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조용히 살고픈 만능장인

2화

목소리가 다가올수록 나는 심장이 다시 쿵쿵 뛰기 시작했다. 소화기를 슬쩍 등 뒤로 숨겼다. 이 상황에서 소화기를 들고 있는 걸 보이면 뭐라고 설명해야 하나,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아니, 근데 생각해보니 이 숲에 소화기가 있는 것 자체가 이미 설명 불가능한 상황 아닌가. 발자국 소리가 점점 커졌다. 덤불이 부스럭거리는 소리, 마른 가지가 밟혀 부러지는 소리, 그리고 낮게 가라앉은 숨소리까지 순서대로 들려왔다. 덤불을 헤치고 나온 사람은 백발의 노인이었다. 허리는 꼬장꼬장하게 펴져 있었고, 손에는 낫 비슷한 농기구를 하나 들고 있었다. 회색 눈동자가 나를 훑었다. 눈빛이 예리했다. 사람 뼛속까지 스캔하는 것 같은 눈이었다. "이보시오,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요." "저, 그게…" 말을 더듬었다. 뭐라고 해야 하지. 다른 세계에서 왔다고 하면 정신병원에 끌려가겠지. 아니, 여기 정신병원이 있는지도 모르겠다. 노인이 늑대 발자국과 흩어진 흰 분말을 보더니 눈을 크게 떴다. "이건… 폭염 늑대 아니오? 그놈을 쫓아냈단 말이오?" "아, 예. 그, 우연히…" "우연히?" 노인의 눈빛이 더 매서워졌다. 이거 안 믿는 눈치인데. 하긴 나도 내가 안 믿긴다. 소화기로 늑대를 잡았다고 하면 누가 믿겠나. 노인이 낫을 슬쩍 고쳐 쥐며 한 걸음 다가왔다. 나는 반사적으로 뒷걸음질을 쳤다. [촌장 김덕수입니다. 이슬촌의 마을 대표입니다.] 갑자기 눈앞에 뜬 글자에 나는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했다. ···아니 이 시스템은 왜 상대방 소개까지 해주는 거야. 명함이라도 주는 거냐. 이럴 거면 악수하라고 손 내밀어주는 UI도 만들어줘라. "저는… 서준혁이라고 합니다." 일단 이름부터 말했다. 성은 그대로 쓰기로 했다. 딱히 바꿀 이유도 없었으니까. 여기서까지 가명을 쓰면 나 자신도 헷갈릴 것 같았다. "서준혁이라. 처음 듣는 성이구먼. 어디서 왔소?" "저, 그게, 멀리서 왔습니다. 좀 복잡한 사정이 있어서요." 최대한 애매하게 말했다. 이럴 때는 애매함이 최선의 방어다. 회사 면접 때 배운 스킬이 여기서 쓸 일이 있을 줄이야. 김덕수는 잠시 나를 훑어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위아래로, 신발부터 머리끝까지, 마치 중고 물건 감정하듯 살펴보는 시선이었다. "뭐, 사연 많은 얼굴이구먼. 요즘 세상엔 그런 사람이 한둘이 아니지." 다행히 더 캐묻지는 않았다. 이 노인, 생각보다 눈치가 빨랐다. 아니면 그냥 남 일에 관심이 없는 타입인가. "이 근처엔 마을이 하나 있소. 이슬촌이라고. 여기서 남쪽으로 반 시간쯤이면 도착할 게요." "저기, 혹시… 제가 좀 지낼 만한 곳이 있을까요?" 말이 나오자마자 얼굴이 화끈거렸다. 처음 본 노인한테 재워달라고 하는 게 얼마나 뻔뻔한 짓인지 알면서도, 지금 나한테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노숙을 하다가 또 다른 짐승이 나오면 그때는 소화기 분말도 남아있지 않을 텐데. 김덕수가 나를 위아래로 훑어봤다. 아까보다 조금 더 오래. "음… 마을 변두리에 빈집이 하나 있소. 예전에 약초꾼이 살던 폐가인데, 지금은 아무도 안 쓰고 있지." "그, 거기 지내도 될까요?" "조건이 있소." 노인의 목소리가 갑자기 단호해졌다. "뭐, 뭔데요." 또 무슨 노예 계약서라도 내미는 건가. 몸이라도 팔라고 하면 어쩌지. "밭일이오. 마을 공동 밭이 요즘 손이 부족해서 골머리를 앓고 있소. 그 밭일을 도와주면, 폐가는 공짜로 내주지." [촌장 김덕수가 거래를 제안합니다. 조건: 마을 공동 밭 노동력 제공.] 시스템 메시지까지 뜨는 걸 보니 이게 진짜 거래인 모양이었다. ···회사 다닐 때도 계약서에 사인하기 전에 이렇게 조건 확인은 안 했는데. 갑자기 세상이 이렇게 투명해지니까 오히려 불안하다. "좋습니다, 하겠습니다." 생각할 것도 없었다. 지금 나한테는 지붕 있는 곳이 제일 급했다. 밭일 정도야 몸으로 때우면 되는 거고, 어차피 회사에서도 삽질은 많이 해봤다. 김덕수가 만족스럽게 웃었다. 주름진 얼굴에 웃음이 퍼지자, 방금까지의 매서운 눈빛은 감쪽같이 사라졌다. "그럼 따라오시오. 해 지기 전에 가는 게 좋겠소." * * * 숲을 벗어나자 나지막한 언덕들이 펼쳐졌다. 밭과 초가지붕, 굴뚝에서 올라오는 연기. 어디서 본 것 같은 풍경인데, 낯설었다. 사진 속 시골 마을 같기도 하고, 게임 속 튜토리얼 마을 같기도 했다. 바람이 불어올 때마다 흙냄새와 젖은 풀 냄새가 코를 스쳤다. 도시에서는 맡아본 적 없는 냄새였다. 이슬촌은 생각보다 작았다. 집이 스무 채 남짓, 사람들도 많지 않았다. 마을 사람들이 지나가며 나를 힐끔거렸다. 낯선 옷차림 때문인지 시선이 유독 따가웠다. "저 사람 뭐야, 옷차림이 이상하네." "촌장님이랑 같이 오는데?" "저 신발 되게 반짝이는데 어디서 온 사람이야?" 수군거림이 들렸지만 김덕수는 신경 쓰지 않고 걸음을 옮겼다. 나는 그 뒤를 따라가며 최대한 시선을 피했다. 이럴 때 존재감을 지우는 스킬이 있으면 좋겠는데. 마을 변두리, 나무들 사이에 낡은 오두막이 서 있었다. 지붕 일부가 무너지고, 벽에 이끼가 잔뜩 낀 그 집을 보자마자 나는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이거 리모델링 각인데. 아니, 리모델링이 아니라 신축 각이다. 지붕 틈으로 저녁 햇살이 새어 들어오고 있었고, 벽 한쪽은 아예 나무판자로 얼기설기 막혀 있었다. 마당엔 잡초가 허리까지 자라 있었다. 하지만 지붕이 있고, 벽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했다. 오늘 낮에 죽을 뻔했다가 살아났으니, 이 정도면 특급 호텔이다. "여기가 그 집이오. 낡았지만, 손보면 쓸 만할 거요." "감사합니다." 목소리가 저절로 공손해졌다. 지금 이 순간, 이 노인은 나한테 신이나 마찬가지였다. "내일 아침, 마을 공동 밭으로 오시오. 위치는 물어보면 다 알려줄 게요." "몇 시쯤 가면 될까요?" "해 뜨면 오시오. 여기 사람들은 다 그렇게 산다오." ···해 뜨면. 회사에서도 이런 소리 들으면 짜증 났는데, 여기서는 이상하게 반박할 힘이 없었다. 김덕수가 돌아서서 걸어갔다. 그 뒷모습을 보며 나는 문득 의아해졌다. 처음 본 낯선 사람에게 이렇게 쉽게 집을 내주다니, 이 노인 뭔가 있는 건가. 혹시 이 마을에 사람이 너무 없어서 아무나 붙잡아 오는 건 아닐까. [김덕수는 이슬촌의 촌장으로, 마을 안팎의 정보에 밝고 사람을 다루는 데 능숙합니다.] 갑자기 뜬 시스템 정보에 나는 코웃음이 나왔다. ···나이스, 정보 팔이 시스템. 근데 이걸 지금 알려주면 뭐 어쩌라는 거지. 진작 알려줬으면 협상 카드로 좀 써먹었을 텐데. 오두막 안으로 들어서니 곰팡내와 먹지 냄새가 코를 찔렀다. 바닥엔 낡은 침구, 부서진 의자 하나, 벽에 걸린 마른 약초 다발들. 구석에는 깨진 항아리가 하나 놓여 있었고, 그 안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검은 액체가 말라붙어 있었다. 저게 뭐였는지는 궁금하지도 않았다. 일단 오늘 밤은 여기서 자야 했다. 나는 벽에 등을 대고 미끄러지듯 앉았다. 등 뒤로 차가운 흙벽의 감촉이 그대로 느껴졌다. 하루 만에 죽고, 살아나고, 늑대랑 싸우고, 노인한테 집을 빌렸다. ···인생 참 다이내믹하네. 이런 다이내믹 안 해도 됐는데. 창문 틈으로 노을이 붉게 스며들었다. 붉은 빛이 낡은 마룻바닥 위로 길게 늘어졌다. 그 순간 마을 어귀에서 개 짖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한 마리가 아니었다. 여러 마리가 동시에, 마치 뭔가에 쫓기듯 미친 듯이 울부짖고 있었다. 뭔가 심상치 않은 기척이었다.
♡ 좋아요 0 · 로그인 후 좋아요/별점/댓글 참여 가능

댓글 0

  •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