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쓰러졌더니 18살 모험가

2화

숲멧돼지가 콧김을 뿜었다. 앞다리로 땅을 한 번 긁었다. 흙덩이가 튀어 올랐다. 로한은 그 자리에서 뒷걸음질쳤다. 발밑에서 마른 나뭇가지가 부러지는 소리가 났다. 놈의 붉은 눈이 더 커졌다. 로한은 숨을 죽였다. 이전 삶에서 이런 짐승을 마주한 적은 없었다. 사무실 책상, 형광등 불빛, 커피 냄새. 그런 것들만 알던 몸이었다. 그런데 지금 이 몸은 달랐다. 근육이 먼저 반응하고 있었다. 생각보다 다리가 먼저 움직였다. 숲멧돼지의 몸통이 부풀어 올랐다. 어깨 근육이 팽팽하게 당겨지는 게 보였다. 달려온다. 숲멧돼지는 생각보다 빨랐다. 거리를 순식간에 좁혀왔다. 로한은 몸을 옆으로 굴렸다. 어깨가 흙바닥에 부딪혔다. 통증이 번졌다. 하지만 익숙한 통증이 아니었다. 이전 몸이라면 뼈가 부러졌을 충격인데, 지금 몸은 멍이 조금 든 정도였다. 그는 벌떡 일어났다. 단검을 뽑아 들었다. 손이 떨렸다. 칼자루를 쥔 손가락 사이로 땀이 배어 나왔다. 손바닥이 미끄러웠다. 그는 손아귀에 힘을 다시 주었다. "살인은 처음이지." 그는 스스로에게 중얼거렸다. 아니, 이건 사냥이다. 사람이 아니다. 하지만 손끝의 떨림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숲멧돼지가 다시 고개를 낮췄다. 콧구멍에서 뜨거운 김이 뿜어져 나왔다. 눈은 로한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저 짐승에게 이건 놀이가 아니었다. 생존이었다. 그리고 로한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숲멧돼지가 다시 돌진했다. 로한은 몸을 틀며 단검을 그었다. 놈의 옆구리를 얕게 베었다. 붉은 피가 튀었다. 놈이 비명 같은 울음을 토했다. 하지만 상처는 얕았다. 놈은 더 흥분했을 뿐이었다. 붉은 피가 로한의 팔에 몇 방울 튀었다. 뜨거웠다. 짐승의 체온이 그대로 느껴졌다. 앞다리가 로한의 다리를 후려쳤다. 로한은 균형을 잃고 나동그라졌다. 등이 바닥에 닿았다. 눈앞이 흔들렸다. 나무들이 빙글빙글 도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 위로, 숲멧돼지의 거대한 그림자가 덮쳐왔다. 놈이 그를 짓밟으려 앞발을 들었다. 시간이 느려졌다. 이대로 죽는 건가. 그런 생각이 스쳤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두려움보다 먼저 온 건 억울함이었다. 이제 막 새로운 세계에 떨어졌는데, 첫 사냥에서 멧돼지 발굽에 깔려 죽는다는 게 말이 되나. 그 순간, 몸 안 깊은 곳에서 뜨거운 무언가가 끌려 올라왔다. 마력. 로한은 반사적으로 손을 뻗었다. 무엇을 할지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그저 웹소설 속 주인공들이 하던 대로, "막아라"라고 속으로 외쳤다. 웅— 손끝에서 옅은 빛의 막이 펼쳐졌다. 반투명한 빛이 순식간에 원을 그리며 커졌다. 숲멧돼지의 앞발이 그 막에 부딪혔다. 퍽, 하는 소리와 함께 놈의 몸이 뒤로 튕겨 나갔다. 로한은 숨을 몰아쉬며 몸을 일으켰다. 손끝이 아직 저릿했다. 방금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몸으로 먼저 알았다. 머리로는 뒤늦게 이해가 따라왔다. [스킬 발현: 방어막 (마력 소모 40)] 눈앞에 짧은 문구가 스쳐 지나갔다. 확인할 시간은 없었다. 숲멧돼지가 다시 자세를 잡았다. 뒤로 밀려난 만큼 더 화가 난 듯했다. 콧김이 거칠어졌다. 앞발로 땅을 두 번, 세 번 긁었다. 이번엔 더 낮게, 더 빠르게 달려들었다. 로한은 이를 악물었다. 방어만으로는 끝나지 않는다는 걸 직감했다. 마력에도 한계가 있을 것이다. 눈앞의 문구가 그것을 알려주고 있었다. 소모, 라는 단어가 마음에 걸렸다. 그는 단검을 고쳐 잡았다. 손바닥의 땀을 옷자락에 한 번 닦았다. 숨을 짧게 들이쉬었다. 놈이 달려드는 순간, 몸을 완전히 낮췄다. 무릎이 흙에 닿을 정도로. 놈의 배 밑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그리고 위를 향해 단검을 찔러 올렸다. 손끝에 뜨겁고 축축한 감각이 전해졌다. 칼날이 놈의 목 아래를 뚫고 들어갔다. 무언가 단단한 것을 지나 부드러운 것으로 들어가는 감각. 손목을 타고 그 감촉이 그대로 전해졌다. 로한은 속이 뒤틀리는 걸 느꼈다. 하지만 손을 놓지 않았다. 숲멧돼지가 크게 울부짖었다. 몇 걸음 비틀거리다가, 다리가 꺾였다. 그리고 쓰러졌다. 무겁고 둔한 소리가 땅을 울렸다. 숲이 조용해졌다. 새소리도, 벌레 소리도 잠시 멈춘 것 같았다. 오직 로한의 숨소리만 거칠게 들렸다. 로한은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손이 피범벅이었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사람을 죽인 것도 아닌데, 손이 떨림을 멈추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손끝부터 손목까지 붉게 물들어 있었다. 이 손이 방금 무언가의 목숨을 끊었다. 짐승이라고 해도, 살아있던 것이 이제 움직이지 않는다는 사실은 똑같았다. 숨을 몰아쉬는 사이, 흙냄새와 피 냄새가 뒤섞여 코끝을 찔렀다. 웅— [경험치 획득: 340] [레벨 13 → 변화 없음. 다음 레벨까지 220 필요] [아이템 드롭: 숲멧돼지의 모피, 숲멧돼지의 어금니 (2)] 창을 확인한 로한은 낮게 웃었다. "진짜, 게임이네." 목소리가 살짝 갈라져 나왔다. 웃음이었지만 웃음처럼 들리지 않았다. 그는 손등으로 이마의 땀을 훔쳤다. 손등에도 핏자국이 있었다. 그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다리가 후들거렸다. 그래도 걸을 수는 있었다. 그는 숲멧돼지의 사체 곁으로 다가갔다. 냄새가 훅 끼쳤다. 피 냄새, 흙냄새, 그리고 아직 온기가 남은 짐승의 체취. 가까이서 보니 놈의 몸집은 생각보다 더 컸다. 어른 남자 하나는 족히 들어갈 만한 크기였다. 갈색 털은 거칠었고, 여기저기 진흙과 마른 잎이 엉겨 있었다. 목 아래 상처에서 아직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무엇부터 해야 할지 몰랐다. 하지만 웹소설에서 배운 게 있었다. 소재는 상하기 전에 회수해야 한다는 것. 그는 배낭을 열었다. 안에 넣기엔 사체가 너무 컸다. 배낭 크기와 사체 크기를 눈으로 비교해보고는 헛웃음이 나왔다. 이건 애초에 말이 안 되는 시도였다. 그때 문득 떠오른 게 있었다. 스토리지. 이전에 창을 넘기다가 흘려본 기능이었다. 사용법도 제대로 몰랐다. 하지만 지금은 시험해볼 수밖에 없었다. 그는 속으로 되뇌었다. "스토리지, 열려라." 웅— 허공에 검은 사각형의 틈이 열렸다. 안쪽은 어두웠지만 냄새는 나지 않았다. 로한은 조심스레 손을 넣어보았다. 손이 사라지지 않았다. 딱딱한 감각도 없었다. 그냥 텅 빈 공간이 있는 듯했다. 손끝에 닿는 느낌이 이상했다. 차갑지도 뜨겁지도 않았다. 그냥, 아무것도 없는 느낌. 마치 손을 물속이 아니라 무(無) 속에 담근 것 같았다. 그는 시험 삼아 단검을 넣었다 뺐다. 아무 문제 없었다. 단검은 사라졌다가 그대로 다시 나타났다. 날에 묻은 핏자국도 그대로였다. "이거 완전 사기잖아." 그는 혼자 중얼거리며 검은 틈을 다시 들여다보았다. 안쪽 깊이가 어느 정도인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그저 어둠만 있었다. 그는 숲멧돼지의 사체 전체를 스토리지에 밀어넣었다. 놀랍게도 사체는 아무 저항 없이 검은 틈 속으로 사라졌다. 무게도, 부피도 상관없다는 듯이. [스토리지에 저장됨: 숲멧돼지 사체 (1)] 로한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이제야 좀 살 것 같았다. 손끝의 떨림도 조금씩 가라앉고 있었다. 그는 자리에 서서 잠시 눈을 감았다. 심장 소리가 서서히 정상으로 돌아오는 게 느껴졌다. 이 세계는 게임이 아니다. 사냥은 진짜였고, 피는 진짜였고, 짐승의 마지막 울음소리도 진짜였다. 하지만 시스템만은 게임 같았다. 경험치, 레벨, 스토리지. 이 모순이 로한을 계속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그런데 그 안도는 오래가지 못했다. 바람이 다시 바뀌었다. 풀냄새와 흙냄새 사이로, 낯설지만 익숙한 냄새가 다시 섞여 들어왔다. 방금 전 쓰러뜨린 놈과 똑같은 냄새였다. 이번엔 하나가 아니었다. 저 멀리서 낙엽 밟는 소리가 두 개, 세 개, 그 이상으로 겹쳐 들려오고 있었다. 발소리의 무게가 하나하나 달랐다. 어떤 것은 가볍고 빨랐다. 어떤 것은 무겁고 느렸다. 로한은 몸을 굳혔다. 숲멧돼지는 무리 지어 다닌다는 사실이, 그제서야 머릿속에서 떠올랐다. 방금 쓰러뜨린 놈은 무리에서 떨어져 나온 한 마리였을 뿐이었다. 그리고 지금, 그 무리가 냄새를 맡고 다가오고 있었다. 로한의 손끝이 다시 차가워졌다. 마력은 얼마나 남았을까. 방어막 한 번에 40을 썼다. 지금 몸 상태로 몇 번이나 더 쓸 수 있을지, 그는 알 수 없었다. 낙엽 밟는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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