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쓰러졌더니 18살 모험가

1화

경적 소리가 멀리서 울렸다. 박도현은 그 소리를 듣지 못했다. 새벽 세 시. 공사장 담벼락 아래 간이 의자에 앉은 채로 그는 이미 세 시간째 졸고 있었다. 형광 조끼 안으로 찬 바람이 스며들었다. 손끝이 저렸다. 발끝부터 올라오는 한기가 무릎을 지나 허벅지까지 번졌다. 야간 경비 수당은 시급 만 원이 채 되지 않았다. 낮에는 편의점 아르바이트, 밤에는 경비. 오십을 앞둔 몸이 버틸 수 있는 스케줄이 아니었다. 그는 가끔 이런 생각을 했다. 언젠가 이 일도 못 하게 될 날이 올까. 그 언젠가가, 오늘일 줄은 몰랐다. 가슴이 조여왔다. 숨이 얕아졌다. 눈앞이 흐려졌다. 팔을 뻗어 담벼락을 짚으려 했지만 손은 허공을 스치기만 했다. 그는 쓰러졌다. 의자가 넘어가는 소리도, 자신의 몸이 바닥에 부딪히는 소리도 듣지 못했다. 다만 마지막으로 떠올린 생각은 하나였다. 오늘 못 받은 일당이 십오만 원이라는 것. 그리고 딸 아이의 등록금 고지서가 며칠 뒤면 날짜가 다가온다는 것. 의식은 거기서 끊겼다. 그리고 눈을 떴다. 하늘이 보였다. 그런데 색이 이상했다. 회색이 아니었다. 짙은 초록빛 나뭇잎 사이로 새어드는 햇살이었다. 잎사귀들이 바람에 흔들릴 때마다 빛이 조각조각 흩어져 떨어졌다. 도현은 눈을 몇 번 깜빡였다. 몸을 일으키려 했다. 그런데 몸이 가벼웠다. 너무 가벼웠다. 허리가 아프지 않았다. 무릎이 시큰거리지 않았다. 어깨도, 목도, 십 년 넘게 그를 괴롭혀온 오십견의 통증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는 손을 들어 자신의 얼굴을 만졌다. 낯선 얼굴이었다. 매끈했다. 주름이 없었다. 손등의 검버섯도, 오래된 화상 흉터도 없었다. 손가락 끝으로 뺨을 눌러보았다. 탄력이 있었다. 스무 살 언저리의 피부였다. 말도 안 된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그런데 손끝의 감각은 부정할 수 없었다.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다리에 힘이 들어갔다. 넘어지지 않았다. 오십 년 가까이 살아온 몸이라면 절대 불가능한 반응 속도였다. 무릎 관절이 삐걱거리는 소리 대신, 부드럽게 움직이는 근육의 감촉만 있었다. 그는 몇 걸음을 걸어보았다. 발밑에서 낙엽이 바스락거렸다. 걸음마다 몸이 가볍게 튀어 오르는 것 같았다. 뛰어보고 싶다는 충동이 순간적으로 일었다. 숲이었다. 습기 찬 흙냄새. 젖은 나뭇잎 냄새. 이름 모를 꽃향기. 그리고 그 사이로 낮게 흐르는 짐승의 냄새. 도시에서는 한 번도 맡아본 적 없는 냄새들이 겹겹이 쌓여 있었다. 도현은 숨을 몰아쉬었다. 웹소설을 오백 권 넘게 읽은 사람답게, 그는 상황을 파악하는 데 오래 걸리지 않았다. "설마." 그는 중얼거렸다. 목소리마저 낯설었다. 자신의 것이 아닌, 더 어리고 맑은 음색이었다. 그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사방이 나무였다. 사람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도로도, 전봇대도, 건물도 없었다. 오직 나무와 풀, 그리고 그 사이로 부는 바람뿐이었다. 머릿속에서 수백 편의 소설 속 장면들이 스쳐 지나갔다. 이럴 때 주인공들이 가장 먼저 하는 행동이 있었다. 그는 속으로 외쳤다. 상태창. 웅— 눈앞에 반투명한 창이 떠올랐다. [이름: 로한] [레벨: 13] [클래스: E급 모험가] [칭호: 전생자] 도현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이럴 줄 알았다는 마음과, 설마 진짜일 줄은 몰랐다는 마음이 동시에 밀려왔다. 두 마음이 서로 부딪히며 이상한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는 침을 삼켰다. 창을 다시 들여다보았다. [체력: 82 / 82] [마력: 1,800 / 1,800 (전생자 특전)] [민첩: 41] [힘: 38] [보유 스킬: 단검술(초급), 스토리지, 토지 마법] 체력과 민첩, 힘까지는 그러려니 했다. 레벨 13짜리 초보 모험가치고는 나쁘지 않은 수치였다. 그런데 마력 수치를 보고 도현은 눈을 크게 떴다. 그가 읽었던 수백 편의 이세계 소설에서, 초반 주인공의 마력이 두 자릿수를 넘기는 경우는 드물었다. 세 자릿수만 되어도 천재라 불렸다. 천 단위는 상상도 못 했다. 보통 그 정도 마력이라면 최소 한 왕국의 궁정 마법사급이었다. "이게 전생자 특전이라는 건가." 그는 낮게 읊조렸다. 손끝이 떨렸다. 두려움 때문인지 흥분 때문인지 스스로도 구분이 되지 않았다. 그는 스킬 목록을 다시 훑었다. 단검술은 이해가 갔다. 허리춤에 무기가 있으니 당연했다. 그런데 스토리지와 토지 마법이라는 항목이 눈에 걸렸다. 스토리지. 아공간을 다루는 스킬. 웹소설 속에서는 보통 후반부 주인공들이나 얻는 희귀 스킬이었다. 토지 마법. 이건 그가 읽은 소설에서 본 적 없는 이름이었다. 대지를 다루는 마법이라는 건 짐작이 갔지만, 정확히 무슨 효과인지는 알 수 없었다. "둘 다 이름값이 심상치 않은데." 그는 혼잣말을 뱉었다. 확인해보고 싶었지만, 지금은 그럴 여유가 없다는 것도 동시에 깨달았다. 그는 자신의 몸을 다시 살폈다. 갈색 가죽옷. 허리춤에 매달린 짧은 단검 한 자루. 등에 걸친 낡은 배낭. 배낭 끈은 오래 써서 색이 바래 있었고, 어깨에 닿는 부분은 몇 번이나 덧댄 흔적이 있었다. 배낭 안에는 마른 빵 두 조각과 물주머니, 그리고 손바닥만 한 나무패가 들어 있었다. 나무패에는 알 수 없는 문자와 함께 얼굴 없는 인장이 새겨져 있었다. 문자는 한글도, 영어도, 그가 아는 어떤 문자도 아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뜻은 저절로 이해가 됐다. 모험가 인식표였다. 그는 직감했다. 빵을 한 조각 꺼내 냄새를 맡아보았다. 딱딱하게 굳어 있었지만 상한 냄새는 아니었다. 곡물 특유의 텁텁한 향이 났다. 물주머니를 흔들어보니 절반쯤 차 있었다. "준비는 그럭저럭 되어 있었네." 전생하기 전의 로한, 그러니까 이 몸의 원래 주인은 최소한 초보 모험가치고는 나름 살림을 챙긴 모양이었다. 아니면 누군가 미리 준비해준 것일 수도 있었다. "로한." 그는 자신의 새 이름을 소리 내어 불러 보았다. 낯설었다. 하지만 나쁘지 않았다. 입에 붙지 않는 이름을 몇 번 더 되뇌었다. 로한. 로한. 세 번쯤 부르자 어느 정도 익숙해지는 것 같기도 했다. 박도현으로 살아온 사십칠 년의 기억은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딸의 얼굴, 편의점 계산대의 위치, 공사장 담벼락의 갈라진 틈까지 전부 선명했다. 다만 몸은 완전히 다른 존재였다. 열여덟, 아니 열아홉쯤 되어 보이는 청년의 몸. 근육이 단단했다. 숨을 쉬는 것만으로도 몸속에 활력이 도는 게 느껴졌다. 그는 팔을 굽혀 근육을 만져보았다. 탄탄했다. 젊었을 때도 이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았다. 아니, 애초에 그는 이런 몸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 학창 시절에도 운동과는 거리가 멀었고, 성인이 된 후로는 노동으로 몸이 상하기만 했다. 그는 자기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 "이거 실화냐." 몇 번이고 자신의 손을, 팔을, 다리를 내려다보며 웃었다. 오십 년 가까운 세월 동안 쌓인 통증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이 실감 나지 않았다. 허리를 굽혀도 아프지 않았다. 발끝을 세워도 균형이 흔들리지 않았다. 웃음은 오래가지 않았다. 바람이 바뀌었다. 비릿한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흙냄새도 아니었다. 꽃향기도 아니었다. 젖은 짐승의 체취, 그리고 그 아래 섞인 피 냄새. 도현은 코를 킁킁거렸다. 냄새는 점점 짙어지고 있었다. 사람의 감각으로는 이렇게 멀리서 나는 냄새를 맡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이 몸은, 마치 후각이 몇 배로 증폭된 것 같았다. 낙엽 밟는 소리가 들렸다. 한 번. 두 번. 규칙적으로,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도현은 반사적으로 몸을 낮췄다.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손끝이 차가워졌다. 몸이 저절로 반응한 것이었다. 머리로 생각하기도 전에 무릎이 굽혀지고, 자세가 낮아졌다. 마치 이 몸에 새겨진 본능 같은 것이 있는 듯했다. '이거 원래 주인이었던 로한의 습관인가.' 그런 생각이 스쳤지만, 지금은 그걸 따질 여유가 없었다. 덤불 사이로 무언가 검은 형체가 어른거렸다. 크기가 상당했다. 어깨 높이만 사람 허리쯤 되어 보였다. 등에는 짧고 억센 털이 곤두서 있었고, 주둥이 양쪽으로 누런 어금니 두 개가 삐죽 튀어나와 있었다. 콧구멍에서 하얀 숨이 뿜어져 나왔다. 발굽이 땅을 밟을 때마다 흙이 움푹 눌리는 게 보였다. 숲멧돼지. 웹소설 속에서 수백 번은 읽어본 이름이었다. 초보 모험가가 가장 먼저 마주치는, 그러나 절대 만만하지 않은 첫 시험대. 게시판 후기들에는 늘 이런 문구가 달려 있었다. '숲멧돼지 잡다가 죽는 초보들 생각보다 많음. 절대 얕보지 말 것.' 도현은 그 문구를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지금 이 순간, 그 문구가 이렇게 실감 나게 다가올 줄은 몰랐다. 머릿속으로 빠르게 계산이 돌아갔다. 체력 82, 민첩 41, 힘 38. 숲멧돼지의 평균 스탯이 어느 정도였는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았다. 다만 초보 모험가 혼자서 상대하기엔 버겁다는 서술만은 뚜렷했다. 단검 한 자루로 저 덩치를 상대할 수 있을까. 마력 1,800이라는 수치가 있지만, 정작 사용할 줄 아는 마법이 무엇인지도 몰랐다. 토지 마법이라는 이름만 알 뿐, 실제로 어떻게 쓰는지는 감도 잡히지 않았다. 그놈이 이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작고 붉은 눈이 도현을, 아니 로한을 정확히 응시했다. 눈이 마주친 순간, 도현은 숨을 멈췄다. 짐승의 눈에는 두려움이 없었다. 오히려 먹잇감을 발견한 포식자의 눈빛이었다. 낙엽 밟는 소리가 멈췄다. 침묵이 내려앉았다. 바람 소리마저 사그라진 것 같았다. 나뭇잎 사이로 스며드는 햇살만이 여전히 조각조각 흔들리고 있었다. 도현은 천천히, 아주 천천히 허리춤의 단검에 손을 뻗었다. 손끝이 차가웠다. 심장 뛰는 소리가 귓속까지 울렸다. 숲멧돼지의 앞다리가 살짝 뒤로 당겨졌다. 돌진의 자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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