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85세 노인, 두 살배기 대공자

3화

그날 이후, 저택 안 분위기가 조금 이상해졌다. 하인들이 나를 지나칠 때마다 힐끔거리는 시선이 늘었다. 빨래를 개던 하녀도, 마정석을 옮기던 집사도, 심지어 정원에서 잡초를 뽑던 늙은 정원사까지. 다들 나를 볼 때마다 눈이 마주치면 황급히 시선을 돌렸다. '다들 뭔가 알고 있다는 눈빛인데.' 나는 속으로 신경이 쓰였다. 마력 역류 사건 이후로 뭔가 소문이 퍼진 게 분명했다. 그렇다고 두 살짜리가 하인들 붙잡고 "너희 나에 대해 뭘 아는데?" 물어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답답하다.' 나는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전생에는 회의 중에 상사 뒷담화도 실시간으로 캐치하던 나였는데. 지금은 정보 하나 얻으려면 옹알이나 하고 있어야 하는 신세라니. 이런 격차가 진짜 사람 미치게 만든다. 한소율만이 평소와 다름없이 나를 대해줬다. 그녀만은 나를 볼 때 눈을 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 자주 웃어줬다. 그 웃음이 진짜인지, 아니면 나를 안심시키려는 배려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어느 쪽이든 나쁘지 않았다. "도련님, 오늘은 시장 구경 가실래요?" 그녀가 물었다. 목소리에 살짝 장난기가 섞여 있었다. "응!" 나는 신나게 대답했다. 실은 마력 역류로 하루 종일 갇혀 지낸 게 답답해서였다. 방 안에서만 며칠을 보내다 보니 벽지 무늬까지 외울 지경이었다. 그 무늬가 꽃인지 별인지도 이제는 구분이 안 갔다. '이럴 거면 차라리 감옥이 낫겠다.' 라는 생각까지 들었을 정도다. 외출 허가는 어렵지 않게 났다. 마력 회복이 늦어졌으니 차라리 바깥바람을 쐬게 하라는 것이 강태호의 판단이었다고 들었다. '아버지가 직접 판단했다고?' 나는 조금 의아했지만 깊게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원래 그런 사람이었다면 애초에 걱정할 필요도 없었을 테니까. 그리고... 지금은 그냥 바깥 공기가 더 중요했다. * 저잣거리는 활기가 넘쳤다. 마정석을 파는 상인, 갓 구운 빵 냄새를 풍기는 노점, 아이들이 뛰어다니는 골목까지, 이 세계도 사람 사는 곳이구나 싶은 풍경이었다. 한쪽에서는 대장장이가 쇠를 두드리는 소리가 쩅쩅 울렸다. 다른 쪽에서는 행상이 목청을 높이며 뭔가를 팔고 있었다. "싱싱한 마나 열매요! 오늘 딴 거예요!" '마나 열매? 저건 또 뭐야.' 나는 속으로 메모해뒀다. 이 세계에 대해 아는 게 아직도 너무 적다. 책 몇 권 읽은 걸로는 도저히 커버가 안 되는 방대한 설정이었다. 한소율은 나를 품에 안고 천천히 걸었다. 그녀의 품은 늘 그렇듯 따뜻했다. 가끔은 이게 아기 취급받는 것 중 유일하게 좋은 점이라고 생각했다. "저기 저 과일, 예쁘죠?" 그녀가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색이 진한 보랏빛에, 표면이 반짝거리는 낯선 과일이었다. "응, 예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맛도 좋을까?' 속으로 궁금해했지만 물어볼 방법이 없었다. 두 살짜리가 "저거 얼마예요?"라고 묻는 순간 온 저잣거리가 뒤집어질 게 뻔했다. 평화로운 시간이었다. 딱 거기까지가 평화였다. 골목 안쪽에서 뭔가 둔탁한 소리가 났다. 퍽! "악!" 짧은 비명이 이어졌다. 한소율의 걸음이 멈췄다. 나는 시선을 돌렸다. 한 남자가 나무 지팡이로 누군가를 후려치고 있었다. 맞고 있는 건, 목에 낡은 목걸이를 건 아인족 소년이었다. 귀 모양이 사람과 달랐고, 팔 곳곳에 상처가 있었다. 옷은 다 낡아서 실밥이 여기저기 튀어나와 있었다. 신발도 제대로 신지 못한 채였다. "이 짐승 새끼가, 감히 물건을 놓쳐?!" 남자가 소리쳤다. 퍽! 퍽! 소년은 아무 저항도 하지 않았다. 그냥 몸을 웅크리고 맞기만 했다. 바닥에는 깨진 항아리 조각이 흩어져 있었다. 아마 저게 소년이 놓쳤다는 그 '물건'인 듯했다. '…뭐야.' 나는 순간 숨이 막혔다. 두 살배기 몸으로도 그 광경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는 명확하게 느껴졌다. 85년을 살면서, 나는 이런 폭력을 그저 뉴스로만 봤을 뿐이었다. 그것도 화면 너머, 자막 밑, 안전한 거리에서. 그런데 지금 그게 눈앞에서, 실시간으로, 아무런 제지도 없이 벌어지고 있었다. 지나가는 사람들은 그냥 눈길만 한 번 주고 지나갔다. 마치 오늘 날씨 얘기하듯 무심한 시선들이었다. 어떤 아이는 부모 손을 잡고 지나가면서 그 광경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웃기까지 했다. '…저게, 웃을 일이야?' 나는 속으로 이를 갈았다. "…!" 나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손끝에서 뭔가가 꿈틀거리는 게 느껴졌다. [마력 반응 감지] [경고: 감정 연동 마력 폭주 위험] '…또야?' 나는 이를 악물었다. 이번에도 이 몸뚱이는 감정 하나 제대로 못 숨기는 건가. 전생에서는 화가 나도 표정 관리 하나는 기가 막히게 잘했는데. 지금은 화가 나면 몸 안에서 마력이 자기 멋대로 반응해버린다. 이러니 진짜 감정 기복 심한 애니 주인공이 된 느낌이었다. 한소율이 재빨리 나를 반대쪽으로 돌려세웠다. "도련님, 이쪽 보지 마세요." 그녀가 낮게 말했다. 목소리가 평소보다 딱딱했다. 품 안에서도 그녀의 심장 박동이 빨라진 게 느껴질 정도였다. "왜, 왜 저래?" 나는 물었다. 최대한 아기 말투로. 목소리가 떨리는 걸 숨기려고 일부러 어눌하게 말했다. 한소율은 잠시 침묵했다. 그 침묵이 유독 길게 느껴졌다. "노예니까요." 그녀가 짧게 답했다. 그 말이 전부였다. 더 이상의 설명은 없었다. 설명이 필요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 돌아오는 길, 나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한소율도 나를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어차피 아기는 원래 이유 없이 조용해도 그만이니까. 하지만 속으로는 온갖 생각이 소용돌이쳤다. '이 세계는 판타지 소설처럼 예쁘지만은 않구나.' 나는 씁쓸하게 인정했다. 마법이 있고, 대공가가 있고, 성장형 재능 시스템까지 있는 이 세계는— 그 화려한 설정들 밑에, 저런 골목이 아무렇지 않게 깔려 있는 세계였다. 동시에 인간이 아닌 존재를 짐짝처럼 다뤄도 되는 세계였다. 노예라는 말 한마디로 모든 폭력이 정당화되는 세계. 그리고 나는 그 인간 쪽, 그것도 최상위 귀족 가문에 태어난 존재였다. '…내가 뭘 할 수 있을까.' 나는 생각에 잠겼다. 두 살배기 몸으로. 말도 제대로 못 하고, 걸음도 제대로 못 걷는 몸으로. 마력 하나 제대로 못 다뤄서 폭주 경고나 뜨는 몸으로. 답이 나올 리가 없었다. 당장 할 수 있는 거라곤 옹알이하면서 젖병 빠는 게 최선인 처지 아닌가. 이런 상황에서 무슨 정의 실현이니 세계관 개혁이니 하는 건 다 헛소리에 가까웠다. 다만 확실한 건 하나 있었다. 오늘 본 그 장면을, 나는 절대 잊지 못할 것 같았다. 그 소년의 웅크린 등, 깨진 항아리 조각, 그리고 아무도 멈추지 않았던 그 골목의 공기까지. 전부 머릿속에 화인처럼 박혀버렸다. 저택 문 앞에 도착했을 때, 낯선 남자 한 명이 문 앞에 서 있었다. 검을 허리에 찬, 강인한 인상의 남자였다. 체격이 크고, 눈빛이 날카로웠다. 한눈에 봐도 보통 사람은 아닌, 실전을 겪어본 자의 분위기였다. "한소율 님이시군요." 그가 정중하게 인사했다. 목소리는 낮았고, 예의는 갖췄지만 어딘가 압박감이 느껴졌다. "조가(趙家)의 조현민이라고 합니다." 그가 말했다. '…또 새 캐릭터 등장인가.' 나는 순간 긴장했다. 하필이면 오늘, 이런 날 새로운 얼굴이 나타난다는 게 마음에 걸렸다. 한소율의 품속에서, 나는 조용히 그 남자를 올려다봤다. '조가라니. 처음 듣는 이름인데.' 나는 속으로 되뇌었다. 이 저택에 도착한 이후로 알게 된 가문 이름만 해도 몇 개인데, 여기에 하나가 또 추가되는 건가. 한소율의 표정이 살짝 굳어 있었다. 평소의 그 여유로운 웃음이 사라지고, 뭔가를 경계하는 듯한 눈빛이었다. '…쟤도 저 남자를 처음 보는 건가?' 나는 그녀의 반응을 유심히 살폈다. 만약 그렇다면, 이건 결코 가벼운 방문이 아니었다. 바람이 살짝 불었다. 남자의 검 손잡이에 매달린 장식이 짤랑, 소리를 냈다. 그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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