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 ›"뭐, 뭐라고?" 나는 눈을 크게 떴다.
강철웅이 어제 그 감시자를 정리하고 나서 알려준 계획은 예상외였다.
"이 지부에 새로 온 짐꾼으로 등록했어." 그가 담담하게 말했다.
짐꾼이라니, 그 거대한 몸으로.
5년 전 카이렌을 상대로 대검을 휘두르던 사자군신이, 지금은 자루를 메고 다니는 짐꾼이 됐다는 소리였다.
"...안 어울려." 나는 솔직히 말했다.
"안 어울리는 건 너도 마찬가지지." 그가 되받아쳤다.
'할 말이 없어서 더 짜증 나네.'
생각해보면 나도 지금 여자 얼굴을 하고, 여자 몸으로, 수도사 흉내를 내고 있는 처지였다.
거울 볼 때마다 아직도 어색해서 눈을 깜빡이는데, 남한테 안 어울린다는 말을 할 처지가 아니었다.
"...그래, 뭐. 서로 코스프레 대회 나온 거로 치자." 나는 슬쩍 말을 돌렸다.
강철웅은 그 말에 대해서는 별 반응 없이 자루를 어깨에 걸쳐 멨다.
그 자루 안에 뭐가 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왠지 무기라도 몇 개 숨겨놨을 것 같은 무게감이었다.
하지만 확실히 효율적인 위장이었다.
짐꾼은 지부 곳곳을 자유롭게 오가고, 아무도 그를 눈여겨보지 않는다.
애초에 거대한 근육질 사내가 등짐을 지고 지나가는데 누가 얼굴을 유심히 볼까.
덕분에 그는 벌써 지부 내부 구조를 절반쯤 파악한 상태였다.
"지하 세 번째 계단, 매주 셋째 날 밤에만 경비가 교체돼." 그가 낮게 말했다.
"그 틈을 노리자는 거야?" 내가 물었다.
"그것만으로는 부족해." 그가 고개를 저었다.
[정보 부족: 대신관 관련 세력 규모 미확인] 시스템도 신중하게 굴었다.
'너까지 그렇게 조심스러우면 나는 어쩌라고.'
평소엔 온갖 걸 다 알려주면서, 정작 제일 중요한 대신관 정보는 캄캄이라니.
이럴 때 보면 시스템도 눈치 보는 게 있는 모양이었다.
우리는 잠깐 침묵했다.
강철웅은 펼쳐놓은 지도 위에 손가락으로 계단 표시를 짚었다가, 다시 접었다가, 뭔가 골똘히 생각하는 얼굴이었다.
나는 그 옆에서 다리를 웅크리고 앉아 손톱을 물어뜯었다.
'뭔가 실마리가 필요한데.'
그러다 뜻밖의 도움이 찾아왔다.
"라연 님, 잠시 시간 되세요?" 낯익은 목소리가 문을 두드렸다.
유서인이었다.
첫날부터 나를 이 숙소로 안내해준 수도사, 나이는 20대 중반쯤이었고 태도는 늘 상냥하고 우아했다.
목소리만 들어도 사람이 참 곱다는 느낌이 드는 여자였는데, 지금은 그 목소리에 평소보다 살짝 힘이 들어가 있었다.
"어, 서인 언니..." 나는 최대한 자연스럽게 웃었다.
'언니라고 부르는 것도 이제 익숙해졌다.'
처음엔 남자로 26년 넘게 살다가 갑자기 여자한테 언니 소리 하는 게 그렇게 입에 안 붙더니, 이제는 그냥 술술 나온다.
'사람은 역시 적응의 동물이구나.'
유서인은 방 안에 강철웅이 있는 걸 보고 잠깐 놀란 표정을 지었지만, 곧 부드럽게 웃었다.
"짐꾼 분이시죠? 소문 들었어요." 그녀가 말했다.
강철웅이 살짝 고개를 숙였다.
그 큰 몸으로 고개를 숙이는 모습이 묘하게 예의 바르면서도 웃겼다.
'저 인간 옛날에는 황제 앞에서도 목 안 굽혔던 사람인데.'
유서인은 방 안으로 들어와 조용히 문을 닫았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평소보다 조심스러웠다.
"저도 사실... 궁금한 게 있어서요." 그녀가 낮게 말했다.
순간 심장이 철렁했다.
'설마 정체를...'
머릿속으로 오만 가지 변명이 순식간에 스쳐 지나갔다.
'짐꾼은 사실 제 오빠고요, 저는 그냥 조사하러 온 게 아니라 관광 왔고요...'
하지만 이어진 말은 예상 밖이었다.
"라연 님, 밤마다 창밖을 살피시죠? 뭔가 찾고 계신 것 같아서요." 유서인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눈치가 빠른 사람이네.'
나는 순간 등에 식은땀이 흘렀지만, 겉으로는 애써 태연한 표정을 유지했다.
'침착하게. 여기서 삐끗하면 그대로 끝이다.'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도박을 걸기로 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이 여자가 진짜로 나를 의심해서 이런 걸 물을 사람이었다면, 애초에 이렇게 조심스럽게 문을 두드리지 않았을 것이다.
거기다 이 지부에서 며칠 지켜본 바, 유서인은 다른 수도사들과는 뭔가 결이 다른 사람이었다.
"...사실, 저는 조사를 하러 왔어요." 나는 솔직하게 말했다.
유서인의 표정이 굳었다.
"대신관님에 대한..." 그녀가 조용히 말을 이었다.
확신에 가까운 물음이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강철웅은 그 옆에서 아무 말 없이, 언제든 움직일 준비가 되어 있다는 듯 자세를 낮췄다.
'저 사람 진짜 프로다.'
유서인은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방 안에는 벽 너머로 들리는 다른 수도사들의 발소리, 저 멀리서 울리는 종소리만 간간이 들렸다.
그러다 창밖을 바라보며 낮게 입을 열었다.
"저는... 대신관님의 총애를 받는 수도사예요." 그녀가 말했다.
그 말투에서 자부심 같은 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지친 무언가가 섞여 있었다.
마치 누가 등에 무거운 걸 얹어놓은 것 같은, 벗어나고 싶지만 벗어날 수 없는 그런 표정이었다.
"그런데도 저를 도와주시려는 거예요?" 내가 물었다.
"...그 총애라는 게, 생각보다 무서운 거라는 걸 알게 됐거든요." 유서인이 씁쓸하게 웃었다.
그 웃음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나는 굳이 되묻지 않았다.
'저 웃음,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은데.'
어쩐지 예전에 회사에서 상사한테 예쁨받다가 결국 제일 먼저 야근 뒤집어쓴 동료의 표정과 비슷했다.
물론 이쪽은 스케일이 훨씬 무섭겠지만.
"제가 도와드릴 수 있는 건, 이 지부 안에서의 위치와 정보예요." 그녀가 말했다.
"빈 방 하나가 있어요. 원래 창고였는데, 지금은 아무도 안 써요. 거기를 두 분 아지트로 쓰세요." 유서인이 제안했다.
[제안 수락 시 안전 거처 확보] [보상 등급: B] 시스템이 담담하게 평가를 매겼다.
'오, B급이면 꽤 괜찮은 거잖아.'
지금까지 시스템이 준 평가 중에 딱히 짠 편이 아니었으니, 이건 진짜 도움이 될 만한 제안이라는 뜻이었다.
강철웅과 나는 서로를 마주 봤다.
그의 눈빛에도 나쁘지 않다는 확신이 담겨 있었다.
"고맙습니다." 강철웅이 정중하게 말했다.
목소리는 낮았지만 진심이 담겨 있었다.
"...대신 하나만 부탁드려도 될까요." 유서인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뭐든지요." 내가 말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속으로는 살짝 긴장했다.
'설마 장기라도 달라는 건 아니겠지.'
"제가 부탁드릴 게 생기면, 그때는 반드시 들어주세요." 그녀가 말했다.
그 목소리에 담긴 무게가 예사롭지 않았다.
단순한 부탁이라기보다는, 뭔가를 미리 걸어두는 듯한 말투였다.
나는 잠시 고민했지만,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뭔가 큰 걸 부탁할 것 같은데.'
하지만 지금은 이 손을 잡는 게 맞았다.
여기서 튕겼다가 이 안전한 거처를 놓치는 것보다는, 나중에 무슨 부탁이든 받아주는 게 훨씬 나은 선택이었다.
'인생이 다 그렇지, 뭐. 공짜는 없다.'
유서인은 그 말을 듣고서야 비로소 안심한 듯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짧게 목례를 하고는 조용히 방을 나갔다.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방 안엔 다시 강철웅과 나, 둘만 남았다.
그날 밤, 창고를 개조한 새 아지트에서 강철웅과 나는 처음으로 함께 지도를 펼쳤다.
창고라기엔 꽤 넓은 공간이었고, 구석에는 오래된 상자들이 쌓여 있어서 숨을 곳도 나쁘지 않았다.
지부 내부 구조, 경비 교체 시간, 그리고 지하 계단으로 이어지는 통로까지.
강철웅은 짐꾼 노릇을 하며 며칠 동안 몰래 새겨온 위치들을 하나씩 지도 위에 표시했고, 나는 그가 표시한 걸 보며 머릿속으로 동선을 그렸다.
조금씩, 하지만 확실하게 그림이 완성되고 있었다.
"이제 시작이구나." 강철웅이 낮게 말했다.
"응." 나는 짧게 답했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든든함이었다.
혼자였다면 절대 여기까지 못 왔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이 거대한 사자군신이, 짐꾼 자루를 메고 이렇게 옆에서 지켜주고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마음이 놓였다.
'이번엔 진짜 뭔가 될 것 같다.'
그런데 그 든든함이 채 하루도 가지 못했다.
다음 날 아침, 지부 안에 낯선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식당에서 밥을 뜨고 있던 나는, 옆 테이블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숟가락을 멈췄다.
"대신관님이 직접 새로 온 수도사들 얼굴을 확인하러 오신다더라." 누군가가 속삭이는 소리를 나는 우연히 들었다.
그 순간 밥알이 목에 걸린 줄 알았다.
[경고: 대신관 직접 대면 임박] [위장 유지 성공률: 예측 불가] 시스템이 처음으로 확신 없는 답을 내놓았다.
'너 이럴 때만 솔직하냐.'
지금까지 온갖 상황에서 그럭저럭 계산기 두드리듯 확률 뽑아내던 놈이, 정작 진짜 위기 앞에서는 '몰라요' 하고 손 놓는 게 어이가 없었다.
'하필... 지금 오겠다는 거야.'
준비도 채 안 됐는데, 아지트 하나 겨우 만들어놓고 이제 시작이라고 좋아한 게 바로 몇 시간 전이었다.
나는 창고 아지트로 돌아가 강철웅에게 그 소문을 전했다.
그의 표정이 처음으로 진짜 굳었다.
지금까지 어떤 상황에서도 여유를 잃지 않던 그 얼굴이, 이번만큼은 미세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준비가 부족한데." 그가 낮게 중얼거렸다.
그 한마디가 유난히 무겁게 방 안에 내려앉았다.
대신관의 눈앞에, 라연이라는 이름으로 서야 할 순간이 생각보다 훨씬 빨리 다가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