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수납 스킬로 빚 갚습니다

4화

"뒤에 나무 뒤로!" 나는 순간적으로 소리쳤다. 생각이란 걸 할 새도 없었다. 몸이 먼저 반응했고 입이 그 뒤를 쫓았을 뿐인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것도 서준이 아니라 스물세 살 인생 내내 몸에 새겨둔 위기 감지 본능이 튀어나온 거였다. 소녀가 내 쪽으로 몸을 던지듯 다가와 나무 뒤에 숨었다. 숨을 헐떡이는 그녀의 어깨가 위아래로 크게 들썩이고 있었는데, 얼마나 뛰어왔는지 이마에서 땀이 줄줄 흘러내려 흙먼지와 뒤섞여 얼굴이 지저분했다. 나는 나무둥치에 등을 바짝 붙인 채, 심장이 목구멍까지 튀어 오르는 걸 억지로 삼켰다. 두근. 두근. 두근. 내 심장 소린지 그녀의 심장 소린지 구분이 안 될 정도로 가까웠다. "쟤들이 왜 쫓아와?" 내가 낮게 물었다. 목소리를 최대한 죽였는데도 내 귀에는 확성기를 튼 것처럼 크게 들렸다. "짐, 짐을 뺏겼어. 다인이가 다쳐서 도움을 청하러 가던 참이었는데..." 소녀가 숨을 몰아쉬며 답했다. 말을 끝맺기도 전에 다시 숨을 들이켜야 할 정도로 호흡이 엉망이었다. "근데 넌 누구야? 옷차림이 이상해." "나도 몰라, 씨발." 나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이 상황에서 뭘 더 꾸며낼 정신도 없었다. "방금 여기 떨어졌어." 남자들의 발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쿵, 쿵, 쿵. 땅을 밟는 소리가 심장 박동처럼 규칙적으로 울렸고, 나는 나무 틈으로 살짝 고개를 내밀어 상황을 살폈다. 도끼를 든 남자와 나머지 둘이 길목에서 두리번거리며 우리 흔적을 찾고 있었는데, 그중 한 명이 코를 킁킁거리며 짐승처럼 냄새라도 맡는 시늉을 하는 걸 보고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저 새끼 설마 진짜 짐승 코야? 다행히 그들은 우리가 숨은 방향을 정확히 짚지 못한 채 다른 길로 방향을 돌렸다. 발소리가 멀어지는 걸 확인하고서야 나는 겨우 숨을 내쉬었다. 폐 속에 고여 있던 공기가 한꺼번에 빠져나가면서 다리에서 힘이 풀리려 했다. 열두 살짜리 몸뚱이는 이런 긴장 상태를 버텨낼 체력조차 시원찮았다. "고마워." 소녀가 나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김세아야." "이서준." 나는 그 손을 잡았다. 손바닥에 굳은살이 여러 겹 박혀 있었는데, 단검을 다뤄온 흔적 같았다. 열두 살짜리 손에 이런 굳은살이 박혀 있다는 게 이 세계가 얼마나 험한 곳인지를 무언으로 설명해주는 듯했다. 세아의 눈이 문득 내 뒤편, 정만수가 쓰러져 있던 자리로 향했다. "저기 아저씨는..." 말꼬리가 흐려지는 걸 보며 나는 잠시 망설였다. 어디까지 말해야 하나. 이 여자애가 나를 이상한 놈으로 몰아세우면 어쩌지. 근데 지금 상황에서 그런 걸 재고 있을 여유가 있나? 결국 나는 그동안 벌어진 일을 그대로 털어놨다. 화살에 맞아 죽은 아저씨, 그리고 그 시신과 짐이 통째로 사라진 일, 그리고 내 손에서 떠오른 이상한 파란 창까지. 말을 하면서도 스스로 미친 소리처럼 들린다는 걸 알았다. 아니 이게 정상적으로 들릴 리가 없잖아, 나부터도 안 믿기는데. 그런데 세아는 놀랍게도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토끼 아저씨..." 그녀의 목소리가 떨렸다. 눈동자가 순간 흔들리는 게 보였다. "우리한테 마을까지 가는 길을 알려주겠다고 했던 사람이야. 우리가 먼저 도망쳤는데, 그 사이에 도적들이 쫓아온 거구나." 죄책감 같은 감정이 세아의 얼굴에 스쳐 지나갔다. 입술을 깨무는 그 모습에서 나는 이 아이가 짊어지고 있는 무게가 얼마나 큰지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열두 살, 아니 이 세계의 기준으로는 이미 어른일지도 모르는 나이겠지만, 그럼에도 사람 하나가 죽었다는 사실 앞에서 흔들리는 건 인간이라면 당연한 반응이었다. "보여줄 수 있어? 그 스킬이라는 거." 세아가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방금까지의 침울한 표정은 어디로 갔는지,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바뀌어 있었다. 죽음과 공포 앞에서도 궁금한 건 못 참는 성격인가. 나는 반신반의하며 손을 뻗었다. 눈앞에 다시 파란 창이 떠올랐고, 나는 그 안에서 조끼 하나를 꺼냈다. 정말로 조끼가 손안에 나타났다. 손끝에 닿는 감촉이 분명 실재하는 것이었다. 헛것이 아니었다. "헐..." 세아가 입을 벌렸다. 두 눈이 커지고 동공이 흔들리는 게 여실히 보였다. "이거 완전 마법사 스킬이잖아. 마법 주머니보다 훨씬 크게 들어가는데?" "마법 주머니?" "토끼 아저씨가 갖고 있던 거야. 아, 여기." 세아가 조끼를 뒤집어 안쪽 주머니에서 낡은 가죽 자루 하나를 꺼내 보였다. 손안에 들어올 만큼 작은 자루였는데, 세아가 자루 입구를 벌리자 안쪽은 성인 남자 몸통이 통째로 들어갈 정도의 어둠이 펼쳐져 있었다. 나는 그 안을 들여다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저게 어떻게 저 작은 자루 안에 들어가 있는 건지, 이 세계의 물리법칙은 대체 뭘로 이루어져 있는 건지 도무지 감이 오지 않았다. "이거 아저씨가 도망칠 때 나한테 잠깐 맡겨놨던 거야. 원래 이 자루 하나가 마을에서 집 한 채 값이래." 집 한 채 값이라고? 나는 자루와 내 스킬 창을 번갈아 보며 이 세계에서의 내 위치를 조금씩 가늠했다. 마법 주머니 하나가 집 한 채 값이라면, 용량이 알 수 없는 내 【공간수납】은 대체 얼마짜리인 걸까. 아파트 한 채? 빌딩 하나? 아니면 그보다 더? 머릿속으로 계산기를 두드리는 사이 세아가 이번엔 자기 손에 든 단검을 내 쪽으로 슥 내밀었다. "이것도 넣을 수 있어?" 우리는 자루와 스킬을 오가며 물건을 몇 번이나 넣고 빼는 실험을 반복했다. 유리병, 두루마리, 세아의 단검, 심지어 자루 자체까지 내 공간에 넣었다가 다시 꺼내는 데 성공했다. 손을 뻗을 때마다 파란 빛이 일렁이며 창이 떠올랐고, 그 안으로 물건이 쑥 빨려 들어가는 광경은 볼 때마다 신기했다. 열 번을 넘게 반복해도 실패 없이 재현되는 걸 확인하자, 세아의 눈빛이 완전히 달라졌다. 처음의 경계심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오직 순수한 놀라움과 계산이 뒤섞인 눈빛이었다. "너 이거, 완전 대박이야. 다인이한테도 알려줘야 해." 그 말에 세아가 갑자기 얼굴이 어두워지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방금까지의 흥분이 순식간에 가라앉고 표정이 굳었다. "다인이, 저쪽 계곡 근처에서 다리를 다친 채로 나를 기다리고 있어. 지금 가야 해." 나는 서준으로서의 판단력을 되찾고 고개를 끄덕였다. 열두 살짜리 얼굴을 하고 있어도, 이 안에는 스물세 살의 머리가 들어있었으니까. 이런 상황에서 감상에 젖어 있을 시간이 없다는 것쯤은 몸이 먼저 알아챘다. "앞장서. 조용히 움직이자." 우리는 조심스레 숲을 가로질러 이동했다. 발밑에서 마른 잎이 바스락거리는 소리조차 신경이 쓰여, 나는 최대한 발끝으로 걸으려 애썼다. 세아 역시 익숙한 듯 소리 없이 나무 사이를 미끄러지듯 나아갔는데, 그 모습에서 이 아이가 이런 도피와 은신에 얼마나 능숙해졌는지가 느껴졌다. 그러나 계곡 근처에 다다랐을 때, 나는 발걸음을 멈춰야 했다. 다인으로 짐작되는 소녀가 나무에 등을 기댄 채 앉아 있었고, 그녀를 둘러싼 세 남자가 그 앞에 서 있었다. 아까 그 도끼를 든 남자, 그리고 그 옆에 험상궂은 갑옷을 두른 우두머리로 보이는 남자가 낮게 웃으며 다인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다인의 다리는 부목도 없이 어색하게 뻗어 있었고, 얼굴은 하얗게 질려 있었지만 눈빛만은 꺾이지 않고 남자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이 계집이 나머지 하나 어디 숨었는지 안 부는데." 갑옷 남자가 낮게 으르렁거렸다. 손에 든 검이 저물어가는 햇빛에 번쩍이며, 그 끝이 다인의 목덜미 근처를 겨누고 있었다. 세아의 손이 단검 자루를 꽉 움켜쥐는 게 보였다. 손등에 핏줄이 서고,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변할 정도로 힘이 들어가 있었다. 나는 그녀의 옆에서 함께 숨을 죽이며, 지금 이 순간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미친 듯이 머릿속을 뒤졌다. 파란 창은 물건을 넣고 빼는 데는 유용했지만, 사람 셋을 상대할 무기 따위는 그 안에 들어 있지 않았다. 그리고 세아의 손에 쥐어진 저 단검 한 자루로, 우리 셋이 저 무장한 세 남자를 상대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머릿속이 하얗게 비는 그 순간, 갑옷 남자가 검을 다인의 뺨에 가까이 갖다 대며 씩 웃었다.
♡ 좋아요 0 · 로그인 후 좋아요/별점/댓글 참여 가능

댓글 0

  •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