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 ›협곡 안쪽에서 처음 본 건 빛이었다.
핏빛으로 흔들리는 빛 한 줄기가 바위 틈에서 새어 나오고 있었는데, 처음엔 그게 마물의 눈인가 싶어서 검 손잡이에 손이 먼저 갔다.
가까이 가서 보니 아니었다.
붉은 빛은 사람이 아니라, 사람 근처에서 타오르는 화염 문양이었다.
그 앞에 서 있는 존재를 보고 나는 걸음을 멈췄다.
발이 저절로 멈춘 거였다. 머리로 판단하기도 전에 몸이 먼저 반응했다는 뜻이고, 이건 좋은 신호가 아니었다.
키는 나보다 조금 작았지만, 뿜어내는 기세는 절대 작지 않았다.
이마 양쪽에서 청색 뿔이 곡선을 그리며 솟아 있었고, 은빛 드레드락이 어깨 아래로 늘어져 있었다. 바람이 불 때마다 그 머리카락이 화염 문양의 빛을 받아 은은하게 붉은 기를 띠었다.
갈색 피부 위로 붉은 화염 문양이 뺨과 어깨를 타고 그려져 있었고, 몸에 걸친 옷은 전투복이라기보다는 거의 맨살을 드러낸 형태였다.
전쟁터에서 별의별 갑주를 다 봤지만 이런 건 처음이었다. 방어력이 있긴 한 건가 싶었는데, 저 눈빛을 보니 방어구가 없어도 상관없을 것 같았다.
그리고 그 눈, 붉은 눈동자가 정확히 나를 향해 있었다.
시선이 부딪히는 순간 등줄기가 뜨거워졌다. 위협이라기보다는, 뭔가 다 읽히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인간이 여기까지 왜 왔습니까."
낮고 서늘한 목소리였다.
손에는 이미 짧은 창을 쥐고 있었다.
나는 검을 뽑지 않았다.
뽑았다가는 상황이 어떻게 흘러갈지 알 수 없었으니까. 그리고 지금 이 거리에서 검을 뽑는 순간 저 창이 내 목을 스치고 지나갈 게 뻔했다. 계산이 그렇게 나왔다.
"길을 잃었소. 아니, 정확히는 영지 사람들을 찾고 있소."
"영지 사람들 말입니까?"
그녀의 눈썹이 살짝 움직였다.
"당신이 그 새로 온 영주입니까."
"…어떻게 알았소?"
정말로 놀라서 나온 질문이었다. 나는 명찰을 달고 다니지도 않았고, 영주라는 걸 증명할 만한 아무것도 몸에 지니고 있지 않았다.
"인간이 이 협곡까지 걸어올 정도로 어리석은 이유는 그것 하나밖에 없으니까요."
말투에 가시가 있었지만 묘하게 웃겼다.
어리석다는 표현이 정확한 것 같아서 반박할 수도 없었다. 실제로 나는 지도도 없이 화산 지형을 이틀째 헤매고 있었으니까.
"맞소. 잿골의 새 영주요, 한도윤이오."
"이름 같은 건 관심 없습니다."
창끝이 살짝 내 목 쪽을 향했다.
등줄기로 서늘한 기운이 흘렀다.
근데 이상하게도 위협을 느끼지 않았다.
오히려 저 붉은 눈 안에 숨겨진 다른 감정이 보였다.
경계, 그리고 그 아래 아주 작은 호기심.
전쟁터에서 사람 눈을 수백 번 마주쳤다. 죽이려는 눈, 도망치려는 눈, 포기한 눈. 이건 그 어느 쪽도 아니었다. 오히려 낯선 물건을 발견한 아이의 눈에 더 가까웠다.
"당신들이 이 땅에 살고 있다는 걸 왕실은 모르는 모양이오."
"당연합니다. 알았으면 벌써 우리를 쫓아냈을 테니까요."
그녀는 짧게 웃음을 뱉었다. 웃음이라기엔 냉소에 더 가까웠다.
"그쪽도 그럴 생각입니까?"
"아니오. 그럴 생각 전혀 없소."
대답이 너무 빨리 나가서 나조차 놀랐다.
하지만 진심이었다.
부모님이 남긴 말이 그 순간 떠올랐다.
힘 있는 자는 약한 자를 지켜야 한다.
이 땅에 남은 게 열두 명이든, 그 이상이든, 내가 쫓아낼 이유는 없었다. 애초에 이 잿더미 같은 땅을 놓고 누구와 싸울 이유도 없었다. 왕실이 버린 땅이었고, 그 땅에서 누군가 살아남았다면 오히려 고마워해야 할 일이었다.
"…웃긴 인간이네요."
그녀가 창을 내렸다.
완전히 방심한 건 아니었지만 적어도 경계가 조금 풀린 게 느껴졌다. 어깨의 각도가 달라졌고, 창을 쥔 손의 힘이 빠졌다.
"저는 유하입니다. 이 협곡 안쪽 마을 사람이고요."
"유하…"
입 밖으로 이름을 뱉어보니 낯선 발음이 이상하게 편안했다.
"뿔 달린 종족을 처음 봐서 놀랐소만, 나쁜 뜻은 아니오."
"영민족입니다. 인간들 사이에서는 그렇게 안 부르지만요."
"영민족."
처음 듣는 단어였다.
책에서도 못 본 이름이었다. 왕실 도서관에 있는 지리서나 종족지에도 이런 명칭은 없었다. 그렇다면 이 종족의 존재 자체가 왕실 기록에서 지워졌다는 뜻인가.
"저희는 이 땅이 화산재로 뒤덮이기 전부터 여기 살았습니다. 인간들이 도망친 뒤에도 저희는 남았고요."
그 말에 뭔가 뜨끔했다.
왕실이 버린 땅을 지킨 게 인간이 아니라 이 종족이었다는 뜻이었다.
"그렇다면 이 땅의 진짜 주인은 당신들이란 소리군."
"이제 와서 그런 말을 해봐야 뭐가 달라집니까."
유하는 팔짱을 끼며 나를 훑어봤다.
마치 물건을 감정하는 눈빛이었다. 그 시선이 얼굴에서 목, 어깨, 손끝까지 훑고 지나갔는데, 벌거벗겨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옷은 그대로 입고 있는데 왜 이런 기분이 드는지 모르겠다.
"몸에서 피 냄새가 납니다. 최근에 사람을 여럿 죽였군요."
"…전쟁터에서 왔소."
"전쟁 영웅이라는 그 인간입니까."
"어떻게 알고 있소?"
이번엔 정말로 궁금해서 물었다. 여기가 왕도에서 얼마나 떨어져 있는지 나도 정확히 몰랐는데, 소문이 여기까지 흘러왔다는 게 신기했다.
"소문은 여기까지도 흘러듭니다. 뿔이 달렸다고 귀도 없는 건 아니니까요."
농담인지 진담인지 구분이 안 가는 말투였지만, 나는 그 순간 처음으로 웃음이 났다.
전쟁터를 나온 뒤 처음 웃은 순간이었다.
내가 웃을 수 있는 사람이었다는 걸 잠시 잊고 있었다는 걸, 그 순간 깨달았다.
"웃으시네요. 죽을 뻔한 사람치고는 얼굴이 편해 보이는데요."
"당신 말이 웃겨서 그렇소."
"…이상한 인간이네요."
유하가 살짝 고개를 갸울였다.
뿔 사이로 은빛 머리카락이 흔들렸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이상하게도 경계심이 사라졌다. 창을 쥐고 있는 상대인데도, 위험한 사람이라는 생각보다는 그냥 눈앞에 있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배는 안 고프십니까? 얼굴이 반쯤 죽은 사람 같습니다."
"…굶은 지 이틀째요."
솔직하게 말했다. 굶은 배가 그 순간에 맞춰 요란하게 소리를 냈고, 나는 그 소리를 애써 무시하려 했지만 협곡 안이라 유난히 크게 울렸다.
그 말에 그녀의 표정이 처음으로 살짝 변했다.
동정인지, 다른 무엇인지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적어도 조금 부드러워졌다.
"따라오세요. 마을에 데려가드리겠습니다."
"왜 갑자기 마음이 바뀌었소?"
"마음이 바뀐 건 아닙니다. 그냥 굶어 죽는 인간을 보는 게 별로 좋지 않아서요."
그녀는 등을 돌리고 앞장서 걷기 시작했다.
나는 잠깐 그 자리에 서서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등에도 화염 문양이 있었는데, 어깨뼈를 타고 내려가는 곡선이 마치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보였다.
걸어가는 동안 나는 그녀의 발걸음을 관찰했다.
바위 사이를 익숙하게 넘고, 위험한 지형을 미리 아는 것처럼 피했다.
이 협곡 전체가 그녀의 집인 모양이었다.
나는 몇 번 발을 헛디뎠는데, 그럴 때마다 유하가 뒤도 안 돌아보고 "거기는 밟으면 안 됩니다." 하고 툭 던졌다. 어떻게 뒤도 안 보고 아는 건지 물어보고 싶었지만 그냥 참았다.
"마을에 몇 명이나 사오?"
"물어서 뭘 하시려고요. 세금이라도 걷으시려고요?"
"…아니오. 그냥 궁금해서."
"쉰 명이 조금 안 됩니다. 예전에는 더 많았지만요."
예전이라는 말에 뭔가 무거운 여운이 있었지만, 그녀는 더 설명하지 않았다.
나도 더 묻지 않았다. 처음 만난 사람의 아픈 데를 굳이 후벼 팔 필요는 없었으니까.
협곡을 벗어나자 뜨거운 김이 올라오는 좁은 계곡이 나타났다.
땀에 젖은 옷 위로 뜨거운 김이 훅 끼쳐 왔고, 유황 냄새 비슷한 것이 코를 찔렀다. 처음엔 역했지만 몇 걸음 걷다 보니 익숙해졌다.
그 안쪽으로 나무로 지은 낮은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지붕은 얇은 나무 판자를 여러 겹 겹쳐 올린 형태였고, 벽 틈으로 뜨거운 지열이 새어 나오는지 눈 쌓인 곳이 하나도 없었다. 화산 지대 한복판에서 이런 마을을 이루고 살아간다는 것 자체가 놀라웠다.
불빛이 새어 나오는 창문들, 그리고 그 사이로 나를 노려보는 시선들이 하나둘 느껴졌다.
뿔 달린 아이들이 문 뒤에서 고개만 내밀고 나를 쳐다봤다.
한 아이는 손가락으로 나를 가리키며 뭐라고 소리쳤는데,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었다. 유하가 그쪽을 향해 짧게 한마디 하자 아이는 얼른 문 안으로 숨었다.
어른들은 좀 더 대놓고 경계하는 눈빛이었다.
몇몇은 손에 도구를, 몇몇은 아예 창이나 낫 비슷한 것을 쥐고 있었다. 나를 향한 시선에는 두려움보다 분노가 더 짙게 섞여 있었는데, 그게 왜인지 이해가 갔다. 인간이라는 존재가 이 사람들에게 좋은 기억으로 남아 있을 리 없었다.
"저 인간이 새 영주라는 거 정말이야?"
어디선가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쫓아내지 않고 데려온 이유가 뭐야, 유하?"
한 노인이 앞으로 나서며 물었다.
뿔은 유하보다 훨씬 짙은 색이었고, 얼굴에는 세월의 골이 깊게 새겨져 있었다. 지팡이를 짚은 손등에는 화염 문양이 거의 흐릴 정도로 오래되어 보였다.
주변의 다른 사람들이 하나둘 그 노인 뒤로 모여들었다. 순식간에 나를 둘러싸는 반원이 만들어졌고, 그 중심에 나 혼자 서 있었다. 이건 마치 전쟁터에서 포위당했을 때와 비슷한 감각이었는데, 여기서 검을 뽑으면 정말로 끝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유하가 대답 대신 나를 돌아봤다.
그 눈빛이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이제부터가 진짜 시작이라고.