 내가 처음으로 마주한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시작한 거니까요."
은서의 얼굴에 처음으로 옅은 미소가 번졌다.
그 미소를 보는 순간, 나도 모르게 마음 한구석이 조금 놓였다.
하지만 그 미소는 오래가지 못했다.
창밖에서 말발굽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또각, 또각, 또각.
처음엔 하나였던 소리가, 점점 여러 마리의 발굽 소리로 겹쳐 들렸다.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규칙적인 속도였다.
하연의 얼굴이 다시 굳었다.
방금까지 진지하게 설명하던 표정이 순식간에 경계로 바뀌었다.
"이 시간에…… 누구지요?"
그녀가 창가로 다가가며 중얼거렸다.
은서도 자리에서 조용히 일어섰다.
나는 그 둘의 표정만으로도, 이게 좋은 소식이 아니라는 걸 직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