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성하, 저 사실 남자예요

1화

호숫가에 앉아 손끝으로 물을 건드린 지 세 시간째였다. [정수 친화도 87% - 갱신 없음] 갱신이 없다니, 인생 참 정직하다. 나는 손끝에 맺힌 투명한 구슬 같은 것을 들여다보며 한숨을 쉬었다. 이게 바로 정수(精髓)다. 세상의 모든 것—물, 바람, 심지어 감정에도 깃들어 있다는 순수한 힘의 결정. 마법사라면 누구나 다룬다지만, 이걸 '모으는' 게 아니라 '온전히 품는' 사람은 나밖에 없다고 들었다. 뭐, 자랑은 아니고. 그냥... 취미가 좀 유별났을 뿐이다. 손끝에 맺힌 물방울이 살짝 흔들렸다가 다시 동그랗게 뭉쳤다. 이거 하나 유지하는 데 세 시간이라니, 이러다 87%에서 할아버지 되겠다. '다른 애들은 하루에 3, 4%씩 올린다던데.' 역시 나만 이렇게 느린 걸 보면, 정수 친화도라는 게 재능보다는 인내심 문제인가 싶기도 하고. "오늘도 데이트하러 왔니?" 낮은 여자 목소리가 옆에서 들렸다. 보이지 않는 존재, 설이였다. 서늘한 기운이 목덜미를 스치고 지나갔다. "데이트는 무슨, 수련이지." 나는 시치미를 뗐다. '솔직히 반은 데이트 맞다.' 설이는 정령이다. 눈에는 안 보이지만 손을 대면 얼음장 같은 냉기가 느껴지는, 나만 볼 수 있는 파트너.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냥 서늘한 바람 정도로 느껴진다던가. 그래서 남들 눈엔 내가 허공에 대고 실없이 웃는 이상한 놈으로 보인다. 실제로 그런 취급을 몇 번 받았다. 한번은 시장에서 "저기요, 왜 자꾸 허공에 인사하세요?" 라는 질문을 받고 진땀을 뺐던 기억도 있다. 그날 이후로 나는 사람 많은 곳에서 설이랑 대화할 땐 입 모양을 최대한 줄이는 스킬을 익혔다. 숨은 재주라면 숨은 재주다. "오늘은 그만 접을까." 내가 말했다. [정수 친화도 상승 조건: 지속 시간 부족] 시스템이 태클을 걸었다. 아, 됐고. 세 시간이나 앉아있었는데 지속 시간이 부족하다니, 그럼 대체 얼마나 앉아있어야 하는 건데. 혹시 이 시스템, 나 놀리는 취미 있는 거 아닐까. 설이가 옆에서 킥킥거리는 것 같은 냉기의 흔들림을 느꼈다. '너도 지금 재밌지, 그렇지.' 그때 숲 저편에서 비명이 들렸다. 짧고, 날카롭고, 뭔가 잘못됐다는 걸 온몸으로 알려주는 소리였다. 나는 반사적으로 일어섰다. '또 시작인가.' 5년 전, 별계신 카이렌이 사라진 뒤로 세상은 평화롭다고들 했다. 근데 이 평화, 참 이상하게 시끄럽다. 평화롭다는 세상에서 왜 이렇게 자주 비명 소리를 듣는지, 누가 좀 설명해줬으면 좋겠다. 호숫가에서 숲까지 뛰어가는 그 짧은 시간 동안 머릿속으로 온갖 상황을 예상해봤다. 산짐승에게 쫓기는 사람일 수도 있고, 도적 떼일 수도 있고. 근데 대체로 이런 예상은 틀리기 마련이었다. 숲 안쪽에서 남자 세 명이 젊은 여자를 둘러싸고 있었다. 옷차림을 보니 카이렌 교단의 사냥개들, 소위 '정화대'였다. 검은 로브에 은빛 문양, 딱 봐도 저 특유의 '우리는 정의 집행 중'이라는 분위기를 풍기는 놈들. "이단자는 조용히 오는 게 좋을 텐데?" 사냥개 하나가 낮게 웃었다. 그럼 그렇지, 정화라는 이름 뒤에 숨어 사람 잡는 놈들. 정화대라는 이름 자체가 참 아이러니하다. 정화한다면서 이렇게 사람을 겁박하는 게 대체 무슨 정화인지, 국어사전 좀 새로 쓰고 오라고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나는 손끝의 정수를 조용히 뭉쳤다. [경고: 정수 과부하 감지] 아, 벌써? 아직 손도 안 뻗었는데 경고가 먼저 오다니, 성격 급한 시스템이다. 이 녀석 진짜 나보다 더 예민한 거 아닐까. 하지만 상관없었다. "거기까지." 나는 목소리를 깔았다. 세 놈이 동시에 나를 돌아봤다. "뭐야, 이 여리여리한 놈은?" 사냥개 중 하나가 실실 웃었다. 여리여리?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나왔다. '백설공주라 불리는 몸이다, 인마.' 하얀 피부에 이목구비가 곱다는 이유로 붙은 그 별명, 처음엔 저주라고 생각했는데 요즘은 무기로 쓴다. 적들이 나를 얕보다가 뒤통수를 맞는 표정, 그게 참 볼만하니까. 특히 지금처럼 세 놈이 동시에 같잖다는 표정을 지을 때, 나는 그 표정이 몇 초 뒤에 어떻게 바뀔지 미리 상상하며 슬쩍 웃곤 한다. 콰직! 손을 뻗자 정수가 폭발하듯 터졌다. 슈아아악! 물이 창처럼 날아가 사냥개 하나의 다리를 꿰었다. 놈이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전투 지속 시간: 4초] 짧게, 빠르게 끝내는 게 정수 마법의 매력이다. 호숫가에서 세 시간을 앉아있어도 안 오르던 친화도가, 실전에서는 이렇게 화끈하게 반응한다. '이거 완전 시험 전날 벼락치기 스타일 마법이네.' 근데 두 번째 놈이 여자의 목에 칼을 들이대는 걸 보는 순간, 뭔가 뒤통수를 때렸다. 분노. '감정을 다스려야 한다'는 스승도 없는 내가, 순수하게 화가 났다는 이유로 손끝이 뜨거워졌다. [경고: 감정 지수 임계치 근접] [폭주 확률 상승 중] 뭐야, 이거 진짜 위험한 거잖아. 정수 마법의 규칙은 간단하다. 정수를 모으고, 형태를 짓고, 방출한다. 근데 감정이 격해지면 그 형태가 무너진다. 무너진 정수는 나뿐만 아니라 주변 모든 걸 무차별로 삼킨다. 마치 잘 쌓아놓은 젠가 블록을 발로 걷어차는 느낌이랄까, 무너지는 순간 주변까지 다 휩쓸고 가는 그런 위력이었다. 5년 전, 카이렌과의 전투 마지막 순간에 딱 한 번 그걸 겪었다. 그때 세상이 통째로 하얗게 물들었던 기억, 지금도 가끔 꿈에 나온다. 그때 나를 붙잡아준 게 강철웅이었다. 지금은 곁에 없는, 사자군신이라 불리던 그 거대한 남자. 그 크고 두꺼운 손이 내 어깨를 짓누르며 "정신 차려, 이 미친놈아!"라고 외쳤던 목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선명했다. '생각할 시간 없다.' 나는 이를 악물고 정수를 억지로 다시 뭉쳤다. 손끝이 뜨거웠다가, 갑자기 얼음처럼 식었다. 설이가 슬쩍 내 손등에 냉기를 얹어준 것이다. "진정해." 목소리도 없이, 그냥 서늘한 기운만으로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그 냉기가 마치 뜨거운 냄비에 찬물을 붓는 것처럼 순식간에 열기를 눌러 앉혔다. 덕분에 정수는 다시 형태를 갖췄다. 퍼벙! 두 번째 물창이 놈의 팔을 스치고 지나갔다. 세 번째 놈은 이미 도망친 뒤였다. 도망치는 뒷모습을 보며 잠깐 쫓아갈까 고민했지만,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었다. "괘, 괜찮으세요...?" 구조된 여자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괜찮아요. 근데 왜 저놈들한테 쫓겼어요?" 내가 되물었다. 여자는 대답하지 못하고 그저 배를 감싸 안았다. 임신한 배였다. 순간 뭔가 싸늘한 게 등줄기를 스쳤다. '이거... 그냥 우연이 아니겠지.' 교단의 사냥개들이 그냥 지나가는 이단자를 잡으려 했다면, 이렇게 셋이나 붙어서 조용히 처리하려 했을 리가 없다. 임신한 여자를 쫓는다는 것부터가 뭔가 이상했다. 관이 사라진 것과, 교단이 여자를 쫓는 것과, 이 배 속의 무언가. 연결점이 있는 것 같은데, 아직은 실 끝만 잡은 느낌이었다. 여자의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리는 걸 보며, 나는 더 캐묻지 않기로 했다. 지금 다그쳐봐야 제대로 된 대답이 나올 것 같지도 않았고. 나는 여자를 부축해 숲을 빠져나왔다. 걸음이 느린 그녀를 부축하면서, 설이는 조용히 내 뒤를 따라오는 것 같았다. 냉기가 등 뒤에서 은근하게 감돌았으니까. [정수 친화도 88% - 소량 상승] 오, 하나 겨우 올랐네. 세 시간 낚시질보다 목숨 걸고 싸운 4초가 더 효율적이라니, 이 시스템 뭔가 잘못 설계된 거 아닌가. 근데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방금 그 폭주 직전의 감각, 그게 뭘 의미하는지 나는 알고 있었다. 감정이 격해지면 다스릴 수 없는 힘. 그걸 통제할 방법을 찾지 못하면, 나는 언젠가 스스로를 삼켜버릴 폭탄이나 마찬가지였다. 강철웅이 없는 지금, 다음번에 폭주가 오면 누가 나를 붙잡아줄 것인가. 설이가 옆에 있다지만, 그날처럼 완전히 무너진 정수를 냉기 하나로 막을 수 있을지는 나도 확신이 없었다. '찾아야 한다. 뭔가, 방법을.' 여자를 마을 어귀까지 데려다주고 돌아서는 길, 나는 손끝을 물끄러미 내려다봤다. 여전히 투명한 구슬처럼 맑은, 그러나 언제든 뜨겁게 타오를 수 있는 그 위험한 힘. 그리고 그 방법을 찾기도 전에, 나는 이미 더 큰 소용돌이의 한복판으로 걸어 들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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