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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다가갈수록 심장이 이상하게 뛰었다. 걸음마다 낙엽 밟는 소리가 유독 크게 울렸고, 새소리마저 끊긴 정적 속에서 나는 그 형체를 향해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솔직히 말하면 처음엔 그냥 나무 그늘이 이상하게 겹쳐 보이는 건가, 싶었다. 이세계에 떨어진 지 하루도 안 됐는데 벌써 헛것을 보나 싶어서 스스로가 한심했는데, 가까워질수록 그 형체는 점점 뚜렷한 사람의 윤곽으로 변해갔다. 중년 남자였다. 수염이 짙게 자란 얼굴에 낡은 가죽조끼를 걸치고 있었고, 등짐을 진 채로 옆으로 쓰러져 있었다. 등짐 끈은 풀려 짐이 사방으로 흩어졌는데, 두루마리와 유리병, 낡은 지도 같은 것들이 흙바닥에 나동그라져 있었다. 머릿속으로는 온갖 계산이 빠르게 돌아갔다. 이 사람이 이 세계의 언어를 가르쳐줄 수도 있고, 지리를 알려줄 수도 있고, 최소한 밥 한 끼라도 얻어먹을 상대가 될 수도 있었다. 열두 살 몸뚱이로 혼자 살아남아야 한다는 공포 속에서 만난 첫 번째 인간이었으니까. "저기요, 저기..." 나는 조심스레 말을 걸었다. 대답이 없었다. 목소리가 허공에서 그대로 흩어지는 느낌이었다. 가까이 다가가 어깨를 흔들자, 몸이 뭔가 이상할 정도로 굳어 있다는 게 손끝으로 전해졌다. 등에는 화살촉이 두 개나 박혀 있었다. 숨이 턱 막혔다. 손이 떨리기 시작했다. 나는 무릎을 꿇고 그의 얼굴을 살폈다. 이미 핏기가 다 빠진 얼굴, 눈은 반쯤 감긴 채였다. 죽은 지 얼마 안 된 듯 몸에 온기가 남아 있었지만, 그 온기가 오히려 더 소름 끼쳤다. 방금까지 숨 쉬고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조졌다. 진짜 조졌다. 이세계에 떨어져 처음 만난 사람이 시체라니. 웃기지도 않는 전개였다. 소설이었으면 최소한 친절한 노인 하나쯤은 나와서 마을로 데려가주고, 밥도 먹여주고, 대충 언어라도 알려줬을 텐데. 나는 이 남자를 통해 이 세계의 언어라도, 지리라도, 뭐라도 알아낼 계획이었건만, 그 계획은 시작하기도 전에 화살 두 방에 무너져버렸다. 인과율이 억까를 부리는 것 같았다. 왜 하필, 왜 지금, 왜 나한테. 주변을 둘러보니 수풀 사이로 발자국이 여러 겹 찍혀 있었고, 짐 몇 개는 뜯긴 흔적이 있었다. 도적이었다. 도적. 이 세계에도 도적이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동시에 이 남자를 습격한 무리가 아직 근처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등줄기에 소름이 쫙 돋았다. 숨을 죽였다. 귀를 기울였다. 바람 소리, 나뭇잎 부딪는 소리, 그리고 내 심장이 뛰는 소리 말고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그래도 안심할 순 없었다. 도적이라는 놈들이 근처 어딘가에서 이쪽을 지켜보고 있을 수도 있었다. 열두 살짜리 꼬맹이 하나 덤벼봐야 이길 재간도 없는데, 여기서 붙잡히면 그야말로 끝장이었다. 일단 몸을 낮췄다. 최대한 소리 없이, 최대한 빠르게 상황을 파악해야 했다. 그때 흩어진 짐 속에서 낡은 목걸이 하나가 눈에 들어왔는데, 거기에는 작은 토끼 조각이 매달려 있었다. 나무를 깎아 만든 것 같았는데, 손끝으로 오래 만져서 반질반질해진 흔적이 있었다. 아마 이 남자의 별명이 토끼였던 모양이었다. 나는 왜 하필 그 순간에 그런 사소한 것에 눈이 갔는지 알 수 없었다. 화살 두 방에 죽어 넘어진 남자 옆에서, 도적이 근처에 있을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목걸이 따위를 신경 쓰고 있다니. 어쩌면 그 목걸이가, 이 낯선 남자를 인간으로 느끼게 해주는 유일한 물건이었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그냥 시체가 아니라, 누군가에게는 토끼라고 불렸을 사람. "아, 아저씨..." 목소리가 저절로 기어들어갔다. 시신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땅을 팔 도구도 없었고, 그냥 두고 가기엔 왠지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열두 살짜리 몸으로 시신 하나 처리도 못 하는 스스로가 한심했다. 전생에 스물세 해를 살아온 정신머리는 있는데, 몸이 따라주질 않으니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결국 나는 마음을 접었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땅에 묻어줄 힘도, 도구도, 시간도 없었다. 미안하지만 이대로 두고 갈 수밖에. 일단 짐이라도 챙겨야겠다는 생각에 흩어진 물건들을 주섬주섬 모으는데, 두루마리, 유리병, 지도 조각들을 하나씩 집어 등짐 근처에 쌓아놓기 시작했다. 유리병 안에는 알 수 없는 액체가 담겨 있었는데 흔들어보니 걸쭉하게 움직였다. 약초즙인지 독약인지 구분할 방법이 없어서 일단 조심스레 내려놓았다. 손끝에 두루마리 하나가 닿는 순간, 뭔가 이상한 감각이 손끝을 타고 올라왔다. 마치 손가락이 물속에 잠긴 것처럼 서늘하면서도 부드러운, 처음 느껴보는 감촉이었다. "어, 어어?" 나는 손을 확 뗐다. 두루마리는 그대로 바닥에 있었다. 다시 손을 대보니 아무 느낌도 없었다. 착각인가, 싶었다. 착각이겠지. 이세계 오자마자 정신이 이상해진 걸지도 모르지. 그런 생각을 하며 다시 두루마리를 만져보았다. 역시 아무 느낌이 없었다. 그런데 그 순간 시야 한 귀퉁이에 흐릿한 파란색 글자 같은 게 잠깐 스쳐 지나갔다. 너무 짧아서 뭐라고 쓰여 있었는지 읽을 수도 없었다. 뭐지? 나는 눈을 비비고 다시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무것도 없었다. 헛것을 본 것 같기도 했고, 아니면 정말로 뭔가 스쳐 지나간 것 같기도 했다. 파란색이었다. 분명히 파란색이었다. 잔상처럼 눈앞에 남았다가 순식간에 사라졌는데, 마치 게임 창 같은 인터페이스 비슷한 느낌이었다. 그런데 이 세계에 그런 게 있을 리가 없잖아, 하는 생각이 동시에 들었다. 그런 걸 신경 쓸 여유는 없었다. 지금 중요한 건 이 남자를 죽인 도적이 근처에 있는지, 나도 목표물이 될 수 있는지였다. 자꾸 딴생각하다가 진짜로 화살 맞아 죽는 수가 있었다. 나는 다시 시신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대로 두고 갈 수도 없었고, 데려갈 수도 없었다. 짐이라도 최대한 챙겨서 이곳을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는데, 손이 다시 그 목걸이 쪼가리에 닿는 순간, 방금 느꼈던 것과 똑같은 서늘한 감각이 손끝을 타고 온몸으로 퍼졌다. 이번엔 착각이 아니었다. 온몸의 털이 곤두섰다. 등줄기부터 시작해서 목덜미까지 서늘한 기운이 훑고 지나갔다.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뭐야. 뭐야 이거. 진짜 뭐야. 손을 떼려고 했는데, 이상하게 손끝이 목걸이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마치 뭔가에 흡착된 것처럼, 손가락 마디마디가 얼어붙은 것처럼 굳어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시신이 있던 자리에서 무언가 빛나기 시작했다. 파란빛이었다. 은은하면서도 선명한, 방금 스쳐 지나갔던 그 글자와 똑같은 색깔의 빛이 남자의 몸 주변으로 서서히 퍼져나가고 있었다. 나는 숨도 쉬지 못한 채 그 빛을 바라보았다. 손끝은 여전히 목걸이에 붙어 있었고, 심장은 미친 듯이 뛰고 있었고, 머릿속은 하얗게 비어 있었다. 이게 뭐지. 이게, 대체. 나는 아직 몰랐다. 그 빛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리고 그것이 앞으로 내 인생을 완전히 뒤바꿔놓을 스킬의 첫 발현이라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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