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쓰러졌더니 18살 모험가

4화

로한은 그 자리에서 몇 걸음 물러났다. 손끝이 차가워졌다. 웹소설 속에서 백 번은 읽어본 장면이었지만, 실제로 눈앞에서 보는 것은 완전히 다른 무게로 다가왔다. 종이 위의 문장과 눈앞의 뼈는 같은 것이 아니었다. 문장은 읽고 넘기면 사라졌지만, 뼈는 그 자리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는 숨을 크게 들이쉬고 내쉬었다. 한 번 더. "침착하자." 그는 스스로에게 말했다. 목소리가 생각보다 작게 나왔다. 숲의 나무들이 그 소리를 삼켜버린 것 같았다. 이 세계는 위험한 곳이라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 놀랄 일이 아니었다. 다만 마음의 준비가 부족했을 뿐이었다. 마음의 준비란 원래 그런 것이었다. 아무리 많이 해도 실제 앞에서는 늘 부족했다. 그는 무릎을 굽히지 않았다. 손가락뼈 주변을 다시 살피지 않기로 했다. 확인해봐야 할 것은 이미 확인했다. 이 숲에서 누군가 죽었고, 그 이유는 지금 알 필요가 없었다. 알아야 할 때가 오면, 그때 알게 될 것이었다. 지금 필요한 것은 이유가 아니라 거리였다. 그는 뒤돌았다. 걸음을 옮기면서도 등 뒤가 신경 쓰였다. 마치 그 손가락뼈가 자신을 따라오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말도 안 되는 생각이라는 걸 알면서도, 몇 걸음을 더 걷고서야 어깨의 긴장이 풀렸다. 해가 더 기울었다. 나무 그림자가 길어지고 색이 짙어졌다. 로한은 걸음을 서둘렀다. 숲을 벗어나는 길은 생각보다 멀었다. 나무들 사이로 희미한 오솔길이 보였다. 오래 방치된 흙길이었지만, 사람이 다닌 흔적은 분명했다. 짓밟힌 풀, 파인 발자국, 부러진 잔가지들. 그는 그 길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걷는 동안 그는 상태창을 몇 번이고 다시 열어보았다. 확인하고 또 확인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이 세계에서 그가 유일하게 신뢰할 수 있는 것이 그 창이었다. 스탯, 스킬, 인벤토리 항목까지 하나씩 다시 훑었다. [인벤토리] [숲멧돼지 사체 (4)] [숲멧돼지 모피 (1)] [숲멧돼지 어금니 (2)] [낯선 인식표 (1)] [마른 빵 (1)] [물주머니 (1)] 그는 인식표 개수를 보고 잠시 멈췄다. 자신이 원래 가지고 있던 것과, 방금 발견한 것. 둘 다 인벤토리에 들어와 있었다. 숫자 하나가 그렇게 무거울 수 있다는 걸 그는 처음 알았다. 그는 자신의 인식표를 다시 꺼내 살폈다. 나무패였다. 손바닥보다 조금 작았고, 표면은 오래 만져서 반질반질했다. 표면에 새겨진 문자를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이상하게도, 이번엔 글자가 눈에 들어왔다. [로한 · E급 모험가 · 소속: 무소속] 그는 눈을 크게 떴다. "읽힌다." 숨이 잠깐 멎었다. 처음 이 세계에 떨어졌을 때, 눈앞의 모든 문자는 낯선 그림처럼 보였었다. 그런데 지금은 자연스럽게, 마치 원래 한국어를 읽듯이 읽혔다. 전생자 특전인지, 시스템의 자동 번역 기능인지는 알 수 없었다. 어느 쪽이든 다행이었다. 그는 다른 인식표를 꺼내 다시 들여다보았다. 이번 것도 얇은 나무패였다. 손끝에 닿는 감촉이 매끄러웠다. [이서하 · D급 모험가 · 소속: 은빛달 용병단] 이서하. 여성 이름처럼 보였다. D급이면 자신보다 한 단계 높은 등급이었다. 그런 사람이 이런 숲에서 손가락뼈만 남기고 사라졌다는 게 마음에 걸렸다. E급인 자신이 상대할 수 없는 무언가가 이 숲 어딘가에 있다는 뜻이었다. "은빛달 용병단." 그는 그 이름을 되뇌었다. 발음이 입에 잘 붙지 않았지만, 몇 번을 되뇌자 어느 정도 익숙해졌다. 마을에 도착하면 이 인식표를 어떻게 처리할지 고민이었다. 돌려줘야 할지, 팔아야 할지, 아니면 정보를 캐물어야 할지. 만약 그 용병단이 이 근방에서 활동하고 있다면, 동료를 찾고 있을 가능성이 컸다. 그렇다면 자신이 먼저 그들을 찾아가는 게 나을지, 아니면 최대한 거리를 두는 게 나을지도 판단이 서지 않았다. 웹소설 속에서는 이런 상황에서 주인공이 정보를 팔아 신뢰를 얻거나, 혹은 오해를 받아 쫓기는 신세가 되는 전개가 흔했다. 어느 쪽이든 좋은 결말은 아니었다. 그는 인식표를 다시 인벤토리에 집어넣었다. 지금은 결정할 때가 아니었다. 오솔길을 따라 삼십 분쯤 걷자 나무가 조금씩 옅어지기 시작했다. 발밑의 흙도 조금 달라졌다. 딱딱하게 다져진 부분이 늘어났고, 수레바퀴 자국처럼 보이는 흔적도 있었다. 사람이 사는 곳이 가깝다는 신호였다. 저 멀리 연기가 보였다. 회색 실처럼 가늘게 하늘로 올라가는 연기였다. 마을이었다. 로한은 걸음을 멈추고 잠시 숨을 골랐다. 마을에 들어간다는 것은, 이 세계의 사회 속으로 처음 발을 들여놓는다는 뜻이었다. 화폐, 언어, 관습, 그 모든 것이 낯설 터였다. 웹소설을 읽을 때는 그런 디테일이 그저 배경 설명처럼 지나갔지만, 지금은 그 배경 하나하나가 그의 생존과 직결된 문제였다. 그는 웹소설 속에서 읽었던 수많은 설정들을 머릿속에서 다시 정리했다. 등급 사회. 모험가 길드. 귀족과 평민의 구분. 마법사 협회. 어느 것이 이 세계에 실제로 존재할지는 알 수 없었다. 소설 속 설정이 완전히 그대로 적용될 거라는 보장도 없었다. 자신이 읽었던 작품이 이 세계와 정확히 일치하는지조차 확신할 수 없었다. 비슷한 설정이라고 해서 세부까지 같으리라는 법은 없었다. 직접 확인해야 했다. 몸으로, 눈으로, 발로. 그는 다시 걷기 시작했다. 해가 완전히 저물기 전에 마을 안으로 들어가야 했다. 밤이 되면 이 숲은 훨씬 위험해질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근거 없는 예감이 아니었다. 그가 발견한 손가락뼈가, 그 근거였다. D급 모험가조차 살아남지 못한 숲이었다. 밤이 되면 그 위험은 몇 배로 커질 것이었다. 걷는 동안 그는 토지 마법을 다시 시험해보았다. 발밑의 흙을 살짝 다져 걷기 편하게 만들었다. 마력 소모는 크지 않았다. 몇 번을 더 시도해보니 감각이 조금씩 익숙해졌다. 흙이 다져지는 순간, 발바닥에 미세한 진동이 느껴졌다. 그 진동은 매번 조금씩 다른 느낌을 남겼다. 마치 흙마다 성질이 다른 것처럼. 그는 걸음을 옮기며 이번엔 다른 방식으로 마법을 써봤다. 흙을 다지는 대신 살짝 부드럽게 만들었다. 발이 푹 빠지지 않을 정도로만. 실패였다. 발이 진창에 빠진 것처럼 푹 들어갔다. 그는 헛웃음을 지으며 발을 뺐다. "이거 진짜 잘 키우면 개간이나 건축에도 쓸 수 있겠는데." 그는 혼자 중얼거렸다. 전생에서 그는 아파트 청약조차 십오 년째 떨어지고 있었다. 매번 가점이 부족했고, 매번 순위에서 밀렸다. 이곳에서는 마법으로 땅을 다질 수 있다는 사실이, 이상하게도 큰 위안이 되었다. 적어도 여기서는 노력이 결과로 바로 이어졌다. 그는 발밑을 몇 번 더 다지며 걸었다. 익숙해질수록 마력 소모가 줄어드는 게 느껴졌다. 반복이 곧 효율이었다. 이 세계에서도 그 법칙은 유효했다. 연기가 점점 가까워졌다. 나무들 사이로 낮은 목책이 보였다. 마을을 둘러싼 방벽이었다. 완전한 성벽은 아니었다. 통나무를 엮어 세운 정도의, 짐승이나 도적을 막기 위한 최소한의 방어선처럼 보였다. 목책 위에는 날카롭게 깎은 끝이 밖을 향해 있었다. 목책 앞에는 두 명의 사람이 서 있었다. 갑옷을 입고 창을 든 이들이었다. 문지기였다. 한 명은 체격이 크고 다른 한 명은 상대적으로 작았다. 둘 다 표정에 긴장이 배어 있었다. 로한은 걸음을 멈추고 옷매무새를 정리했다. 손에 묻은 피는 이미 마른 지 오래였지만, 갈색 가죽옷 여기저기에 흔적이 남아 있었다. 소매 끝에, 어깨 부근에, 짙은 갈색 얼룩이 말라붙어 있었다. 멧돼지의 피였지만, 멀리서 보면 구분이 어려울 것이었다. 그는 손으로 옷의 얼룩을 슬쩍 문질러 보았다. 지워지지 않았다. 오히려 더 눈에 띄게 번지는 것 같았다. 그는 결국 손을 뗐다. 숨을 한번 크게 들이쉬었다. 심장이 조금 빨리 뛰고 있었다. 이 세계에서 처음 마주하는 사람들이었다. 첫인상이 어떤 식으로든 앞으로의 상황에 영향을 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웹소설에서 흔히 보던 장면, 낯선 이방인이 마을 입구에서 의심받는 장면이 떠올랐다. 대부분 좋게 끝나지 않았다. 그는 걸음을 옮겼다. 목책을 향해, 천천히.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문지기들의 눈빛이 더 선명하게 보였다. 경계였다. 순수한 호기심이 아니라, 위험 요소를 판별하려는 시선이었다. 문지기 한 명이 그를 발견하고 창을 살짝 들어 올렸다. 창끝이 로한을 향해 정확히 조준되었다. "멈춰라." 낮고 무거운 목소리였다. 나이가 있어 보이는 목소리였다. 로한은 걸음을 멈췄다. 발끝에서부터 서늘한 기운이 올라왔다. 손끝이 다시 차가워졌다. 손가락뼈를 보았을 때와는 다른 종류의 차가움이었다. 그때는 죽음에 대한 반응이었고, 지금은 살아있는 사람의 적의에 대한 반응이었다. 그는 두 손을 천천히 들어 보였다. 무기가 없다는 걸 보여주기 위한 몸짓이었다. 웹소설 속에서 본 장면 그대로였다. 하지만 이번엔 그 장면 속에 자신이 서 있었다. "모험가입니다." 그는 목소리를 최대한 안정적으로 냈다. 속으로는 심장이 두 배는 빠르게 뛰고 있었지만, 겉으로는 그렇게 보이지 않기를 바랐다. 문지기는 대답하지 않았다. 창을 든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게 보였다. 다른 한 명도 슬쩍 옆으로 움직이며 그를 반원으로 감싸듯 위치를 잡았다. 로한의 옷에 묻은 갈색 얼룩으로 시선이 향했다. 문지기의 눈동자가 그 얼룩에서 멈췄다. "그 몸에 묻은 건 뭐지." 목소리가 조금 더 낮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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