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성하, 저 사실 남자예요

4화

"이야기가 좀 길어질 수도 있어요." 여자 신관이 웃으며 자리를 권했다. 웃는 얼굴인데 눈은 안 웃고 있었다. 이건 뭐, 면접관 중에서도 제일 무서운 타입 아닌가. [경계: 상대의 감정 지수 불명] 시스템도 상대를 못 읽는다니, 나도 못 읽겠다는 뜻이다. '이거 뭔가 냄새가 나는데.' 나는 최대한 순진한 표정을 지으며 앉았다. 의자에 앉는 순간까지도 계산했다. 허리는 얼마나 세워야 하는지, 손은 무릎 위에 얼마나 얌전히 올려야 하는지, 눈은 어디를 봐야 자연스러운지. 이럴 때는 신입 신관 코스프레가 제일 무섭다. "어제 창고 근처에서 뭘 하셨죠?" 그녀가 물었다. 직구였다. 예의도 없이 훅 들어오는 질문이라니, 초보를 상대로 진심이었다. "아, 청소하다가 길을 잃었어요, 호호." 나는 최대한 어색하게 웃었다. '거짓말이 너무 뻔한가.' 솔직히 말하면서도 스스로 손발이 오그라들었다. 청소하다가 길을 잃었다는 게, 초등학생한테 해도 안 통할 변명 아닌가. 여자 신관은 잠시 나를 관찰하더니,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그 고개 끄덕임이 전혀 믿는 표정이 아니었다. 오히려 뭔가를 확인했다는, 딱 그런 느낌의 끄덕임이었다. [경고: 위장 신뢰도 하락] [현재 위장 성공률 71%] 오, 벌써 23% 깎였네. 계산이 이상하게 빠른 시스템이었다. '이 시스템 지금 나 놀리는 거 아니야?' 퍼센트까지 보여주면서 굳이 실감 나게 하는 이유가 뭔지 궁금했다. 여자 신관은 더 이상 묻지 않고 자리를 마무리했다. 하지만 나가는 길, 뒤통수가 계속 뜨거웠다. 그날 이후로, 나는 계속 시선을 느꼈다. 식당에서, 예배당에서, 심지어 숙소 창밖에서도. 밥을 먹다가도 등 뒤에서 누가 숨을 쉬는 것 같아 몇 번이나 돌아봤다. 예배당에서 기도하는 척 눈을 감고 있으면, 그 어둠 속에서 누군가 나를 관찰하는 게 온몸으로 느껴졌다. 숙소 창밖은 더 심했다. 바람에 나무가 흔들리는 소리인지, 아니면 누가 발소리를 죽이고 지나가는 건지 구분이 안 될 정도였다. 누군가 나를 지켜보는 느낌이었다. '라연의 정체를 캐려는 건가.' 확신할 순 없었지만, 확률은 높았다. 애초에 이 신전에 잠입한 지 며칠 안 됐는데 벌써 이렇게 티가 났다는 거 자체가 문제였다. 내가 연기를 못하는 건가, 아니면 이 신전이 원래 이 정도로 경계가 심한 건가. 둘 다일 수도 있겠다. 문제는 이 위장이 오래갈수록 정체가 드러날 리스크도 커진다는 거였다. 나는 최대한 조심스럽게 움직였지만, 그럴수록 오히려 더 의심스러운 사람이 됐다. 뭔가를 숨기는 사람의 몸짓은 결국 뭔가를 숨기는 사람처럼 보이는 법이니까. 억지로 자연스럽게 걸으려고 하면 오히려 발걸음이 부자연스러워졌고, 아무렇지 않게 웃으려고 하면 표정이 어색하게 굳었다. '이게 무슨 연극이야, 완전 발연기 대회 나온 기분이잖아.' 대신관과의 접촉은 아직 시도조차 못했다. 대신관 은거처 위치는 알아냈지만, 접근할 방법이 없었다. 지하 세 번째 계단은 항상 봉인되어 있었고, 그 문을 지키는 신관들의 눈빛은 결코 우호적이지 않았다. 한 번은 지나가는 척 슬쩍 계단 쪽을 살펴봤는데, 문 앞에 서 있던 신관이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는 바람에 심장이 떨어질 뻔했다. "거긴 관계자 외 출입 금지입니다." 딱딱한 목소리였다. "아, 네! 죄송해요, 길을 잘못 들었어요!" 나는 허둥지둥 인사하고 도망쳤다. '또 길 잃었다는 변명이냐, 라연아.' 솔직히 이쯤 되면 신전 전체에 내가 길치라는 소문이 돌 것 같았다. 혼자서는 무리였다. '철웅이 있었으면...' 나는 몇 번이나 그 생각을 했다가 접었다. 각자 다른 임무를 맡은 지 벌써 며칠째, 아니 정확히는 4일째였다. 연락 수단도 딱히 없어서, 그가 지금 어디서 뭘 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밥은 잘 먹고 있는지, 잠은 제대로 자는지, 아니면 또 어디서 무식하게 몸으로 때우고 있는지 상상만으로도 걱정이 됐다. '설마 다치진 않았겠지.' 걱정이 스치는 순간, 설이가 내 손등을 톡톡 두드렸다. 걱정하지 말라는 뜻인지, 아니면 다른 신호인지 알 수 없었다. 설이의 눈빛은 늘 그렇듯 담담했지만, 그 담담함이 오히려 위로가 될 때가 있었다. '너는 뭘 알고 있는 거니.' 물어보고 싶었지만, 말이 통하지 않으니 답이 없었다. 그날 밤, 나는 숙소 창문 밖에서 이상한 기척을 느꼈다. 바람 소리와는 명백히 다른, 규칙적이고 조심스러운 움직임이었다. [감지: 은신 상태의 인물 접근 중] 시스템이 낮게 경고했다. '이거 정체를 캐려고 정말 온 건가.' 머릿속이 순식간에 차가워졌다. 도망칠까, 맞설까, 아니면 모르는 척 자는 척할까. 세 가지 선택지가 동시에 떠올랐지만 결정할 시간이 별로 없었다. 나는 침대에 누운 채로 정수를 조용히 손끝에 모았다. 숨소리마저 죽이면서, 눈은 감았지만 귀는 최대한 열어놓았다. 창문 밖 그림자가 점점 커졌다. '온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그러다 갑자기 뭔가 거대한 것이 그림자를 덮쳤다. 쿠웅! 둔중한 소리가 벽을 흔들었다. 나는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켰다. '뭐, 뭐야 이거.' 건물이 흔들릴 정도의 충격이었는데, 이게 대체 뭔 소리인지 감이 안 잡혔다. "어이, 라연." 익숙하고, 그리운, 낮은 목소리가 창밖에서 들렸다. 나는 벌떡 일어나 창문을 열어젖혔다. 달빛 아래, 익숙한 거대한 실루엣이 서 있었다. 사자군신, 강철웅. 이성적이고 침착한 얼굴에, 어울리지 않게 살짝 지친 기색이 섞여 있었다. 머리는 헝클어져 있었고, 옷 한쪽 어깨가 살짝 찢어져 있었다. 며칠 못 본 사이에 얼굴이 조금 상한 것 같기도 했다. 그의 발밑에는 방금 그를 은신 중이던 정체 미상의 인물—아무래도 나를 감시하던 자였던 것 같다—이 쓰러져 있었다. 완전히 정신을 잃은 채, 얼굴을 바닥에 처박고 있는 모습이 처참했다. "...너, 어떻게 여길..." 내가 얼떨결에 물었다. 목소리가 갈라져 나왔다. 반가움인지 놀람인지 구분이 안 될 정도로 마음이 요동쳤다. "네 정보원을 통해 위치를 알아냈지." 강철웅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그렇게 티가 났었나.' 나는 창피함과 반가움이 뒤섞인 이상한 기분을 느꼈다. 이렇게 쉽게 찾을 수 있는 위치였다면, 대체 내 위장 성공률 71%라는 숫자는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시스템한테 따지고 싶어졌다. "4일 동안 별 탈 없었나?" 그가 낮게 물었다. 낮은 목소리에 은근한 걱정이 섞여 있었다. "별 탈이라니, 나름 큰 정보 얻었거든?" 나는 괜히 목소리를 높였다. '사실 방금 감시자한테 걸릴 뻔했지만.' 굳이 그 얘기까지 하지 않아도 되겠지, 하는 마음으로 시선을 슬쩍 피했다. 강철웅은 잠시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신관복 차림에, 머리도 최대한 소박하게 묶은 내 모습이 그의 눈에는 뭔가 낯설었나 보다. "그 옷차림은..." 그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임무야, 임무! 웃지 마." 나는 발을 동동 굴렀다. 이 남자가 지금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 뻔히 보였다. 그는 웃지 않았지만, 표정 근육이 미묘하게 떨리는 걸 나는 똑똑히 봤다.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가 억지로 눌러 내리는 그 과정까지도 다 보였다. "안 웃었어." 그가 딱딱하게 말했다. '분명히 웃었잖아, 저 자식.' 나는 억울했지만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방금 이 사람은 뭐야?" 나는 쓰러진 감시자를 가리켰다. 새삼 그 존재를 보니 등골이 서늘해졌다. 이 사람이 며칠 동안 내 뒤를 밟고 있었다는 뜻 아닌가. "네 뒤를 밟더군." 강철웅이 짧게 대답했다. '그럼 진짜 감시받고 있었던 거네.' 확신이 서자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혼자 넘겨짚었던 불안이 실제로 사실이었다는 걸 확인하는 순간, 오히려 더 무서웠다. 위장이 언제까지 유지될지, 이제는 정말 알 수 없었다. 당장이라도 신전 전체에서 쫓겨날지, 아니면 더 큰 위험에 빠질지 상상만으로도 등에 식은땀이 났다. 하지만 강철웅이 곁에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나는 조금 안심이 됐다. '혼자가 아니다.' 그 사실이 이상하게 마음을 든든하게 만들었다. 며칠 동안 쌓였던 긴장이 그의 낮은 목소리 하나에 조금씩 풀리는 게 느껴졌다. "이제부터는 같이 움직인다." 강철웅이 단호하게 말했다. "그러다 너까지 정체 들키면 어쩌려고." 내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정말 걱정이 됐다. 이 거대한 남자가 신관복이라도 입고 다닐 생각인가, 아니면 또 은신 스킬로 계속 몰래 붙어 다니려는 건가. 둘 다 상상만 해도 위험천만했다. "들키지 않을 방법이 있어." 그가 말했다. 뭔가 자신 있는 표정이었다. 그 자신감이 대체 어디서 나오는지, 나는 다음 날 아침에야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날 아침, 나는 그 자신감의 근거를 보자마자 이마를 짚을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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