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 ›잿골에 도착한 건 이레째 되는 날 저녁이었다.
말에서 내려 처음 눈에 들어온 건 시커먼 흙과 부서진 성벽 잔해였다.
마을이었던 흔적은 있었지만 사람은 없었다.
바람이 불자 재가 날아올라 얼굴을 때렸다.
캑, 콜록.
입안이 온통 흙먼지 맛이었다.
침을 뱉어봤지만 소용없었다.
목구멍 안쪽까지 재가 들어간 느낌이었다.
말도 이상한지 콧김을 뿜으며 앞발로 땅을 긁었다.
"너도 여기가 싫은 거지."
말한테 말을 거는 내가 우스웠지만 대답할 사람이 없으니 어쩔 수 없었다.
"…여기가 정말 영지라고?"
혼잣말이 저절로 나왔다.
둘러봐도 대답할 사람은 없었다.
멀리 보이는 성벽은 반쯤 무너져 이빨 빠진 노인의 잇몸처럼 보였고, 그 틈으로 잿빛 하늘이 그대로 들여다보였다.
한때 관청이었을 건물은 지붕이 반쯤 무너져 있었고, 안으로 들어가자 곰팡이와 재 냄새가 섞여 코를 찔렀다.
책상 위에는 먼지 쌓인 서류들이 그대로 있었다.
손으로 훑으니 종이가 바스러졌다.
마치 시체를 만진 기분이었다.
이 방 저 방을 둘러봤지만 사람이 살았던 흔적치고는 지나치게 조용했다.
문짝은 절반이 뜯겨 나가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고, 벽에 걸려 있던 것으로 보이는 그림은 재에 덮여 무슨 그림이었는지도 알 수 없었다.
누군가 여기서 웃고 울고 밥을 먹었을 텐데, 지금은 그 흔적조차 재가 삼켜버린 것 같았다.
일단 물을 찾아야 했다.
말에게도, 나에게도 물이 필요했다.
지도를 펼쳤지만 지도에 그려진 강줄기는 새까맣게 지워져 있었다.
화산재가 몇 년이나 흘러들어간 결과인 모양이었다.
결국 반나절을 헤맨 끝에 겨우 찾은 개울은 흙탕물이나 다름없었다.
손으로 떠서 마셔봤다가 바로 뱉었다.
짜다.
짠물이었다.
혀끝이 얼얼할 정도로 짰다.
바닷물을 삼킨 것 같은 느낌에 속이 뒤집혔다.
말도 코를 킁킁대다가 고개를 돌려버렸다.
"너도 못 마시겠지, 나도 그래."
"이게 무슨 영지야, 소금밭이지."
투덜거리면서도 다른 방법이 없었다.
짐 속에서 마른 육포를 꺼내 씹었다.
그마저도 이제 세 조각밖에 남지 않았다.
씹을수록 육포는 고기 맛보다 짠맛이 더 강하게 느껴졌는데, 그게 실제 맛인지 방금 마신 소금물 때문에 미각이 고장 난 건지 구분이 안 됐다.
밤이 되자 기온이 급격히 떨어졌다.
전장에서 겪은 밤보다 더 춥게 느껴졌다.
불을 피우려 했지만 근처에 나무 한 그루 보이지 않았다.
결국 부서진 나무 문짝을 뜯어 불을 붙였다.
타닥, 타닥.
작은 불꽃이 겨우 어둠을 밀어냈다.
불 옆에 웅크리고 앉아 하늘을 봤다.
별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화산재가 하늘까지 뒤덮은 건지, 원래 이 동네는 이렇게 캄캄한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냥 눈을 감았다.
잠이 오지 않을 줄 알았는데 몸이 지쳐서인지 금세 곯아떨어졌다.
다음 날 아침, 나는 관청 잔해를 뒤지며 영지 운영에 관한 서류를 찾으려 했다.
글자를 읽을 줄 몰랐지만 그림이나 도장이라도 있으면 뭔가 알 수 있을 줄 알았다.
서류함을 하나씩 열어봤지만 대부분 바스러져 손대는 순간 가루가 됐다.
운이 좋게 상자 안쪽에 온전한 종이 몇 장이 남아 있었다.
한 장을 펼쳤더니 붉은 도장 옆에 숫자가 적혀 있었다.
숫자는 조금 읽을 줄 알았다.
"…이백에서 십이로 줄었다고?"
인구수인 듯했다.
이십 년 전엔 이백 명이 살던 곳이 지금은 열두 명 남았다는 뜻인 것 같았다.
그 열두 명은 지금 어디 있는지 서류에는 나와 있지 않았다.
숫자를 보고 있으니 등골이 서늘해졌다.
이백 명이 열두 명이 됐다는 건 죽었거나, 도망쳤거나, 둘 중 하나일 텐데 서류는 침묵하고 있었다.
이 땅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짐작조차 안 됐다.
[영주님, 세금 정산은 언제 하실 계획입니까?]
어디선가 들려온 목소리에 검을 뽑았다.
돌아보니 텅 빈 방구석에서 늙은 관리 하나가 유령처럼 앉아 있었다.
정확히는 유령은 아니고, 이 폐허에 남은 마지막 서기관이었다.
백발에 먼지가 얼마나 쌓였는지 머리인지 재인지 구분이 안 될 정도였다.
"당신, 사람이었소?"
"산 사람입니다. 왜 그렇게 놀라십니까."
서기관은 태연하게 대답했다.
오히려 이쪽이 이상한 사람처럼 취급당하는 기분이었다.
검을 다시 집어넣으면서도 심장은 아직 두근거렸다.
이런 폐허에서 사람이 툭 튀어나올 거라고 누가 예상이나 하겠는가.
"언제부터 거기 앉아 있었소?"
"영주님이 오시기 훨씬 전부터입니다."
대답이 너무 태연해서 더 소름이 돋았다.
"세금은 뭐로 걷습니까?"
"화산재가 뒤덮은 땅에서 나올 게 없는데 뭘 걷습니까."
"그럼 영지 운영 자금은 어디서 나옵니까."
"…없습니다. 그래서 다들 떠났습니다."
서기관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나는 이마를 짚었다.
왕이 나에게 준 건 영지가 아니라 애물단지였다.
애물단지 정도가 아니라 아예 짐짝이었다.
전공을 세웠다고 준 상이 이런 거라면 차라리 상을 안 받는 게 나았을 뻔했다.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는데 서기관은 여전히 담담한 얼굴로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럼 남은 열두 명은 어디 있습니까?"
"그건 저도 모릅니다. 저는 서류만 지켰습니다."
"사람보다 서류가 중요했다는 겁니까?"
"영주님이 오시면 필요할 것 같아서였습니다."
그 말에는 뭔가 뭉클한 게 있었지만, 지금은 감동보다 배고픔이 더 컸다.
뱃속에서 요란한 소리가 났다.
부끄러워서 못 들은 척했지만 서기관은 다 들었을 게 뻔했다.
서기관이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피했다.
분명 들었으면서 모른 척해주는 게 오히려 더 민망했다.
"…뭐 먹을 거 없습니까."
"저도 못 먹은 지 오래됐습니다."
그 말에 더 물어보기가 애매해졌다.
"영주님, 짐작하시겠지만 이 땅은 곧 아무도 없는 빈 영지로 왕실에 보고될 예정이었습니다."
"…그럼 왜 나한테 준 겁니까?"
"글쎄요. 그건 대선왕 폐하의 뜻이라 저도 모릅니다."
뭔가 찜찜했다.
전쟁이 끝나고 얻은 상이 사실은 벌이었던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스쳤다.
하지만 지금 그 의도를 따질 여유는 없었다.
당장 눈앞에 있는 노인 한 명도 못 먹여 살릴 판에 음모론이나 따질 처지가 아니었다.
일단 살아야 했다.
그것도 굶어 죽지 않는 선에서.
"그 열두 명, 어디로 가면 만날 수 있습니까?"
"북쪽 협곡 너머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다만 확실치 않습니다."
"확실치 않아도 갑니다. 여기서 굶어 죽을 순 없으니."
서기관은 그제야 처음으로 살짝 웃었다.
"영주님답습니다."
무슨 뜻인지 모르겠지만 칭찬으로 들리진 않았다.
칭찬이 아니라 반쯤 비웃음 같기도 했다.
그런데도 딱히 반박할 말이 없었다.
정말로 무모한 짓이긴 했으니까.
"당신은 여기 있을 겁니까?"
"저는 서류를 지켜야 합니다."
"먹을 것도 없이 죽을 셈이오?"
"영주님이 돌아오실 때까지는 버텨보겠습니다."
그 대답에 뭐라 할 말이 없어서 그냥 고개를 끄덕이고 돌아섰다.
짐을 챙겨 북쪽 협곡으로 향했다.
협곡 입구에서부터 지형이 완전히 바뀌었다.
검은 흙 대신 뾰족한 바위가 솟아 있었고, 발밑으로 미세한 진동이 느껴졌다.
화산이 완전히 죽은 게 아닌 모양이었다.
말은 여기서부터 데리고 갈 수 없다고 판단해 관청 근처에 매어두고 왔다.
걸어서 세 시간쯤 되었을까, 다리가 후들거리기 시작했다.
전장에서 사흘 밤낮을 싸운 적도 있는데 이 정도로 지치는 게 이상했다.
아무래도 배를 채우지 못한 몸이 신호를 보내는 모양이었다.
바위 사이를 걸을 때마다 발밑에서 우드득 소리가 났다.
날카로운 돌부리에 신발 바닥이 몇 번이나 긁혔다.
숨을 쉴 때마다 마른 재 냄새가 아니라 뭔가 다른, 조금 더 뜨겁고 매운 냄새가 코를 찔렀다.
유황 냄새인 것 같았다.
협곡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공기가 후끈해졌다.
땅속 깊은 곳에서 뜨거운 김이 올라오는 게 느껴졌다.
온천이라도 있는 걸까, 잠깐 그런 생각을 했지만 지금은 물이 급했다.
땀이 등줄기를 타고 흘렀다.
방금까지 추위에 떨었는데 지금은 더워서 옷을 벗어야 할 지경이었다.
이 협곡은 도대체 어떤 곳인지, 걸을수록 정체를 알 수 없는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저 멀리서 뭔가 붉게 빛나는 게 보였다.
불빛인지, 아니면 다른 무엇인지, 눈이 침침해서 확신이 서지 않았다.
한 발짝씩 다가갈수록 심장이 이상하게 빨리 뛰었다.
전투를 앞두었을 때와는 다른 종류의 긴장이었다.
검 손잡이를 꽉 쥐었다가 다시 놓았다.
싸우러 온 게 아니라 살길을 찾으러 온 거였으니까.
그래도 손이 자꾸 검으로 갔다.
붉은 빛은 점점 커졌다.
불꽃처럼 흔들리는 게 아니라 일정하게 은은한 빛이었다.
바위틈 사이로 스며 나오는 그 빛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숨소리가 스스로도 크게 들렸다.
그리고 그 붉은 빛 아래, 사람의 형체가 서 있는 게 보였다.
뿔이 달린 형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