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스무 해 전의 검

3화

발톱이 시야를 가득 채웠다. 크고, 검고, 끝이 누렇게 갈라진 발톱이었다. 나는 몸을 옆으로 틀었다. 스윽. 바람이 뺨을 스치고 지나갔다. 놈의 발톱이 허공을 갈랐다. 바로 옆으로, 종잇장 하나 들어갈 틈도 없이. (빗나갔다. 다음이다.) 검을 쥔 손목을 회전시켰다. 발끝으로 지면을 짚으며 무게중심을 낮췄다. 칼끝이 놈의 옆구리를 파고들었다. 퍽. 살과 뼈 사이를 파고드는 감각이 손목을 타고 올라왔다. 놈이 짧게 신음하며 뒤로 물러섰다. 하지만 그것도 잠깐이었다. 나머지 두 마리가 동시에 좌우에서 달려들었다. (이건… 예전보다 몸이 무겁다.) 이십 년이라는 시간이 몸에 새겨져 있었다. 예전 같았으면 세 마리가 동시에 달려드는 것을 보고도 웃었을 것이다. 지금은 숨이 가빠지고, 팔이 무거웠다. 관절 하나하나가 삐걱거리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왼쪽에서 달려든 놈의 발톱을 검으로 막았다. 쨍. 금속과 뼈가 부딪는 소리가 울렸다. 손목이 뒤로 밀리는 힘에 발끝이 흙 속으로 미끄러졌다. 동시에 오른쪽 놈의 몸통이 옆구리를 향해 날아들었다. 나는 몸을 굴려 피했다. 흙먼지가 얼굴에 튀었다. 입안에서 흙 맛이 났다. (셋을 동시에 상대하는 건 무리다. 시간을 벌어야 해.) 몸을 일으키기도 전에 놈들의 그림자가 다시 다가왔다. 숨을 짧게 들이켰다. 허벅지에 힘을 주고 다시 검을 고쳐 잡았다. 마부가 마차 위에서 외쳤다. "이쪽으로!" 박덕수라는 이름의 그 마부가 활을 겨누고 있었다. 시위가 팽팽하게 당겨지는 소리가 귓가에 스쳤다. 화살이 날아가 놈 한 마리의 어깨에 박혔다. 퍽. 놈이 잠시 움직임을 멈췄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나는 검을 크게 휘둘렀다. 발끝으로 지면을 밀어내며 몸을 회전시켰다. 칼날이 놈의 목덜미를 정확히 베어냈다. 쿵. 놈이 그대로 쓰러졌다. 숲의 정적이 잠시 그 위로 내려앉았다. 하지만 남은 두 마리가 더 사나워졌다. 놈들의 눈이 붉게 번뜩였다. 털이 곤두서고, 낮게 그르렁거리는 소리가 목구멍 안쪽에서 새어나왔다. (이건, 뭔가 이상하다. 일반 몬스터와는 다른 반응이야.) 공기가 순간적으로 무거워진 것 같았다. 나뭇잎이 흔들리는 소리조차 낯설게 들렸다. 그때, 숲 그늘 안쪽에서 검은 그림자가 스윽 움직였다. 나는 시선을 그쪽으로 던졌다. 형체가 뚜렷하지 않았다. 윤곽이 자꾸 흐트러졌다가 다시 맺히기를 반복했다. 마치 어둠 그 자체가 사람의 형상을 하고 서 있는 것 같았다.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숨이 저도 모르게 얕아졌다. (저건 몬스터가 아니다. 뭔가… 지켜보고 있어.) 바람이 불었지만, 그 방향과 어긋나는 낯선 파문이 나뭇가지 사이로 지나갔다. 그림자는 잠시 그 자리에 머물렀다. 아무 소리도 없이, 숲 안쪽으로 스며들듯 사라졌다. 나는 그 자리를 뚫어지게 바라봤다. (방금 그건 대체…) 정신을 다잡을 틈도 없이 남은 놈 하나가 나를 향해 몸을 날렸다. 나는 검을 역수로 고쳐 잡았다. 발끝으로 지면을 밀어내며 몸을 낮췄다. 놈의 아래에서 위로 검을 그었다. 퍽. 놈의 몸이 크게 휘청였지만 완전히 쓰러지지는 않았다. 붉은 피가 검날을 따라 흘러내렸다. (한 방으로는 부족하다.) 놈이 다시 몸을 곧추세우며 달려들려는 순간, 뒤에서 소년의 목소리가 들렸다. "거기서 뭐 하는 거예요! 도망쳐요!"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나는 대답할 여유가 없었다. 숨을 몰아쉬며 다시 자세를 잡았다. 허벅지가 후들거렸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버티면…) 그때였다. 하늘에서 굵은 화살 한 대가 바람을 가르며 날아들었다. 정확히 놈의 이마를 관통했다. 퍽. 놈이 그대로 뒤로 쓰러졌다. 흙바닥에 등을 부딪는 둔중한 소리가 울렸다. 숲에 다시 정적이 내려앉았다. 박덕수가 다시 활시위를 당기며 낮게 외쳤다. "괜찮으신가!" 나는 숨을 몰아쉬며 검을 늘어뜨렸다. 팔이 무겁게 떨렸다. 손끝의 감각이 잠시 흐려졌다가 서서히 돌아왔다. (도움을 받았다. 이십 년 전이었으면 이런 도움 없이도 끝냈을 텐데.) 가슴 한쪽이 씁쓸했다. 몸이 늙었다는 사실을, 이런 순간마다 새삼 확인하게 되는 것 같았다. 소녀가 마차에서 조심스럽게 내려왔다. 발끝이 흙바닥에 닿는 소리조차 조심스러웠다. 그녀의 눈이 나를 향해 있었다. 놀라움과 함께, 뭔가 다른 감정이 섞인 눈빛이었다. "저기… 아저씨." 소녀가 다가와 나를 불렀다. 나는 검을 검집에 넣으며 그녀를 돌아봤다. 검집에 검이 미끄러져 들어가는 소리가 낮게 울렸다. "괜찮으세요? 다치신 데는…" "괜찮습니다." 나는 짧게 답했다. 소녀는 뭔가 더 말하려는 듯 입술을 잠시 움직였지만, 곧 다시 다물었다. 그 눈빛에서 나는 미묘한 위화감을 느꼈다. 시선이 너무 오래, 너무 세밀하게 나를 훑고 있었다. (설마, 이 아이가 뭔가 눈치챈 건가.) 애써 표정을 흐트러뜨리지 않으려 애썼다. 박덕수가 마차 위에서 내려와 다가왔다. 발소리가 무겁고 단단했다. "제법이시군. 그 나이에 그 정도 실력이면." 말투에는 순수한 놀라움이 섞여 있었다. 나는 대답 없이 옷에 묻은 흙을 털어냈다. 손바닥으로 옷자락을 스치자 흙먼지가 뽀얗게 일었다. "자, 서둘러야 하네. 해가 지기 전에 왕도에 도착해야 해." 박덕수가 하늘을 한 번 올려다보고는 마차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해는 이미 서쪽으로 제법 기울어 있었다. 붉은 빛이 나뭇가지 사이로 길게 스며들었다. 그 붉은 빛이 조금 전 쓰러진 놈들의 몸 위로도 내려앉았다. 마차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바퀴가 흙을 밟는 소리가 규칙적으로 이어졌다. 나는 숲 안쪽, 그림자가 사라졌던 자리를 오래 바라봤다. 나뭇잎 사이로 스며드는 햇빛과, 그 아래 짙게 진 그림자의 경계가 유난히 또렷했다. (저 존재는 대체 뭐였을까.) 몬스터도 아니고, 사람도 아니었다. 그저 그 자리에 서서, 나를 지켜보고 있었을 뿐이다. 답을 알 수 없는 질문이 가슴속에 남았다. 마차가 숲길을 벗어날 때까지, 나는 몇 번이나 뒤를 돌아봤다. 그 자리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등줄기에 남은 서늘한 감각은, 좀처럼 가시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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