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여인왕국의 대장장이 소년

4화

시제품 제작은 생각보다 훨씬 더 지루하고 힘든 작업이었다. 공방 안은 늘 쇠 냄새와 화약 냄새가 뒤섞여 있었다. 다솜은 매일 아침 일찍 나와 화로에 불을 올렸고, 도현은 그 옆에서 종이 뭉치를 펼쳐놓고 계산을 되풀이했다. 전생의 기억은 형태는 있었지만 숫자는 없었다. 관의 두께, 화약의 밀도, 뇌관의 위치까지, 모든 것을 다시 손으로 확인해야 했다. 첫 번째 시제품은 관이 터졌다. 쾅- 불길이 순간적으로 치솟았고, 파편이 사방으로 튀었다. 화약의 밀도를 잘못 계산한 탓이었다. 다솜의 눈썹이 그을렸고, 도현의 손등에 화상이 남았다. 매캐한 연기가 공방 안을 가득 채웠다. "다시." 다솜이 짧게 말했다. 표정에 짜증은 없었다. 오히려 눈이 반짝이고 있었다. "눈썹이 타셨습니다." 도현이 그녀의 얼굴을 보며 말했다. "눈썹 따위는 다시 자란다." 다솜이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 "관이 터진 이유부터 적어." 도현은 그 말에 순순히 종이를 펼쳤다. 두 번째 시제품은 못이 발사되지 않았다. 뇌관의 위치가 틀렸기 때문이다. 방아쇠를 당겨도 그저 딸깍, 하는 무의미한 소리만 났다. 도현은 관 속을 들여다보며 뇌관과 못의 거리를 다시 계산했다. 세 번째는 발사는 됐지만 반동으로 손목이 꺾일 뻔했다. 퍽- 못이 튀어나가는 순간, 손목이 뒤로 확 젖혀졌다. 도현이 신음을 삼키며 손목을 붙잡았다. 다솜이 다가와 손목을 이리저리 돌려보더니 혀를 찼다. "손잡이 각도가 문제군. 힘이 손목으로 다 몰렸어." "고정할 방법이 필요합니다." 도현이 손목을 주무르며 말했다. "그건 네가 생각해." 다솜이 팔짱을 끼며 말했다. "나는 쇠를 다룰 줄 알지만, 이 물건이 어떻게 굴러가야 하는지는 네 머릿속에만 있으니까." 도현은 매번 실패의 원인을 종이에 적었다. 전생의 기억 속 화기 구조는 대략적인 형태로만 남아 있었고, 세부 수치는 결국 실험으로 채워야 했다. 종이는 하루가 지날수록 빽빽해졌고, 지워지고 다시 쓴 흔적들이 겹겹이 쌓여갔다. '기억만으로는 부족하다. 손이 직접 확인하는 것만이 진짜다.' 그 말은 다솜이 자주 하던 말이었고, 도현은 그것을 마음에 새기고 있었다. 실패할 때마다 그 말을 되풀이했다. 실패는 부끄러운 게 아니라 다음 성공의 재료였다. 나흘째 되던 날, 도현은 손잡이에 나무를 덧대는 방법을 떠올렸다. 반동을 손목이 아니라 팔 전체로 분산시키는 구조였다. 다솜은 그 그림을 보고 한동안 말이 없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거라면 가능하겠군." 그날부터 두 사람은 밤늦게까지 공방에 남았다. 다솜의 손이 쇠를 두드리는 소리와 도현이 종이를 넘기는 소리만이 공방 안을 채웠다. 열흘째, 마침내 네 번째 시제품이 완성되었다. 작은 강관에 손잡이가 달렸고, 방아쇠 형태의 발화 장치가 붙어 있었다. 나무로 덧댄 손잡이는 손에 쥐기 편하도록 둥글게 깎여 있었다. "이걸 파일 벙커라고 부르겠습니다." 도현이 말했다. "이름이 뭐 그렇게 어렵나." 다솜이 웃었다. "그래도 그럴싸하구먼." "기능을 나타내는 이름입니다." 도현이 진지하게 대답했다. "기능은 됐고, 진짜 작동이나 하는지 보자." 공방 뒤편, 낡은 갑옷을 세워두고 시험이 이루어졌다. 갑옷은 몇 년째 창고 구석에 처박혀 있던 물건이었지만, 흉갑만큼은 여전히 두꺼웠다. 도현이 그 앞에 서서 파일 벙커를 두 손으로 쥐었다.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당길 때 몸을 뒤로 젖혀." 다솜이 뒤에서 조언했다. "반동이 어느 정도인지 아직 모르니까." 도현이 방아쇠를 당겼다. 퍽! 둔탁한 소리와 함께 갑옷 흉갑에 구멍이 뚫렸다. 반동은 예상보다 작았다. 나무 손잡이가 그 힘을 팔 전체로 흘려보낸 덕분이었다. 다솜이 눈을 크게 뜨고 다가가 갑옷을 살폈다. 손가락을 구멍 안으로 밀어넣어보더니, 그 손가락이 반대편으로 빠져나오는 걸 확인했다. "이거... 이거 진짜로 관통했어." 그녀의 목소리가 떨렸다. "마력 하나 없이, 이런 작은 관 하나로." 도현은 그 구멍을 바라보며 잠시 말이 없었다. 성공의 기쁨보다 먼저, 다른 감정이 그를 채웠다. '이건 사람도 뚫을 수 있는 물건이다.' 그 생각이 스치자, 손끝이 조금 저렸다. 갑옷을 뚫은 구멍의 크기는 손가락 하나가 겨우 들어갈 정도였지만, 그 구멍이 사람의 몸에 났다면 어땠을지는 상상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그 생각을 접어두었다. 지금은 물러설 때가 아니었다. 무력함 속에서 시작한 일이었다. 마력 없이 살아가야 할 세상에서, 이 작은 관 하나가 그를 지켜줄 유일한 수단이 될 수도 있었다. "다섯 번째는 좀 더 가볍게 만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도현이 갑옷에서 시선을 떼며 말했다. "욕심이 과하군." 다솜이 웃으며 그의 등을 두드렸다. "그래도 그 욕심이 나쁘진 않아." +++ 소문은 다솜의 말대로 빠르게 퍼졌다. 기사단 안에서는 이런저런 이야기가 돌았다. 훈련장 구석, 식당, 심지어 야간 순찰을 도는 병사들 사이에서도 그 이야기가 오갔다. "보호 대상 등록될 남자애가 대장장이랑 이상한 장난감을 만든다더라." "장난감이 아니라 진짜 무기라던데." "마력도 없는 게 무슨 무기를 만들어. 다솜이 심심해서 애 데리고 노는 거겠지." "그래도 갑옷을 뚫었다는 얘기가 있던데." "그거야말로 말이 안 되지. 마력 없이 갑옷을 뚫는다고? 헛소문이겠지." 이야기는 부풀려지기도 했고, 깎이기도 했다. 누군가는 도현을 두고 대단한 재능을 가진 발명가라 했고, 누군가는 다솜에게 이용당하는 불쌍한 아이라 했다. 어느 쪽이든 도현의 진짜 사정을 아는 사람은 없었다. 그런 소문들 사이에서, 유독 못마땅한 얼굴로 그 이야기를 듣는 이가 있었다. 한서은. 청연 왕국 기사단 소속의 젊은 기사였고, 실전 평가에서 늘 상위권에 드는 실력자였다. 검술로는 동기들 중 최고라는 평을 받았고, 그 실력만큼이나 자존심도 높았다. 그녀는 남성에 대한 경멸을 굳이 숨기지 않는 성격으로 알려져 있었다. 마력을 다루지 못하는 남성이 보호 대상으로 등록되는 이 왕국의 제도를, 그녀는 언제나 못마땅하게 여겼다. "보호 대상 남성이 무기를 만든다고?" 그녀가 훈련장에서 코웃음을 쳤다. "웃기는 소리지. 마력도 없는 놈이 만든 걸 어디다 쓰겠다는 건지." 동료 기사가 조심스레 말했다. "그래도 시험은 실제로 갑옷을 관통했다더라." "운이 좋았던 거겠지." 한서은이 팔짱을 꼈다. "쇠붙이 하나 잘 만든 걸 가지고 다들 난리군. 마력 없는 자가 검사를 상대할 수 있다는 것처럼 떠들다니." "소문이 그렇다는 거지, 실제로 검사를 상대하겠다는 말은 아니잖아." "소문이 그렇다면, 확인해봐야 하는 거 아닌가." 한서은의 눈이 가늘어졌다. "운이 아니라면, 직접 확인해봐야겠군." 그녀는 검을 손질하던 손을 멈추고, 잠시 허공을 바라보았다. '마력 없는 자가 검사를 상대할 수 있다면, 이 왕국의 제도 자체가 우스운 것이 된다.' 그 생각이 그녀를 움직이게 했다. +++ 며칠 뒤, 도현은 공방에서 다솜과 다섯 번째 시제품을 다듬고 있었다. 이번에는 관의 무게를 줄이는 작업이었다. 나무 손잡이 대신 가벼운 합금을 써보자는 다솜의 제안에, 도현은 그 합금의 배합 비율을 종이에 적어 내려가고 있었다. 문이 벌컥 열렸다. 쾅- 문이 벽에 부딪히는 소리가 공방 안을 울렸다. 한서은이 성큼 들어섰다. 갑옷을 입지 않은 평상복 차림이었지만, 허리에 검을 차고 있었다. 그 검집은 오랜 실전으로 닳아 있었다. "네가 그 무기를 만드는 애냐." 그녀가 도현을 내려다보며 물었다. "그렇습니다." 도현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대답했다. 다솜이 미간을 찌푸리며 끼어들었다. "한서은, 여기는 내 공방이야. 볼일 있으면 나한테 말해." "내 볼일은 이 애한테 있어." 한서은이 다솜을 힐끗 보고는 다시 도현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녀의 눈은 작업대 위에 놓인 시제품들을 훑었다. 첫 번째, 두 번째, 세 번째. 실패한 시제품들이 나란히 늘어서 있었다. 그 눈빛에는 흥미보다 경멸이 더 짙게 배어 있었다. "소문을 들었다. 마력 없는 놈이 무기를 만들어서 갑옷을 뚫었다고. 다들 그걸 믿는 눈치더군." "그건 사실입니다." 도현이 대답했다. 한서은의 입꼬리가 비틀렸다. "그렇다면 실전에서도 통하는지 보고 싶군. 소문이 아니라 직접." "...무슨 뜻입니까." "실전 평가라는 명목으로 나와 대결해봐라." 그녀가 말했다. "네 장난감이 진짜라면, 나를 이겨봐. 못 이기면, 그 장난감이 그저 소문에 불과했다는 걸 다들 알게 되겠지." 도현의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한서은은 기사단 내에서도 실력을 인정받는 검사였다. 마력을 다루는 것만으로도 이미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존재였고, 검술까지 뛰어나다면 상대가 될 리 없었다. 파일 벙커의 관통력이 갑옷을 뚫을 수 있다는 건 확인했지만, 움직이는 사람을, 그것도 검을 든 기사를 맞출 수 있다는 보장은 없었다. "그건... 정식 결투를 신청하시는 겁니까." 도현이 겨우 물었다. "그렇다." 한서은이 짧게 대답했다. "기사단 규정에 따라 정식으로 신청하겠다. 거절할 수도 있지만, 그러면 네 무기는 그저 헛소리로 남겠지." 다솜이 그녀를 막아서려 했다. "이봐, 한서은. 그건 애를 상대로 너무 과한 요구잖아. 저 아이는 아직 정식 기사도 아니고—" "기사가 아니어도 결투를 신청하는 건 규정에 어긋나지 않아." 한서은이 말을 잘랐다. "게다가 저 아이 스스로 만든 물건으로 실력을 증명하고 싶어 하지 않나?" 도현이 손을 들어 다솜을 말렸다. 도현은 한서은의 눈을 마주 보았다. 그 눈에는 경멸과 확신이 뒤섞여 있었다. 여기서 물러선다면, 지금까지 만든 시제품도, 앞으로 만들 시제품도 그저 우스갯소리로 남을 것이었다. '물러서면, 이 무기도, 나도, 그저 웃음거리로 남는다.' 서혜란이 훈련장에서 자주 했던 말이 떠올랐다. "싸울 자리를 스스로 고를 수 없다면, 최소한 그 자리에서 물러서지는 말아라." 그녀는 항상 그렇게 말했다. 마력이 없어도, 검을 쥘 힘이 없어도, 물러서지 않는 것만큼은 스스로 선택할 수 있다고. 도현은 그 말을 마음속으로 되풀이했다. 그리고 다시 한서은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표정에는 조금의 흔들림도 없었다. 이미 승부의 결과를 확신하고 있는 얼굴이었다. "받아들이겠습니다." 도현이 말했다. 한서은의 눈썹이 살짝 올라갔다. 예상보다 빠른 대답이었기 때문이다. "생각보다 겁이 없군." 그녀가 낮게 말했다. "좋다. 사흘 뒤, 훈련장 뒤편 연무대다. 그때 확인하자."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 몸을 돌려 공방을 나섰다. 문이 다시 쾅- 소리를 내며 닫혔다. 공방 안에는 잠시 정적이 흘렀다. 다솜이 먼저 그 정적을 깼다. "진짜 받아들일 생각인가?" 그녀가 낮게 물었다. 목소리에는 걱정이 짙게 배어 있었다. "이미 받아들였습니다." 도현이 대답했다. 하지만 그의 목소리 끝에는, 스스로도 감추지 못한 떨림이 섞여 있었다. 다솜은 그 떨림을 못 본 척하지 않았다. 그녀는 작업대에 놓인 다섯 번째 시제품을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사흘. 사흘 안에 이걸 완성시켜야겠군." 그녀의 손이 다시 쇠를 향해 뻗었다. 도현도 종이를 다시 펼쳤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이, 두 사람의 손끝을 더 빠르게 움직이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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