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 ›문지기가 로한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낡은 갑옷. 녹슨 창. 하지만 눈빛만은 날카로웠다. 오랫동안 이 문을 지켜온 자의 눈이었다.
"소속을 밝혀라."
로한은 인식표를 꺼내 내밀었다. 손끝이 살짝 떨렸다. 이 세계의 첫 관문이었다.
숲을 벗어난 지 채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았다. 몸에는 아직 나뭇잎 냄새가 배어 있었다. 흙 냄새. 피 냄새. 그리고 낯선 몸에서 나는, 아직 자신의 것이라 느껴지지 않는 살냄새.
문지기가 인식표를 받아 유심히 살폈다. 표면에 새겨진 문양을 손가락으로 한 번 쓸어보았다. 그리고 고개를 들었다.
"E급, 무소속. 처음 보는 얼굴인데."
옆에 서 있던 다른 문지기도 슬쩍 시선을 돌렸다. 창끝이 미세하게 로한 쪽으로 향했다. 경계였다.
"이 근방을 지나던 중입니다."
로한은 최대한 담담하게 대답했다. 목소리가 낯설게 들렸다. 자신의 것이 아닌, 젊은 남자의 음성이었다. 아직 익숙해지지 않았다.
성대의 울림이 다르다. 발음할 때 혀끝이 닿는 위치가 다르다. 삼십 년을 넘게 써온 몸이 아니었다. 이제 겨우 하루 써본 몸이었다.
문지기는 미심쩍은 눈으로 그를 다시 살폈다.
"이 숲에서 온 건가?"
"그렇습니다."
"요즘 이 숲, 위험하다는 거 몰랐나?"
문지기의 목소리에 날이 섰다. 창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로한은 잠시 대답을 고르다가, 솔직하게 말하기로 했다. 거짓말을 지어낼 여유도, 재주도 없었다.
"숲멧돼지 무리를 만났습니다. 처리했습니다."
문지기 두 명이 서로 눈짓을 주고받았다. 하나가 낮게 웃었다.
"무리를 만나고 살아 나온 거야? E급이 말이야?"
그 웃음에는 비아냥이 섞여 있었다. 로한은 그 시선의 의미를 곧바로 알아챘다. E급은 이 세계에서 가장 낮은 등급이었다. 웹소설 속 클리셰 그대로였다.
숱하게 읽어온 이야기들 속에서, E급은 언제나 조롱의 대상이었다. 무시당하고, 밀려나고, 때로는 이용당하는 존재. 그 클리셰 안에 자신이 들어와 있다는 사실이 실감 나지 않았다.
로한은 대답 대신 인벤토리에서 숲멧돼지의 어금니 두 개를 꺼내 보였다.
누렇고 두꺼운 어금니였다. 끝이 뾰족했고, 뿌리 쪽에는 아직 마르지 않은 핏자국이 남아 있었다.
문지기들의 표정이 살짝 변했다.
"이거..."
하나가 손을 뻗어 어금니를 집어 들었다. 무게를 가늠하듯 손바닥 위에서 두어 번 흔들어 보았다.
"증거로 충분합니까?"
문지기는 어금니를 받아 살펴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옆에 있던 다른 문지기의 창끝도 서서히 내려갔다.
"들어가라. 다만 길드에 먼저 들러서 등록 확인을 받아야 한다. 이 마을 규칙이다."
"알겠습니다."
로한은 인식표를 돌려받고 목책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등 뒤에서 문지기들의 목소리가 낮게 이어졌다.
"E급이 숲멧돼지 무리를 잡아? 말이 돼?"
"어금니는 진짜던데."
"운이 좋았겠지."
로한은 그 말을 못 들은 척했다. 사실 운이 좋았던 것도 있었다. 하지만 전부는 아니었다.
마을은 생각보다 작았다. 흙길 양옆으로 나무와 돌을 섞어 지은 집들이 늘어서 있었다. 지붕은 대부분 마른 풀로 엮여 있었다. 굴뚝에서 저녁밥을 짓는 연기가 올라왔다. 사람들의 말소리, 아이들 뛰는 소리, 어딘가에서 들려오는 대장간 망치 소리.
로한은 그 모든 소리와 냄새를 천천히 받아들였다.
빵 굽는 냄새. 가축의 분뇨 냄새. 젖은 흙 냄새. 누군가 태우는 장작 냄새.
낯설었다. 하지만 살아 있다는 감각이 강하게 밀려왔다. 경비원으로 살던 시절, 그는 새벽 세 시의 텅 빈 공사장에서 이런 소음을 그리워한 적이 있었다.
그때는 혼자였다. CCTV 화면 여러 개를 앞에 두고, 형광등 불빛 아래서 커피를 마시며 밤을 새웠다. 소음이 그리웠던 건 아니었다. 사람이 그리웠던 거였다. 사람 사는 냄새가.
지금 이 마을에는 그 냄새가 가득했다.
길가에 앉은 노파가 로한을 쳐다보았다. 처음 보는 얼굴이라는 눈빛이었다. 아이 둘이 그의 앞을 가로질러 뛰어갔다. 하나가 웃으며 소리쳤다.
"잡아봐, 잡아봐!"
로한은 저도 모르게 걸음을 늦추고 그 뒷모습을 눈으로 좇았다. 익숙한 광경이었다. 어느 세계든 아이들은 저렇게 뛴다.
마을 중앙에는 다른 건물들보다 조금 큰, 돌로 된 건물이 있었다. 문 위에 걸린 나무 간판에는 방패와 검이 교차된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모험가 길드였다.
간판은 오래되어 색이 반쯤 벗겨져 있었다. 하지만 새겨진 문양만큼은 뚜렷했다. 방패. 검. 두 개가 교차하는 지점.
점. 선. 물결. 탑.
로한의 머릿속에서 문득 그 문양들이 스쳐 지나갔다. 이 세계에 떨어진 이후, 어딘가 모르게 눈에 익은 표지들이었다. 아직 그 의미를 다 파악하지 못했다.
로한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문이 열리는 순간 실내의 소음이 한꺼번에 쏟아졌다.
내부는 넓었다. 나무 테이블 여러 개가 놓여 있었고, 벽에는 각종 의뢰서가 붙어 있었다. 몇몇 모험가들이 테이블에 앉아 술을 마시거나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들의 시선이 잠시 로한에게 머물렀다가 다시 흩어졌다.
한쪽 테이블에서는 갑옷을 입은 덩치 큰 남자가 술잔을 부딪치며 웃고 있었다. 다른 테이블에서는 로브를 걸친 여자가 지도를 펼쳐놓고 손가락으로 뭔가를 짚고 있었다. 그 옆, 벽에 붙은 의뢰서 앞에서는 젊은 청년 하나가 종이를 뜯어내며 낮게 욕설을 내뱉었다.
낮은 웃음소리. 술잔 부딪히는 소리. 나무 의자가 바닥에 끌리는 소리.
로한은 그 모든 것을 눈에 담으며 안쪽 접수대로 걸어갔다.
접수대에는 젊은 남자가 앉아 있었다. 무표정한 얼굴로 서류를 정리하던 그가 고개를 들었다.
짙은 갈색 머리를 하나로 묶은 남자였다. 눈매가 날카로웠고, 손끝은 서류를 다루는 데 익숙한 듯 정확하게 움직였다.
"등록 확인이신가요?"
"네."
로한은 인식표를 내밀었다. 접수원은 인식표를 받아 옆에 놓인 반투명한 수정판 위에 올렸다.
웅—
수정판에서 옅은 빛이 새어 나왔다. 접수원의 표정이 순간 미묘하게 바뀌었다. 그는 인식표와 수정판을 번갈아 살펴보았다.
빛의 색이 이상했다. 다른 등록자들의 인식표를 확인할 때는 옅은 청색 빛이 도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런데 로한의 인식표에서는 청색과 함께, 그 밑으로 아주 희미한 붉은 결이 겹쳐 흐르고 있었다.
"...잠시만요."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안쪽 방으로 들어갔다. 로한은 그 자리에 서서 기다렸다. 뭔가 잘못됐다는 느낌이 스쳤다.
접수대 옆에 앉아 있던 다른 모험가 하나가 힐끗 로한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곧 관심 없다는 듯 시선을 돌렸다.
시간이 유난히 더디게 흘렀다. 벽에 걸린 낡은 시계추가 흔들리는 소리가 유독 크게 들렸다. 로한은 손끝을 가만히 쥐었다 펴며 그 시간을 견뎠다.
이 세계에 온 지 하루도 지나지 않았다. 아직 자신이 가진 이 몸에 대해서도, 자신에게 붙은 시스템에 대해서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상태였다. 그런데 벌써 뭔가 어긋나고 있다는 감각이 등줄기를 타고 올라왔다.
몇 분 후, 접수원이 돌아왔다. 그 뒤로 나이가 든 남자 하나가 함께 나왔다. 길드 마크가 새겨진 조끼를 입은 남자였다.
머리는 반백이었고, 얼굴에는 오래된 흉터 하나가 눈썹 위를 가로지르고 있었다. 걸음걸이는 조심스러웠지만, 눈빛만큼은 흔들림이 없었다.
남자는 로한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그리고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자네, 언제 등록한 모험가인가?"
"기억이... 정확하지 않습니다."
로한은 순간 거짓말을 지어내지 못했다. 사실이었다. 그는 이 세계에서 로한으로 등록된 기록이 없었다. 애초에 몸을 갖게 된 순간부터가 오늘이었다.
남자의 눈이 가늘어졌다.
"기억이 정확하지 않다는 게, 무슨 뜻이지?"
로한은 대답을 찾지 못했다. 진실을 말할 수도 없었고, 거짓을 지어낼 재간도 없었다. 침묵이 길어졌다.
남자는 잠시 침묵했다. 그리고 수정판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 인식표, 등록 기록이 이상해. 마력 수치가... 이런 수치는 본 적이 없어."
접수원이 옆에서 조심스레 덧붙였다.
"단장님, 청색 결 아래에 다른 게 겹쳐 있어요. 이런 건 처음 봐요."
단장이라 불린 남자의 시선이 다시 로한에게로 돌아왔다. 아까보다 더 깊게, 더 오래 머무는 시선이었다.
로한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전생자] 칭호가 시스템에 그대로 기록되어 있다는 사실을, 그는 이제서야 깨달았다.
숲에서 상태창을 확인했을 때, 자신에게 붙은 그 칭호를 대수롭지 않게 넘겼던 것이 떠올랐다. 이 세계의 시스템이 그것을 어떻게 읽어내는지, 어떤 식으로 외부에 드러내는지 전혀 헤아리지 못했다.
남자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자네, 정체가 뭔가."
그 한마디가 길드 안의 공기를 갈랐다.
길드 안의 소음이 갑자기 멀게 느껴졌다. 몇몇 모험가들의 시선이 슬며시 이쪽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갑옷을 입은 덩치 큰 남자가 술잔을 내려놓았다. 로브를 걸친 여자도 지도에서 손을 떼고 이쪽을 바라보았다. 의뢰서를 뜯던 청년마저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접수대 뒤, 나이 든 남자의 손이 허리춤의 무언가로 슬며시 움직였다.
로한은 그 손의 움직임을 놓치지 않았다.
숨을 들이쉬었다. 숲에서 멧돼지 무리를 상대할 때보다 더 차가운 긴장이 손끝을 타고 올라왔다. 여기서 잘못 대답하면, 이 몸이 갖게 된 지 하루도 안 된 삶이 여기서 끝날지도 몰랐다.
길드 안의 모든 눈이 그를 향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