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죽기 직전 마지막으로 본 화면은 빌드 에러 로그였다. 새벽 세 시, 판교 한빛게임즈 사옥 8층, 파티션 안쪽 자리에서 나는 3일째 같은 씬을 붙잡고 있었는데, 크런치 모드가 시작된 지 벌써 47일째였고, 커밋 로그에는 내 이름이 하루도 빠짐없이 새벽 시간대로 찍혀 있었다. 김도현, 29세, 게임 개발자, 그게 나였다.
모니터 세 대가 나란히 켜져 있었다. 왼쪽 화면엔 유니티 콘솔이, 가운데엔 씬 뷰가, 오른쪽엔 슬랙 채팅창이 떠 있었는데, 그 슬랙 채팅창에는 팀장이 새벽 두 시 오십 분에 남긴 메시지가 그대로 박혀 있었다.
[팀장] 도현씨 그거 내일 오전까지 되죠?
[팀장] 안되면 안되는대로 말해요 미리
[팀장] ㅋㅋ 아 되겠죠 뭐
되겠죠, 라는 세 글자 뒤에 붙은 웃음표시가 유독 눈에 밟혔다. 나는 그 웃음표시를 세 번쯤 째려보다가 다시 코드로 눈을 돌렸는데, 컴파일이 끝나지 않는 씬 하나 때문에 밤을 새우는 게 벌써 세 번째였다. 커피는 다섯 잔째였고, 손가락 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때는 그게 카페인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빌드 버튼을 눌렀다. 진행 바가 절반쯤에서 멈췄다. 에러 로그가 붉은 글씨로 쏟아졌다.
씨발, 진짜?
나는 그 순간 사표를 내기로 결심했다. 정확히는, 그 결심이 마지막 결심이 될 줄은 몰랐다.
심장이 이상하게 뛴다고 느낀 건 바로 그 직후였다. 인과율이 억까를 부린다는 말이 있다면 딱 그 순간을 위해 만들어진 말이었을 것이다. 왼쪽 가슴이 조여오고 시야가 좁아지면서, 나는 키보드 위로 고개를 처박았다. 마지막으로 눈에 들어온 건 F 키와 G 키 사이의 틈이었다. 그 좁은 틈 사이로 의식이 빠져나갔다.
동료들이 나를 발견한 건 그로부터 세 시간 뒤였다고 나중에 전해 들었다. 구급대원이 왔을 때 이미 손가락이 굽은 상태였다는 말도 함께.
그리고 눈을 떴을 때, 나는 빛 속에 있었다.
색도 없고, 무게도 없고, 위아래도 없는 공간이었다. 발밑에 바닥이 있는지조차 확신할 수 없었는데, 이상하게도 두렵지는 않았다. 오히려 지긋지긋한 알람 소리가 안 들려서 편안하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환영해요, 도현 씨." 여자의 목소리가 사방에서 울렸다. 형체는 있는데 윤곽이 자꾸 흐트러지는, 마치 렌더링이 덜 끝난 3D 모델 같은 존재가 내 앞에 서 있었다. 머리카락이 빛 속에서 물결처럼 흘렀고, 눈동자는 초점을 잡을 수 없을 만큼 깊었다. "나는 다경이라고 해요. 이 세계의 풍요와 자비를 관장하는 여신이죠."
여신이라니. 씨발, 진짜냐. 나는 죽어서도 냉소를 잃지 않는 인간이었다.
"저는 죽었습니까." 나는 물었다.
"네." 다경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그 즉답이 오히려 신뢰가 갔다. 적어도 돌려 말하는 신은 아니었다. "그리고 저는 당신에게 부탁이 있어서 이렇게 만났어요."
부탁이라는 말이 나오자마자 등줄기에 소름이 돋았다. 여신이 인간에게 부탁을 한다는 것 자체가 뭔가 심각하게 잘못됐다는 뜻이었으니까. 게임 기획할 때도 그랬다. NPC가 갑자기 플레이어한테 굽신거리면, 그건 백 퍼센트 뒤에 함정이 있다는 뜻이었다.
"천 년 동안 제 이름을 빌려서 사람을 사고파는 나라가 있어요." 다경의 목소리가 처음으로 흔들렸다. 흔들림이라기보다는, 오래 참아온 무언가가 살짝 균열을 낸 소리였다. "저는 그걸 막을 힘이 없어요. 신의 권능은 이 세계의 법칙 안에서만 움직이거든요. 그런데 당신 같은 사람이라면, 그 법칙을 다르게 쓸 수 있을지도 몰라요."
"저 같은 사람이요?"
"시스템을 분석하고, 구조를 뜯어보고, 최적의 방법을 찾아내는 사람." 다경이 웃었다. 그 웃음이 이상하게도 슬퍼 보였다. 마치 웃는 법을 잊어버린 사람이 오래된 기억을 더듬어 흉내 내는 것처럼. "저는 당신에게 감정(鑑定)의 축복과 마법 자유도를 드릴 거예요. 너 자신에게도 써봐, 그것도 두 번이나. 이 힘은 네가 감당할 수 있는 만큼만 보여줄 거야, 무리하지 마. 대신 부탁이 하나 있어요. 한 명씩이라도, 구해주세요."
한 명씩이라도. 그 말이 이상하게 무겁게 들렸다. 전부 구해달라는 말도 아니고, 세상을 바꿔달라는 말도 아니고, 그냥 한 명씩이라도. 그 소박함이 오히려 이 여신이 얼마나 오래 절망해왔는지를 보여주는 것 같았다.
나는 그 말을 다 이해하기도 전에 의식이 다시 어두워졌다.
다시 눈을 뜨자 나는 갓난아기였다. 정확히는, 갓난아기의 몸에 갇힌 29세 게임 개발자였다.
시야가 흐릿하고, 손발이 내 의지대로 움직이지 않고, 목소리는 응애 소리밖에 나오지 않는 몸. 처음 며칠은 그 낙차 자체가 공포였다. 서른 줄에 가까운 정신이 갓난아기 몸에 들어가서 느끼는 무력감은, 크런치 때 느꼈던 무력감과는 종류가 완전히 달랐다. 적어도 그때는 손가락은 움직였으니까.
서하 변경백가의 삼남, 서하 하윤. 그게 내 새 이름이었다.
7년이 지났다.
아버지 서하 강호는 큼직한 체격에 목소리가 우렁찬 변경백이었고, 어머니 유서연은 조용하고 자상한 사람이었으며, 위로는 장형 태랑과 차형 진우, 누나 아린이 있었다. 나는 그중에서도 가장 몸이 약한 삼남이었는데, 마력도 신체 능력도 형제들에 비해 초라했다. 형들이 목검을 휘두르며 마력을 뿜어낼 때, 나는 그 옆에서 숨만 쉬어도 어지러웠다. 귀족 사회에서 서열은 곧 힘이었고, 나는 그 힘의 맨 밑바닥이었다.
의사들이 몇 번이나 내 몸을 살피고 갔다. 마력 회로가 좁다, 심장이 약하다, 장수는 어려울 것이다, 등등의 말들이 어린 내 귀에도 또렷하게 들어왔다. 어머니는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얼굴이 하얘졌고, 아버지는 아무 말 없이 창밖만 바라보았다. 나는 그런 분위기 속에서도 이상하게 초연했는데, 어차피 한 번 죽어본 몸이라 그런 건지, 아니면 그냥 무뎌진 건지 알 수 없었다.
왕도에 처음 올라온 것은 아버지의 볼일을 따라온 참이었다. 마차 안에서 나는 창밖으로 스쳐 가는 풍경을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고 눈을 크게 뜨고 있었다. 변경의 흙길과는 다른, 돌로 촘촘히 깐 대로, 그 위를 걷는 사람들의 옷차림, 상점가의 간판들. 게임 기획자였던 습관이 몸에 남아 있어서인지, 나는 자연스럽게 이 세계의 구조를 눈에 담기 시작했다.
집사 박현수가 내 손을 잡고 저잣거리를 걷다가, 나는 처음으로 노예 경매장을 보았다.
나무 단상 위에 아이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목에는 밧줄 대신 얇은 마력 목걸이가 걸려 있었는데, 도망치려는 시도만으로도 전신에 통증을 가한다고 했다. 경매사의 목소리가 유쾌하게 울려 퍼졌고, 사람들은 아무렇지 않게 그 아이들의 값을 흥정했다.
"자, 다음은 여덟 살짜리 계집아이입니다! 튼튼하고 손이 야무져서 시중 들리기 딱 좋습니다!"
웃음소리가 섞여 나왔다. 누군가는 부채질을 하며 하품을 했고, 누군가는 옆 사람과 잡담을 나누며 손가락으로 가격을 흔들었다. 그 무심함이, 그 익숙함이, 오히려 더 소름 끼쳤다.
"저건 뭡니까." 나는 박현수에게 물었다.
"노예 시장입니다, 도련님." 그의 목소리는 건조했다. 마치 날씨 얘기를 하듯 무덤덤했다. "이 나라에서는 흔한 풍경이지요."
흔한 풍경. 그 말이 머릿속에서 몇 번이고 반복됐다. 흔한 풍경, 흔한 풍경, 흔한 풍경. 마치 버그인데도 아무도 리포트하지 않아서 그냥 스펙으로 굳어버린 기능처럼, 이 세계는 그 잔혹함을 아무 저항 없이 삼키고 있었다.
그때, 단상 위의 아이 하나와 눈이 마주쳤다. 아홉 살쯤 되어 보이는 아이였는데, 표정이 없었다. 두려움도, 분노도, 슬픔도 없이 그냥 텅 비어 있는 눈이었다. 감정이 완전히 소진된 얼굴, 조상신도 버린 듯한 표정.
손끝이 떨렸다.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나는 그 아이의 눈을 피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어쩌면 그게 내가 해줄 수 있는 유일한 것이었는지도 몰랐다. 적어도 누군가는 너를 봤다고, 그 시선 하나라도 남겨주고 싶었는데.
나는 7세였다. 마력도 약하고 서열도 낮은 변경백가의 삼남이었다. 저 아이를 구할 방법이 없었다.
머릿속으로 온갖 계산이 빠르게 돌았다. 내가 가진 것은 뭐지. 용돈은 얼마 남았지. 박현수를 졸라서 저 아이를 사달라고 하면, 아버지한테 뭐라고 설명하지. 그리고 산다 한들, 그 다음은 어떻게 하지. 계산은 계속 돌아가는데, 결론은 하나였다.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 무력감이 나를 통째로 삼켰다. 마치 밤새 붙잡고 있던 빌드가 결국 컴파일에 실패했을 때의 그 기분과 닮아 있었다. 시간은 흘렀고, 애를 썼는데, 결과는 붉은 에러 로그뿐인 그 기분.
경매사가 그 아이의 가격을 외쳤다. 손이 올라갔다. 낙찰됐다.
아이는 아무런 저항 없이 새 주인을 따라 사라졌다.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저항도, 눈물도 없었다. 그게 더 마음에 걸렸다. 저항할 힘조차 소진된, 이미 여러 번 팔려본 아이라는 뜻이었으니까.
나는 그 뒷모습을 끝까지 지켜보았다. 인파 속으로 사라질 때까지, 그 조그만 등이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박현수는 내 손을 다시 잡고 걸음을 옮겼다. "가시죠, 도련님. 숙소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의 목소리에는 어떤 감정도 묻어 있지 않았다. 나는 그 손에 끌려가면서도 계속 뒤를 돌아봤다.
그날 밤, 여관방 침대에 누워서야 다경의 말을 다시 떠올렸다. 한 명씩이라도 구해달라는 부탁을.
천장을 바라보며 나는 생각했다. 감정의 축복이라는 게 대체 뭔지, 마법 자유도라는 게 어느 정도의 범위인지, 나는 아직 아무것도 시험해보지 않았다. 7년 동안 그저 약한 몸으로 숨죽이며 살아왔을 뿐이었다. 하지만 오늘 그 아이의 눈을 본 순간, 뭔가가 명확해졌다. 더 이상 관찰자로만 남아 있을 수는 없다는 것.
나는 아직 몰랐다. 그 부탁이 앞으로 내 인생 전체를 뒤흔들 계기가 될 거라는 사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