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스무 해 전의 검

1화

알람이 울렸다. 나는 손을 뻗어 스마트폰을 더듬거리며 찾았다. 오전 6시 40분. 창밖으로 희끄무레한 새벽빛이 스며들고 있었다. (오늘도 똑같은 하루겠지.) 나는 이불을 걷고 몸을 일으켰다. 몸을 일으키자마자 허리에서 뻐근한 통증이 올라왔다. 서른여덟, 독신, 야근이 일상인 중소기업 회사원. 나이가 들수록 아침에 몸이 무거워지는 걸 느꼈다. 거울 앞에 서서 세수를 하다가 문득 고개를 들었다. 눈가에 그늘이 진 얼굴이 나를 마주보고 있었다. 스무 살 무렵의 얼굴과는 이제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그때의 나는 눈빛이 살아 있었던 것 같은데, 지금은 그저 흐릿했다. 거울 속 얼굴을 잠시 바라보다가 나는 시선을 돌렸다. (오래 봐서 좋을 게 없지.) 샤워를 마치고 넥타이를 매면서 나는 습관처럼 왼쪽 손목을 만졌다. 희미한 흉터가 남아 있었다. 가느다랗게, 세로로 그어진 흔적이었다. 오래전에 생긴, 아무에게도 말한 적 없는 상처였다. 병원에서도, 회사에서도, 누구도 그 흉터에 대해 물은 적이 없었다. 물어봤다면 뭐라고 답했을지 나조차 알 수 없었다. 거짓말을 지어내는 것도 지겨웠을 테니까. 넥타이를 다 매고 나서 나는 셔츠 깃을 정리했다.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이 여느 회사원과 다를 바 없었다. 그것이 오히려 안심이 되는 아침이었다. 출근길 지하철은 늘 그렇듯 사람으로 가득했다. 나는 손잡이에 매달려 창밖을 바라봤다. 스쳐 지나가는 건물들, 반복되는 풍경. 같은 시간, 같은 칸, 같은 얼굴들이 매일 되풀이됐다. 옆자리에 앉은 노인이 신문을 넘기는 소리가 규칙적으로 들렸다. 지하철이 커브를 돌 때마다 몸이 살짝 기울었고, 나는 손잡이를 더 꽉 쥐었다. 이 모든 것이 이십 년 전에는 상상도 못 했던 삶이었다. 그때는 이런 평범함이 얼마나 간절했는지, 지금은 오히려 지루하게 느껴진다는 게 아이러니했다. 그날, 나는 열여덟이었다. 어느 날 갑자기 눈부신 빛에 휩싸여 이세계로 소환되었고, 마왕 파순이라는 존재와 맞서 싸웠다. 동료 셋을 잃었다. 이름을 부르면 아직도 목이 메는 얼굴들이었다. 그리고 마왕을 쓰러뜨린 뒤, 나는 다시 원래 세계로 돌아왔다. 아무도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나조차도 시간이 지나면서 그 기억을 서서히 지웠다. 지운 게 아니라, 지워야만 살 수 있었다. 그 세계에서 있었던 모든 일을 마음 어딘가에 봉인해두고, 나는 다시 평범한 인간으로 살아가는 법을 배웠다. 지하철이 정거장에 멈추자 사람들이 밀려들어왔다. 나는 밀려나듯 문 쪽으로 자리를 옮겼다. 창문에 비친 내 얼굴을 잠깐 바라보다가, 다시 시선을 창밖으로 돌렸다. 회사에 도착하자 팀장이 다가와 서류를 던지듯 내밀었다. "강태준 씨, 이거 오늘까지 끝내야 합니다." "네, 알겠습니다." 나는 짧게 답하고 자리에 앉았다. 모니터 불빛이 눈을 찔렀다. 키보드 소리가 사무실 안에 규칙적으로 울렸다. 옆자리 동료가 커피를 내려놓으며 한숨을 쉬는 소리도 들렸다. 나는 서류를 펼치고 숫자들을 하나씩 확인하기 시작했다. 익숙한 업무였다. 이 일을 하는 동안만큼은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아도 됐다. 오후가 되자 사무실 창문으로 스며드는 햇살이 조금 이상하게 느껴졌다. 평소보다 색이 진했다. 붉은빛이 섞인 듯한, 낯선 파문이 유리창 너머로 어른거렸다. (뭐지, 이 느낌.) 나는 잠시 손을 멈추고 창밖을 봤다. 하늘은 평소와 다름없이 맑았다. 구름 한 점 없이, 그저 파랬다. 나는 눈을 몇 번 깜빡이고 다시 서류로 시선을 돌렸다. 다시 고요가 찾아왔다. 키보드 소리, 복사기 돌아가는 소리, 누군가의 전화벨 소리.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사무실의 소음이 이어졌다. (요즘 너무 무리해서 그런가.) 나는 관자놀이를 눌렀다. 머릿속 어딘가에서 미세한 이물감이 느껴졌지만, 곧 서류 더미에 정신을 빼앗겼다. 퇴근길, 골목을 걷다가 문득 등 뒤에서 서늘한 기운이 스쳤다. 나는 걸음을 멈췄다. 뒤를 돌아봤지만 아무도 없었다. 가로등 불빛 아래 골목은 텅 비어 있었다. 바람에 나뭇잎이 흔들리는 소리만 들렸다. 삐걱거리는 듯한 소리가 어디선가 섞여 들려온 것 같았다. 전봇대 위 표지판이 흔들리며 낸 소리인지, 다른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착각이겠지.) 나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등줄기를 타고 오르는 이상한 감각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마치 오래전, 그날 밤 처음 이세계로 끌려가기 직전에 느꼈던 것과 비슷한 느낌이었다. 걸음이 조금씩 빨라졌다. 집 앞 편의점 불빛이 눈에 들어오자 나는 안도했다. 늘 지나치던 그 불빛이 오늘따라 유독 반가웠다. 집에 도착해 씻고 침대에 누웠다. 천장을 바라보며 나는 생각했다. (그때 그 기억, 다시는 떠올릴 일 없을 줄 알았는데.) 창문 밖에서 늦은 바람 소리가 들렸다. 이불 속으로 몸을 더 파고들었다. 내일도 똑같은 하루가 반복될 거라 생각하며, 나는 스스로를 다독였다. 눈이 감겼다. 그리고 다시 눈을 떴을 때, 나는 방이 아니었다. 하얀 빛이 사방을 감싸고 있었다. 바닥은 없었고, 발밑에는 흐릿한 문양이 원을 그리며 빛나고 있었다.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이 감각… 설마.) 숨이 턱 막혔다. 몸이 허공에 떠 있는 듯한 감각, 중력이 사라진 듯한 낯선 부유감이 온몸을 감쌌다. 빛이 점점 강해졌다.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쿵. 무언가에 부딪히는 듯한 충격이 온몸을 관통했다. 눈을 떴을 때, 나는 낯익은 듯 낯선 석조 바닥 위에 쓰러져 있었다. 차갑고 딱딱한 감촉이 손바닥에 그대로 전해졌다. 천장은 높았고, 화려한 문양이 새겨진 기둥들이 나를 둘러싸고 있었다. 기둥마다 새겨진 문자들이 은은한 푸른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주위에는 로브를 입은 사람들이 놀란 눈으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누군가 짧게 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이건… 이십 년 전, 그때와 똑같다.) 손이 떨렸다. 나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무릎에 힘이 제대로 들어가지 않았다. 주변을 둘러싼 사람들의 표정에는 두려움과 경외가 뒤섞여 있었다. 다시, 청명국의 소환진 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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