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스무 해 전의 검

4화

왕도에 도착한 것은 해가 완전히 저문 뒤였다. 성벽 위로 켜진 등불들이 어둠 속에서 노랗게 빛나고 있었다. 그 빛은 하나같이 흔들림 없이 조용했지만, 어딘가 이질적인 냉기를 품고 있는 듯했다. 마차가 왕궁 정문을 지나 안뜰로 들어섰다. 돌바닥에 마차 바퀴가 부딪히는 소리가 규칙적으로 울렸다. 덜컹, 덜컹. 그 소리가 멈추자 문이 열렸다. 소년과 소녀는 나란히 마차에서 내려 왕궁을 올려다봤다. 높이 솟은 첨탑과, 그 위로 걸린 반달이 함께 시야에 들어왔다. 소년의 눈에는 두려움과 흥분이 섞여 있었다. 그의 발끝이 자꾸만 들썩거렸다. 소녀는 반대로 차분한 얼굴로 주변을 살피고 있었다. 시선이 벽을 따라, 병사들을 따라, 다시 나에게로 짧게 스쳤다가 돌아갔다. 나는 그 뒤를 조용히 따랐다. 발걸음을 최대한 가볍게, 최대한 눈에 띄지 않게 옮겼다. (익숙한 풍경이군.) 20년 전에도 이런 밤이었다. 그때도 나는 이렇게, 누군가의 뒤에서 조용히 걸었었다. 알현실로 안내되었을 때, 왕좌 위에는 백발의 노인이 앉아 있었다. 청명국의 국왕이었다. 그의 눈빛은 날카로웠고, 표정에는 오랜 세월의 무게가 서려 있었다. 양옆으로 대신들과 신관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그들의 시선이 일제히 소년과 소녀에게 쏠려 있었다. 그 사이 어디에도 나를 향한 시선은 없었다. "용사와 성녀가 다시 소환되었다니." 국왕이 낮게 중얼거렸다. 그 목소리에는 기대와 안도가 섞여 있었다. 동시에, 아주 미묘하게, 오래 기다린 자의 갈증 같은 것도 섞여 있었다. 소년과 소녀가 앞으로 나섰다. 국왕의 시선이 그들에게 오래 머물렀다. 마치 값을 매기듯, 위아래로 훑는 눈빛이었다. 그러다 시선이 나를 향했다. 순간 그의 눈빛이 미묘하게 변했다. 마치 하찮은 것을 발견한 듯한, 짧은 무시가 스쳐 지나갔다. 그 시선은 채 일 초도 되지 않아 거둬졌다. "저 남자는 누구인가." 대신관 한 명이 재빨리 답했다. "소환진에 함께 끌려온 것으로 보입니다, 폐하." "쓸모없는 부산물이겠군." 국왕의 말이 알현실 안에 조용히 울렸다. 그 말을 듣고도 누구 하나 표정을 바꾸지 않았다. 당연하다는 듯, 그저 흘러가는 말인 듯. (역시. 20년 전과 똑같아.) 나는 아무 표정도 짓지 않았다. 오히려 마음이 편해지는 걸 느꼈다. 가슴 안쪽에서 뭔가 툭, 하고 내려앉는 느낌이었다. 주목받지 않는 것. 그것이 지금 내게는 무엇보다 안전한 자리였다. 관심이 없다는 건, 감시가 없다는 뜻이었고, 감시가 없다는 건 내가 나로 움직일 수 있다는 뜻이었다. 국왕은 다시 시선을 쌍둥이에게 돌렸다. "용사와 성녀에게는 최고의 대우를 해줄 것이다. 이 나라의 운명이 그대들에게 걸려 있다." 소년의 어깨가 살짝 펴졌다. 숨을 크게 들이켜는 소리까지 들렸다. 반면 소녀의 표정은 여전히 차분했다. 그녀의 시선이 다시 나를 향했다. 이번에는 아주 짧게, 그러나 분명하게. (왜 이 아이는 자꾸 나를 보는 거지.) 나는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다만 아무 의미도 담기지 않은 눈으로, 그저 마주 봤을 뿐이었다. 알현이 끝난 뒤, 우리는 왕궁 안 별채로 안내되었다. 소년과 소녀에게는 화려한 방이 주어졌다. 문마다 금박이 둘러져 있었고, 안쪽에서는 향긋한 냄새가 흘러나왔다. 나는 하인들의 숙소 쪽 작은 방 하나를 받았다. 좁은 침대와 낡은 책상 하나가 놓인, 딱 한 사람 몸을 눕힐 만한 공간이었다. 방에 짐을 내려놓고 창밖을 바라봤다. 달빛이 정원 위로 부드럽게 내려앉아 있었다. 나뭇잎이 바람에 스치며 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평온한 풍경이었지만, 마음 한구석은 여전히 무거웠다. 그때,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톡, 톡. "저예요." 소녀의 목소리였다. 나는 문을 열었다. 그녀가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왔다. 이미 화려한 성녀의 예복 대신, 수수한 실내복으로 갈아입은 채였다. "이서아입니다. 아까 제대로 인사도 못 드려서요." "강태준입니다." 짧은 정적이 흘렀다. 서아는 방 안을 한 번 둘러보다가 나를 똑바로 바라봤다. 그 시선에는 어린아이 같은 순수함과, 그와 어울리지 않는 날카로운 관찰력이 함께 담겨 있었다. "아저씨, 아까 그 몬스터들 상대할 때… 그 검술, 처음 배우는 사람 같지 않았어요." 심장이 살짝 내려앉았다. 나는 표정을 그대로 유지하려 애썼다. 손끝이 미세하게 굳었지만, 그것까진 그녀도 보지 못했을 것이다. "운이 좋았을 뿐입니다." "운으로 세 마리를 상대하고, 검을 그렇게 다루는 사람은 없어요." 서아의 눈이 나를 꿰뚫는 듯했다. (이 아이, 뭔가 감지한 건가.) 나는 잠깐 대답을 고르며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저는 치유 마법을 다루는데, 사람의 몸을 자주 봐요. 근육의 결, 움직이는 습관 같은 것들이 보여요." "…그게 저와 무슨 상관이죠?" "아저씨 몸에는 오래된 흉터들이 있어요. 그것도 아주 오래된, 전투로 생긴 흉터들." 나는 잠시 말을 잃었다. (손목의 그 흉터를 본 건가.) 소매 안쪽, 손목을 따라 길게 이어진 그 흉터가 순간 뜨겁게 느껴졌다. 서아는 살짝 미소를 지었다. "걱정 마세요. 아무한테도 말 안 할게요. 그냥… 왠지 아저씨를 믿고 싶어졌어요." 그 말에 나는 잠시 창밖을 바라봤다. 달빛이 여전히 정원 위에 고요히 내려앉아 있었다. 바람에 나뭇잎이 흔들리는 소리가 아까와 똑같았지만, 어딘가 조금 다르게 들렸다. "…감사합니다." 짧은 대답이었지만, 마음속에서는 오래된 무언가가 조용히 흔들렸다. (이십 년 전에도, 누군가 이렇게 나를 믿어줬다면.) 동료들의 얼굴이 잠깐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이제는 흐릿해진 기억이었다. 이름조차 정확히 떠오르지 않는, 그러나 얼굴의 어떤 조각만은 선명하게 남아 있는 기억들. 서아가 방을 나선 뒤, 나는 오랫동안 그 문을 바라보고 서 있었다. 문틈으로 스며드는 달빛이, 조금씩 방 안 깊숙이 들어오고 있었다. 그날 밤, 나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다가, 다시 일어나 창밖을 바라보다가, 다시 눕는 시간이 반복됐다. 정원의 나뭇잎 소리는 어느새 그쳐 있었다. 정적이 흘렀다. 다음 날 아침, 시종 하나가 나를 조용히 불러냈다. 문 앞에서 그는 목소리를 낮추고 있었다. "국왕 폐하께서… 은밀히 뵙기를 청하십니다." 나는 그 말을 듣는 순간, 등줄기가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무시하던 사람이 갑자기 은밀히 부른다니. 뭔가 있다.) 나는 최대한 티 내지 않으려 애쓰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시종을 따라 좁은 통로를 지났다. 왕궁의 화려한 정문과는 다른, 낡고 어두운 뒷길이었다. 벽의 그림자가 유난히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발걸음 소리가 벽을 따라 이상하게 울렸다. 내 것인지, 시종의 것인지 구분이 안 될 정도로. 간간이 지나치는 병사들의 시선은 우리 쪽을 보지 않았다. 마치 이 길이,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감시조차 없는 길인가. 아니면 이 길로 오는 사람 자체가 드물다는 뜻인가.) 작은 방문 앞에서 시종이 멈춰 섰다. 문의 나무 표면에는 오래된 얼룩이 여러 겹 배어 있었다. "들어가시죠." 시종은 그 말만 남기고 조용히 뒤로 물러났다. 문이 스윽 열렸다. 안에는 국왕이 홀로 앉아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의 표정은 알현실에서와는 완전히 달랐다. 날카로움은 여전했지만, 그 안에 담긴 색이 전혀 다른 무언가로 바뀌어 있었다. 마치 어제까지 나를 하찮게 보던 그 눈이 아니라는 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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