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 ›여관방의 어둠 속에서 나는 눈을 감고 다경이 준 축복을 처음으로 제대로 불러보았다. 낡은 침대 매트리스는 삐걱거렸고, 창문 틈으로 들어오는 달빛이 방바닥에 길게 그림자를 그렸다. 이런 상황에서 스킬을 실험한다는 게 우습기도 했지만, 게임 개발자로 십 년 가까이 살아온 몸뚱이는 새로운 시스템을 마주하면 일단 파고들고 봐야 하는 병이 있었다.
[감정]이라는 단어가 머릿속에 떠오르자마자, 나는 습관대로 그것을 시스템 창처럼 상상했다. 로딩 화면 같은 감각이 지나가고, 곧 텍스트가 눈앞에 펼쳐졌다.
[대상: 서하 하윤]
[마력 구조: 분석 중...]
[오류. 오류. 오류.]
뭐야, 이거.
나는 눈을 번쩍 떴다.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뭐가 잘못됐길래 오류가 세 번이나 뜨는 건데. 버그인가, 아니면 애초에 자기 자신은 대상으로 지정이 안 되는 시스템인가. 아니, 그럴 리가 없었다. 다경은 분명 "너 자신에게도 써봐"라고 했다. 그것도 두 번이나.
다시 시도했다. 결과는 같았다.
세 번째 시도에서는 코피가 살짝 터졌다. 손등으로 코 밑을 훑자 붉은 얼룩이 묻어났다.
아, 조졌다.
나는 손으로 코를 문지르며 생각했다. 축복을 받았는데 축복이 제대로 작동을 안 해. 이게 무슨 시나리오냐. 회사 다닐 때도 이런 버그는 QA팀이 열 번은 리포트했을 텐데, 여긴 QA팀도 없고 패치노트도 없다. 그냥 나 혼자 삽질하다 죽는 거다.
다경이 축복을 걸어주며 했던 말이 떠올랐다.
"이 힘은... 네가 감당할 수 있는 만큼만 보여줄 거야. 무리하지 마."
그때는 그 말이 다정한 경고인 줄로만 알았는데, 지금 와서 보니 뭔가 더 구체적인 의미가 있었던 것 같았다. 감당할 수 있는 만큼만 보여준다는 게, 특정 대상에 대해서는 아예 접근을 막아버린다는 뜻이었을까.
다음 날, 저택으로 돌아오는 마차 안에서도 나는 몰래 [감정]을 몇 번 더 시도해봤다. 마차 바퀴, 마부의 채찍, 창밖으로 지나가는 나무들. 눈에 걸리는 것마다 손끝으로 스킬을 흘려보냈다.
[마차 바퀴: 목재, 내구도 78%.]
[채찍: 가죽, 마모도 44%.]
[가도변 나무: 수령 12년, 생장 상태 양호.]
사물에 대해서는 스킬이 멀쩡하게 작동했다. 숫자도 깔끔하게 나오고, 오류 한 번 없었다. 심지어 마부가 아침에 뭘 먹었는지까지 유추할 수 있을 것 같은 디테일이었다.
그런데 나 자신을 대상으로 하면, 매번 오류가 떴다.
왜지.
나는 마차 흔들림에 몸을 맡긴 채 그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봤다. 게임 개발자로서의 감이 발동했다. 시스템이 특정 값을 은폐하고 있을 때 이런 식의 오류가 뜨는 경우가 있었다. 서버 쪽에서 클라이언트에게 보여주면 안 되는 값을 억지로 렌더링하려 할 때, 혹은 접근 권한이 막힌 데이터에 쿼리를 던졌을 때. 화면에는 그냥 "오류"라고만 뜨지만, 뒤에서는 뭔가가 의도적으로 차단당하고 있는 거다.
의도적으로 숨긴 파라미터, 혹은 접근 권한이 막힌 데이터.
마력 구조 자체에 뭔가 있다는 뜻이었다.
이 세계의 마법 체계에는 뭔가 숨겨진 구조가 있다. 그리고 그 구조가 노예제와 무관하지 않을 거라는 직감이 들었다. 다경이 말했던, 신의 권능조차 뜯어고칠 수 없는 법칙이라는 게 바로 이거였을까.
확신은 없었다. 하지만 마음 한구석에서 뭔가가 딱 들어맞는 느낌이 들었다. 조각이 맞물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는데, 그 조각이 뭘 완성하는 그림인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
그로부터 사흘 뒤, 아버지의 상단 일로 다시 왕도 근처 마을에 들를 일이 생겼다. 나는 박현수를 졸라 그 노예 시장 근처를 다시 지나가게 됐다.
"도련님, 이 길로 가면 좀 돌아가는데요."
"괜찮아. 구경 좀 하고 싶어서."
박현수는 이상하다는 눈으로 나를 한 번 쳐다봤지만, 별말 없이 마차를 그쪽으로 몰았다.
시장 골목은 예전과 다름없었다. 사람들의 소음, 흥정하는 목소리, 짐수레 끄는 소리가 뒤섞여 있었고, 그 사이사이로 목줄이 채워진 이들이 눈에 띄었다. 나는 그 풍경을 애써 익숙한 척 훑어보다가, 우연히도 그 아이를 다시 보게 됐다.
새 주인이 그 아이를 물류창고 앞에 세워두고 짐을 나르게 하고 있었다. 나무 상자 하나가 아이 몸통보다 큰데, 그걸 두 팔로 끌어안고 옮기는 모습이 위태로웠다. 아이의 표정은 여전히 텅 비어 있었지만,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는 게 보였다.
나는 아무도 안 보는 틈을 타서 그 아이를 향해 [감정]을 시도했다.
[대상: 미확인]
[감정 상태: 절망 97%, 공포 82%, 무력감 99%.]
[마력 잔존량: 0.3%.]
0.3퍼센트. 거의 다 죽은 마력이었다. 그런데 그 숫자를 보는 순간, 나는 뭔가 이상한 걸 발견했다.
[특이사항: 마력의 흐름이 일방적으로 억류되어 있음. 외부 개입 시 방출 가능성 있음.]
외부 개입 시 방출 가능성.
손가락 끝이 떨렸다. 등줄기에 소름이 확 돋았다. 이게 무슨 뜻이지. 저 아이의 마력이 완전히 죽은 게 아니라, 어딘가에 갇혀 있을 뿐이라는 건가. 마력 잔존량 0.3퍼센트라는 숫자는 죽음 직전의 상태를 뜻하는 게 아니라, 억지로 눌려서 그렇게 보이는 값일 수도 있다는 거다.
마른침을 삼켰다. 심장이 다시 철렁 내려앉았다.
나는 다시 한 번 [감정]을 시도했다. 이번에는 조금 더 깊게, 다경에게 배운 방식대로 마력을 살짝 흘려보내면서. 손바닥이 뜨거워지는 느낌이 들었고, 관자놀이 쪽에서 미세한 두통이 올라왔다.
순간 그 아이의 눈이 살짝 흔들렸다.
아주 잠깐이었다. 정말 눈 한 번 깜빡이는 시간보다도 짧았다. 하지만 분명히 뭔가가 반응했다. 텅 비어 있던 눈동자에 아주 미세한 초점이 잡히는 것 같았다.
나는 그 자리에서 얼어붙은 채로 그 광경을 지켜봤다. 안면 근육이 굳었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이거였다. 이게 바로 다경이 말한, 노예제를 정당화하는 보이지 않는 저주 같은 구조에 대한 첫 번째 균열이었다.
머릿속으로 온갖 가설이 뒤섞여 지나갔다. 마력이 강제로 봉인된 상태라면, 그 봉인을 건 게 누구인지, 어떤 방식인지, 그리고 그걸 풀 수 있는 방법이 있는지. 게임으로 치면 히든 스탯이 락(lock)이 걸려 있는 상태였고, 그 락을 푸는 키가 어딘가에 존재한다는 뜻이었다.
"도련님, 이제 가셔야 합니다." 박현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급히 몸을 돌렸다. 심장은 여전히 가라앉지 않았고, 손바닥에는 식은땀이 배어 있었다.
마차에 오르면서도 나는 계속 뒤를 돌아봤다. 그 아이는 여전히 그 자리에서 상자를 나르고 있었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그날 밤, 나는 방 안에서 혼자 그 숫자를 다시 떠올렸다. 0.3퍼센트. 그리고 방출 가능성. 종이에 적어보려다가 손이 떨려서 관뒀다. 대신 눈을 감고 그 텍스트를 몇 번이고 되새겼다.
내 안에서 뭔가가 확실해졌다. 나는 이 힘으로 저 아이를 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방법이 뭔지는, 아직 전혀 알지 못했다.
그리고 나는 그 순간까지도, 이 작은 균열 하나가 앞으로 얼마나 큰 파장을 일으킬지 전혀 짐작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