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 ›숲의 공기가 순간적으로 얼어붙었다.
"저 사람이 두목이야." 세아가 이를 악물고 낮게 말했다. "장도철. 이 근방 도적단 두목이래. 랭크가 있었던 모험가였는데 뭔 사고를 쳐서 쫓겨났다고 들었어."
나는 나무 뒤에서 고개만 살짝 내밀어 상황을 살폈다. 장도철의 금속 갑옷은 낡았지만 여전히 위압적이었고, 표면에 앉은 녹과 흠집들이 그가 여태 얼마나 많은 사람을 이런 식으로 몰아붙였을지를 짐작케 했다. 옆에 선 두 부하-박덕수와 김철구라는 이름은 나중에야 들었다-는 각각 도끼와 몽둥이를 든 채 다인을 위협하고 있었는데, 그 무기들이 실전용이 아니라 사냥감을 몰이할 때 쓰는 것처럼 다뤄지는 게 더 소름 돋았다.
다인은 다리에 붕대를 감은 채로 나무에 기대앉아 있었다. 얼굴은 하얗게 질려 있었지만, 눈빛만큼은 지지 않겠다는 듯 매섭게 세 남자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 눈빛 하나가, 나로 하여금 저 애가 아직 포기하지 않았다는 걸 알게 해줬다.
"세아야, 도망쳐..." 다인이 힘겹게 외쳤다.
"닥쳐라." 김철구가 다인의 어깨를 발로 걷어차려는 순간, 세아가 뛰쳐나가려 했다. 나는 반사적으로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 손끝에 힘이 얼마나 들어갔는지 세아의 손목에 하얗게 자국이 남을 정도였다.
"기다려. 정면으로 부딪치면 우리 둘 다 죽어." 나는 낮게 속삭였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고 있었지만, 스물세 살 인생의 논리가 겁먹은 몸을 억지로 붙잡았다.
씨발, 정말 미친 짓이다. 몸은 열두 살짜리인데, 눈앞에는 도끼 든 성인 남성 셋. 도망치는 게 정상 아닌가. 근데 도망치면 저 애는 그냥 죽어. 머릿속에서 계산이 빠르게 돌아갔다. 확률, 지형, 시간. 그 모든 게 뒤섞이는 와중에도 이상하게 손끝은 차갑게 가라앉았다.
숲 지형을 눈으로 살폈다. 이 계곡 진입로는 좁은 경사길 하나뿐이었고, 그 아래로 깊은 구덩이처럼 파인 지대가 있었다. 예전에 웹소설에서 봤던 함정 전술이 머릿속에서 빠르게 조합됐다. 그때는 그냥 재밋거리로 읽었던 장면이었는데, 지금 내 목숨을 걸고 실행해야 하는 처지가 됐다는 게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나올 뻔했다.
"세아야, 저 나무 위쪽에 흙더미 보이지? 저기 위로 갈 수 있어?"
세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재빨리 계획을 설명했다. 세아가 저들을 유인해 경사길로 끌어들이는 사이, 나는 【공간수납】으로 경사길 아래 지반의 흙과 바위를 통째로 빼내 구덩이를 만든 뒤, 그들이 그 구덩이에 발을 들이는 순간 다시 흙을 쏟아붓는다는, 무모하기 짝이 없는 계획이었다.
말로 설명하면서도 스스로 어이가 없었다. 사람을 산 채로 묻어버리겠다는 계획이라니. 근데 지금 이 상황에서 다른 선택지가 뭐가 있나. 저놈들 손에 다인이 죽거나, 세아까지 같이 죽거나. 셋 중 하나는 무조건 골라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게 될까?" 세아가 반신반의하며 물었다.
"안 되면 뒤지는 거고." 나는 씁쓸하게 웃었다. "근데 지금 도망쳐도 저놈들이 안 따라올 것 같아?"
세아가 잠시 침묵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 침묵이 몇 초였는지는 정확히 모르겠는데, 그 짧은 시간 동안 세아의 눈동자가 여러 번 흔들렸던 것만은 확실히 기억한다.
나는 경사길 아래 지반에 손을 뻗었다. 눈을 감고 【공간수납】을 발동하자, 발밑의 흙과 돌이 서서히 창 속으로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십 초, 이십 초, 삼십 초. 시간이 지날수록 머리가 지끈거리고 손끝이 저려왔지만, 나는 이를 악물고 버텼다.
머리 속에서 뭔가 뜨겁게 끓어오르는 느낌이었다. 눈앞이 노랗게 번쩍이고, 콧등에 땀이 송글송글 맺혔다. 이게 스킬 부작용인지 그냥 긴장 때문인지 구분할 여유도 없었다. 그저 손을 떼면 안 된다는 생각뿐이었다.
마침내 경사길 한가운데 사람 몸통 세 개는 족히 들어갈 만한 구덩이가 만들어졌고, 나는 그 위에 마른 나뭇가지와 낙엽을 재빨리 덮어 위장했다. 손이 떨려서 나뭇가지 몇 개는 삐뚜름하게 놓였는데, 다행히 멀리서 보면 그 정도 티는 나지 않았다.
"됐어. 이제 유인해."
세아가 숨을 크게 들이쉬고는 갑자기 튀어나가 소리쳤다. "여기다, 이 씹새끼들아!"
장도철의 눈이 세아를 향해 번뜩였다. "저기 있었구나. 잡아!"
세 남자가 다인을 내버려 둔 채 세아를 쫓아 경사길로 뛰어들었다. 육중한 발소리가 지축을 흔들 듯 울렸고, 나는 그 소리 하나하나가 심장 박동과 겹쳐 들리는 걸 느끼면서 숨을 죽였다.
세아는 정확히 위장된 구덩이 가장자리를 스치듯 뛰어넘으며 반대편으로 몸을 날렸고, 뒤따르던 세 남자는 속도를 이기지 못한 채 그대로 낙엽 덮인 함정 위를 그대로 밟아버렸다.
와지끈, 하는 소리와 함께 세 사람의 몸이 그대로 아래로 꺼져 들어갔다.
"으아악!" 장도철의 외침이 구덩이 안에서 울려 퍼졌다.
박덕수의 도끼가 구덩이 벽을 긁으며 튕겨 나갔고, 김철구는 뭔가를 붙잡으려는 듯 손을 허공으로 뻗었지만 잡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나는 지체 없이 【공간수납】을 다시 발동했다. 이번엔 반대로, 아까 꺼내둔 흙과 바위를 통째로 쏟아붓는 방식이었다. 창 속에서 흙더미가 무섭게 쏟아져 나와 구덩이를 순식간에 뒤덮었고, 비명 소리는 몇 초 지나지 않아 완전히 잠잠해졌다.
정적.
새 한 마리가 어디선가 날아올랐다가 다시 나무 사이로 사라졌다.
나는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 방금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실감이 나지 않았다. 사람 셋을 흙 속에 그대로 파묻어버렸다는 사실이, 열두 살 얼굴을 한 스물세 살 청년의 머리로는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방금 내가 사람을 죽인 건가. 그런데 왜 손이 떨리지 않지. 왜 죄책감이 안 밀려오지. 오히려 안도감이 먼저 오는 게 정상인가. 머릿속이 뒤죽박죽이었는데, 그 혼란 속에서도 한 가지는 명확했다. 살았다는 사실.
"됐다... 됐어!" 세아가 달려와 나를 와락 껴안았다. "너 진짜 미쳤어! 진짜 대박이야!"
세아의 몸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방금 전까지 죽음의 문턱에서 유인책 역할을 했던 애답게, 이제야 긴장이 풀리는 모양이었다.
다인도 힘겹게 몸을 끌며 다가와 믿기지 않는 눈으로 아까까지 사람들이 서 있던 자리를 바라보았다. 이제는 흙무덤이 되어버린 그 자리를. 다인의 입술이 몇 번 벌어졌다가 다시 닫혔는데,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나조차 짐작이 안 갔다.
"고마워." 다인이 겨우 그 말만 뱉어냈다.
첫 승리의 짜릿함이 온몸을 훑고 지나갔다. 나는 웃음이 터져 나오려는 걸 억지로 참았다. 이 세계에 떨어져 처음으로, 불운이 아니라 내 손으로 만든 결과를 얻은 순간이었다.
씨발, 됐다. 진짜 됐다. 살아남았다. 이 말이 머릿속에서 계속 맴돌았고, 나는 그 벅찬 기분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몰라 그저 하늘을 한 번 올려다봤다.
하지만 그 짜릿함은 오래가지 않았다.
갑자기 머리가 핑 돌면서 시야가 흐릿해졌다. 다리에서 힘이 쭉 빠지는 게 느껴졌고, 나는 그대로 무릎을 꿇을 뻔했다. 세아가 놀라서 내 어깨를 붙잡았지만, 나는 손을 저으며 스스로를 다잡으려 했다.
【공간수납】 창을 열어보니, 보관물 목록에 정만수의 시신과 함께 방금 파묻은 세 사람의 흙더미 무게까지 고스란히 표시되어 있었는데, 그 옆에 적힌 숫자가 이상하게 마음에 걸렸다.
용량: 87% 사용 중.
조금 전까지 텅 비어 있던 그 수치가, 단 몇 번의 사용만으로 이렇게까지 차오를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시신 하나, 흙더미 몇 무더기로 이렇게까지 찰 줄이야. 도대체 이 스킬의 최대 용량은 얼마인 건지, 그리고 87%를 넘기면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건지, 아무것도 알 수 없다는 사실이 등줄기를 서늘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저 멀리, 나무 그늘 사이로 무언가 반짝이는 것이 아주 짧게 시야 끝을 스치고 지나갔다.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확인할 겨를도 없이, 다시 밀려오는 현기증에 휩싸여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